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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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우유 1883년 조선은 미국으로 외교 사절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일행 가운데 최경석(崔景錫·?~1886)은 다른 무엇보다 미국의 농장·농기계·가축에 푹 빠져들었다. 조선에 돌아온 최경석은 고종을 설득해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을 세운다. 새 농업 시험의 터전이 이렇게 태어났다. 최경석은 1885년 저지(Jersey) 품종 젖소까지 조선에 도입한 듯하다. 본격적인 낙농업을 꿈꾸었다는 뜻이다. 독농가(篤農家) 공무원의 마음과 행동이 이렇게 구체적이었다. 최경석이 ‘시험’한 작물의 면모는 <농무목축시험장소존곡약종(農務牧畜試驗場所存穀藥種)>에 정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행간마다 꿈꾼 사람의 열심과 악전고투가 깃든 목록이다. 하지만 1886년 최경석은 돌연 사망한다. 과로사였을 것이다. 그 뒤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농무목축시험장은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이후의 젖소 도입과 목장 경영은 온통 일본인 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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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함부로 떠들지 말라 조선 왕실의 밥상은 누가 어떻게 차렸을까? 함부로 답하기 어렵다. 다만 문서를 더듬어 윤곽이나마 그리는 수밖에 없다. 먼저 궁 안 음식 업무의 중심에 사옹원(司饔院)이 있다. 그 아래 총주방인 수라간(水刺間), 일상의 끼니를 차리는 외소주방(外燒廚房), 술이 있는 제2주방인 내소주방, 과자 등 간식류를 맡은 생물방(生物房)이 소임에 따라 움직였다. 궁 밖에서 큰 연회가 열리면 임시 주방인 조찬소(造饌所)를 열어 음식을 차렸다. 사옹원 인력은 본격적인 조직표 아래 움직인 전문 음식 인력이다. 업무는 오늘날 못잖게 섬세하게 나뉘었다. 사옹원의 총책임자 아래에는 총주방장과 부주방장 격의 인원이 배치된다. 그 아래 오늘날로 치면 주방장 노릇을 하는 반감(飯監)이 배치된다. 그 아래로 다시 분야별 담당인 각색장(各色掌)이 업무를 맡았다. 고기 음식 담당 별사옹(別司饔), 물 담당 탕수색(湯水色), 상차림 담당 상배색(床排色), 생선구이 담당 적색(炙色), 밥 짓기 담당 반공(飯工), 두부 담당 포장(泡匠), 술 담당 주색(酒色), 차 담당 차색(茶色), 떡 담당 병공(餠工), 찜 담당 증색(蒸色), 조명 담당 등촉색(燈燭色), 기물 담당 성상(城上)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조직표는 <경국대전> 등 정부의 문서에 남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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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명란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평화 “한국인은 바다를 내륙 깊숙이 끌고 들어와 살아왔다. 오늘도 그렇다.” 인류학자 오창현 교수(국립목포대)의 이 한마디는 장을 보거나 밥상을 차리거나 늘 새삼스럽다. 그렇지, ‘깊숙이’지! 한국인의 바다는 내륙 뱃길이 끊겼다고 끊기지 않는다. 한국인의 바다는 말에 실려, 말도 못 갈 길이라면 사람의 등에 실려 깊은 골로 들어가고, 높은 산에 올랐다. 두메산골에서도 새우젓 두어 달걀찜 찌고, 젓갈 넣어 김치 담갔다. 구실아치한테서도 잊혀진 화전민도 미역국은 끓였다. 누구에게나, 간 질러 맛 들였거나 잘 말려 갈무리한 수산물 한 입씩은 돌아갔다. 온갖 젓갈, 말리거나 염장한 바닷말, 굴비며 간고등어가 있는 밥상, 말린 가자미·장어·대구·가오리·졸복·멸치·오징어 등등에 얽힌, 이루 다 주워섬기기 어려운 그 ‘깊숙이’의 면면한 일상이 현대 한국형 냉장·냉동 수산물과 그 유통을 낳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산골 가던 말짐과 등짐은 오늘 어디에 있는가? 원양과 바다와 내륙을 잇는 냉장·냉동 탑차와 활어차와 수족관에 깃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오늘이나 예전이나, 그 물목이 무엇이든 출발은 바다의 노동이다. 그 생산의 풍경은 또한 문학 안으로 훅 치고 들어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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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서양제과의 어렴풋한 그림자, 가수저라 “가수저라(加須底羅)는 깨끗한 밀가루 한 되와 백설탕 두 근을 달걀 여덟 개로 반죽하여 구리냄비에 담아 숯불로 노랗게 되도록 익힌다. 대바늘로 구멍을 뚫어 불기운이 속까지 들어가게 하여 만들어 꺼내서 잘라 먹는데, 이것이 최고의 상품이다.” 이덕무(1741~1793)가 엮은 일본 지리지 <청령국지>, 그리고 그의 손자 이규경(1788~?)이 엮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한 문단이다. 둘 다 일본의 음식 정보를 갈무리하며 쓴 내용이며, 둘 다 18세기 일본의 백과전서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속 가수저라, 곧 카스텔라 항목 그대로다. 일본을 가본 적 없는 이덕무와 이규경이 남긴 가수저라 기록은 조선 후기에 떠돌던 중국 및 일본 경유 서양 제과의 어렴풋한 그림자일 테다. 서유구(1764~1845) 또한 <임원경제지>에 가수저라를 실었고 실제로 구워보기도 한 듯하다. 그렇다면 서유구가 구워 낸 그것의 물성과 풍미가 어땠을까? 알 수 없다. 서유구가 쓴 밀가루, 설탕, 달걀의 품질과 품위는 미궁이다. 설탕이 들어간 달걀의 거품에 잇닿은 제과 기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해냈는지도 미궁이다. 