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최신기사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커피, 샴페인, 문명개화 “만일 춘향이라도 그가 현대의 여성이라면 그도 머리를 파마[permanent]로 지질 것이요, 코티[Coty. 프랑스산 화장품]를 바르고 파라솔을 받치고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먹을 것이다. (중략) 커피를 먹는 생활이 먼저 생기고, 파마식으로 머리를 지지는 생활이 먼저 생기니까 거기에 적응한 말인 ‘커피’ ‘파마’가 생기는 것이다.” 소설가 이태준(1904~?)의 <문장강화> 속 한 대목이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글쓰기 안내서인 <문장강화>는 1930년대에 집필과 연재가 시작되어 1948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한 소설가가 태어나 글 쓰고 살아간 내내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모든 변화는 급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고 보니 춘향은, 신재효(1812~1884)가 정리한 판소리 대본에서는 유리종에 받은 귤병차(橘餠茶)를 달게 마셔 넘겼다. 봄날 그네 뛰다 목이 마른 이팔청춘의 한 잔이 이랬다. 귤병은 감귤류를 꿀과 설탕에 졸여 만든 화사한 별미이다. 귤병으로 만든 청량음료가 귤병차이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경성모던 식민지 조선의 중산층과 부자에게 빵은 낯선 식료품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1927년 9월7일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침에는 밥 대신에 우유와 빵을 먹고 가겠다고 한다”는 사연과 함께 “식빵의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법”을 다루었다. 조선의 라디오 방송과 신문과 잡지는 식빵·샌드위치·프렌치토스트·토스트샌드위치 만드는 법, 빵에 잼·버터·우유·커피·홍차 등을 곁들여 한 끼 제대로 먹는 법을 싣고 또 실었다. 이런 정보는 대도시 유복한 가정의 주부와 학생에게 쓸모 있는 정보였다. 부잣집 도련님은 ‘빵투정’도 했다. 반찬 시원찮은 밥상 앞에서 벌이는 밥투정과 매한가지다. 샐러드나 맛난 잼 또는 버터가 있어야 제대로였다. ‘조선의 수부(首府)’ 경성(京城), 일본말로 게이조(けいじょう) 한복판에서 커피와 토스트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회사원이 등장하는 소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날의 서울 풍경 그대로다. 여기까지가 요식업, 영화, 연속극, 문학 등이 식민지 풍경을 ‘레트로 디자인’으로 축소/재현하는 원인이겠다. ‘경성’ ‘모던’을 내건 식당, 식민지 조선의 선남선녀가 ‘런치’를 먹겠다고 경성을 누비는 장면도 쓸 만해서 썼겠다. 하지만 빵과 샌드위치와 토스트샌드위치의 식도락을 즐긴 조선 사람은 극소수였다. 빵은 서민대중이 쉬이 누릴 수 있는 먹을거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에서 제빵제과자업을 독점한 일본인 종사자는 조선인을 허드렛일에만 부렸다. 기술 전수는 없었다. 오히려 만주로 간 조선인, 일본에 들어간 조선인에게 어쩌다 기술 습득의 기회가 생겼다. 이들이 해방 후 한국 제빵제과의 1세대를 이룬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제빵제과의 시작은 해방 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방은 제빵제과의 역사에서도 해방이다. 그러고 보니 ‘개벽’ 1925년 새해 특집의 한 꼭지가 가슴을 콕 찌른다. 나무꾼에서 식모, 지게꾼에서 공장 노동자에 이르는 노동자를 인터뷰한 이 꼭지에는 종로 네거리의 엿장수 최성오의 목소리 또한 실렸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복잡하구나 부재(不在)도 증거가 된다. 기원전 202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논어>에는 밀가루 음식 이야기가 단 한마디도 없다. <논어>에는 잘 찧어 지은 밥, 거친 밥, 나물국, 칼질 제대로 한 재료, 제철 먹을거리, 재료에 맞는 장(醬), 생강 등에 얽힌 공자의 식생활이 담겨 있다. 아득한 옛날에도 불량식품은 있었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저잣거리에서 파는 술과 육포를 꺼렸다. 하지만 호병(胡餠: 호떡), 국수, 찐빵, 만두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럴 수밖에. 그때까지 밀과 분식은 아직 중국에 널리 퍼지지 않았으니까. 밀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에 중국에 전해졌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너의 이름은 ‘없으면 어쩔 뻔했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먹을거리가 몇 있다. 멸치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 먹을거리이다. 대중적이면서도 알찬 육수의 바탕이다. 윤곽이 분명한 감칠맛을 낸다. 마른멸치·멸치볶음·멸치조림·멸치육수·멸치가루·멸치젓갈·멸치젓국 등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빙그레 웃음이 난다. ‘그래 있어 주어 고마워’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고마운 물고기의 이름은, 제법 복잡하다. 그 이름은 뜻밖에도 수산서가 아니라 세무편람 겸 입법조사 보고서인 <균역행람(均役行覽)>(1750년)에 처음 보인다. 군포를 두 필에서 한 필로 줄이되, 부족한 만큼은 어업세·염세(鹽稅)·선박세·결작(結作, 논밭 소유세)으로 메꾸려 했다. 그래서 전국적인 어업 조사보고가 필요했다. 덕분에 보고된 어구가 ‘멸치망(滅致網)’이니 ‘멸치’는 당시에 한자 ‘滅致’로 기록된 셈이다. 이후 <실록>에서 멸치는 ‘멸어(蔑魚)’로 표기되어 등장한다. 멸치망은 면세였다. 어로 자체가 찬거리로나 잡는 소규모였기 때문이다. 멸치잡이 선단의 그물질을 떠올리시면 안 된다. 아마도 뜰채 또는 삼태그물쯤으로 떠서 잡는 정도였을 것이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동태찌개의 맛 동해, 그 남북으로 펼쳐진 해안선과 산악이 그리워 속이 타고 몸이 다는 계절이다. 그리워하다 겨울날의 미역·섭·전복·뚝지(심퉁이)·도루묵·가자미·대구·명태 따위를 떠올린다. 더구나 명태에 잇닿은 감각은 살필수록 재미나다. “고성 사람들은 황태 안 먹어요. 싱거워. 깊은 맛은 북어. 국도 북어로 끓여야 간이 맞아.” 고성과 그 이북 바다 사람들은 얼부풀 것 없이 그대로 마른 북어에서 ‘깊은 맛’을 감각한다. 대관령과 인제 쪽에서는 이런 말을 듣는다. “북슬북슬한 살이 폭신폭신, 씹으면 씹을수록 달면서 고소한 맛이 올라와.” 그곳 사람들은 얼부풀며 마른 황태에서 특유의 질감에 잇닿은 직관적인 ‘맛난 맛’(旨美)을 감각한다. 하나 더 있다. 북어파와 황태파의 대립을 전해듣던 속초 사람 함성호 시인은 떨치고 일어나 외쳤다. “그냥 먹어야지 왜 말려!” 무지한 서울내기를 가르치던 시인은 거의 절규했다. 겨울 생태에 익숙한 사람은 또 다른 기억과 감각을 쥐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 북어는 북어 맛, 황태는 황태 맛이지, 동태에 앞서 생태가 있지 하며 끄덕인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피 묻은 빵과 저급한 사