본격적인 오븐도, 16세기 나가사키에서 나온 카스텔라 전용 소형 오븐인 ‘히키가마(引き釜)’도 없이, 솥 또는 노구솥 또는 쟁가비나 벙거짓골쯤을 붙들고, 어떤 불을 어떻게 썼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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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역사가 가득 찬 감자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 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둑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잣개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평양 출신 김동인이 1925년 발표한 소설 ‘감자’의 한 구절이다. 이 감자는, 그런데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3월부터 햇감자 나오기 시작해 사철 감자를 만날 수 있지만 두 세대 전만 해도 감자는 하지감자가 다였다. 감자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다다른 이래 유럽으로 건너간 자원 가운데 하나다. 감자는 유럽에서 다시 인도와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열도로 번졌다. 한반도 사람들은 이 자원에 감저(甘藷)·북감저·북저·토감저 등의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한국인의 일상에는 ‘감저’에서 변한 ‘감자’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들어온 ‘북감저-감자’와 일본에서 들어온 ‘남감저-고구마’의 이름을 둘러싼 혼란은 상당했다. 흙 속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데다, 전분에서 비롯한 물성이 겹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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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옥수수의 변신은 무죄 옥수수의 고향은 아메리카이다. 북부 안데스 또는 멕시코 일대를 그 원산지로 추정한다. 옥수수는 오늘날 밀, 벼와 함께 세계 3대 식량작물에 드는 귀중한 자원이다. 사람도 먹지만, 절반 이상이 온 지구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그만큼 잘 자라는 작물이란 말이다. 옥수수는 조선 후기에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 조선의 문헌에는 옥미(玉米), 옥촉서(玉蜀黍), 옥수수미(玉穗穗米) 등으로 기록되었고 해방 이후 ‘옥수수’가 자리를 잡는다. 1690년 간행된 한조(漢朝) 대역 어휘집 <역어유해(譯語類解)>는 ‘玉薥薥(옥촉촉)’을 표제어로 잡고 한어음은 ‘유슈슈’로, 조선어음은 ‘옥슈슈’로 달았다. 1776년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옥촉서(玉薥黍, 옥슈슈)’를 표제어로 하고 “(옥수수는) 다섯 가지 빛깔이 있다. 봄에 비옥한 땅에 심고 (…) 쪄서 먹을 수 있으며, 죽을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아서 율무보다 낫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조선 의주와 중국 북경 사이의 벌판에 수수 또는 옥수수가 빽빽이 들어서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니 중국을 다녀온 조선 사람의 기행문 속에서 옥수수 이야기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추위가 심하면 몸도 녹일 겸, 벌판의 가게에 들어가 옥수수국수를 사 먹는 장면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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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진공의 계절 “조기는 평소에 먹는다. 그런데 나는 민어가 아무래도 조기만 못한 것으로 안다.” “가을 보리밥, 고추장, 집장이 내 입에 맞는가 보다.” “송이, 생전복, 새끼꿩고기, 고추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렇다면 입맛이 아주 늙은 것도 아니다.” 이상은 조선왕 영조가 각각 40세, 64세, 74세에 자신의 식성에 대해 한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보인다. 보리밥과 고추장에 조기(굴비)라. 보리밥, 고추장, 조기로 한 벌을 이루는 그 맛은 평민의 맛 아닌가.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출신이 미천했고, 모자는 아버지 숙종의 눈밖에 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영조는 18세부터 28세까지는 궁 밖에서 지내야 했다. 또한 비린내 나는 생선, 생선알, 새우알, 젓갈, 게젓이 싫다고도 했다. 궁 밖에서 살 때에는 나박김치를 좋아했고, 봄 아욱과 미나리, 여름 토란이 입에 맞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집착한 음식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맛난 음식이 다 모인 데가 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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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된장찌개에 담긴 ‘유정과 무정’ “노파의 만드는 장찌개는 그다지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가 된장찌개를 제일 잘 만드는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렇게 자랑을 하였다.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다. 그러나 노파의 명예심과 정성을 깨뜨리기가 미안하여, ‘참 좋소’ 하였다. 그러나 ‘참 맛나오’ 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이 ‘참 좋소’로만 족하였었다.” ‘우리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 ‘당시 지식청년들의 자서전’ 등의 평을 받는 이광수(1892~1950)의 소설 <무정> 속 한 장면이다. ‘매일신보’ 연재를 시작한 해가 1917년, 책으로 펴낸 해가 1918년이다. 그때 한반도의 도시에서는 일식과 중식 요리점이 성업 중이었다. 프랑스 음식을 갖춘 호텔의 영업에도 물이 올랐다. 볼셰비키와 소련이 싫어 러시아를 떠난 이른바 백계 러시아 사람들은 경성에 정착해 러시아빵을 구웠다. 커피와 브랜디와 맥주와 샴페인은 도시 경관의 일부였다. 지구 곳곳에서 온 깡통과 병조림 음식, 양철 상자에 곱게 누운 형형색색의 과자가 얼마든지 한반도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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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노래로도 꽃피운 ‘고등어 사랑’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동남해역의 한 어시장을 걷다 남들도 모르게 읊조리고 말았다. 어른 팔뚝만 한 당당한 몸통에 유선을 그리며 매끈하게 빠진 몸, 그리고 형형한 눈빛과 어울린 등허리의 빛나는 푸르름이라니. 시르죽어 널브러진 뼘가웃짜리 내륙 어물전의 고등어에 댈 게 아니다. 이즈음 통영과 포항 사이 바다에서 나는 고등어란 ‘헌걸차다’는 한국어, ‘아름답다’는 한국어를 어디에 써야 할지를 일깨우는 존재다. 1983년 나온 김창완의 ‘어머니와 고등어’는 여전히 힘이 세다.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하는 노랫말이 다시 귓속에 쟁쟁하다. 당대 대중의 노래 속에서도 헤엄쳐온 이 물고기는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이미 중요한 수산자원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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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떠오른 분식, 사라진 밀밭 통계만 한 문헌도 없다. 한강 이북과 강원도 지역에서 벼 수확이 시작된 즈음에 숫자를 더듬는다. 2021년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양곡소비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0년 가구 부문의 1인당 쌀 소비량은 57.7㎏으로 2019년 소비량 59.2㎏보다 2.5% 감소했다. 이는 역대 최저치이며 1990년 소비량 119.6㎏에 견주어 절반 수준이다. 이를 다시 1인당 하루 쌀 소비량(평균)으로 따져보면 158.0g, 그러니까 하루에 밥 한 공기 분량의 쌀을 먹는 정도라는 뜻이다. 이렇게 먹고 어떻게 사나? 어떻게라니, 여러분의 짐작대로다. 밀가루가 있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밀가루 소비량은 34.2㎏이다. 1965년도의 11.5㎏에 견주어 세 배쯤 뛴 셈이다. 최근의 밀가루 연간 소비량은 약 200만t으로 추산한다(한국제분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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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돈 전(錢)자도 따라왔던 ‘전어’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 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 달라 하자/ 바다는 떼 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 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정일근 시인의 ‘가을 전어’ 한 수가 참 맛있다. 전어가 내유한 바닷가에서는 이미 8월 하순부터 전어를 잡아 올려 뼈째로 또는 막회로 써느라 바쁘다. 채를 쳐 고추장이나 초고추장에 비벼도 먹는다. 깻잎과 어울린 전어의 살, 거기에 저민 마늘 몇 쪽 곁들인 쌈의 맛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오를 대로 오른 그 기름기의 풍미를 폭렬케 하는 데는, 시인의 말처럼 ‘조선 콩 된장’만 한 것도 없다. 짠맛을 맛있게 짜게 먹자고 태어난 원초적인 조미료가 장이다. 들척지근한 장으로야 어디 생선의 감칠맛과 고소함이 폭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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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그 남자네 집’의 민어와 굴비 “다행히 월급날은 쉬 돌아왔고 계절 따라 제철 음식도 새록새록 했다. 복(伏)이 들자 시어머니는 민어 먹을 때라고 귀띔을 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 속 한 구절이다. 이 소설은 허구와 자전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나’가 느낀 첫사랑의 두근거림, 두근거림만으로 못 이긴 환멸, 월급날이 있는 다른 남성과 이룬 혼인, 피로와 우울이 감도는 시집살이, 일탈, 출산, 회한의 순간순간이 발휘하는 흡인력은 텔레비전 연속극 못잖다. 이야기가 서울, 1950년대를 따라 펼쳐진다. 그러느라 서울깍쟁이들의 요란한 음식문화도 펼쳐진다. 복 들자 민어라 했다. 시어머니는 민어를 이렇게 다루었다. “민어의 몸은 횟거리와 찌갯거리, 그리고 구이용으로 나누어졌다. (…) 애호박 썰어 넣고 고추장 풀고 끓인 민어찌개 맛은 준칫국과는 또 다른 달고 깊은 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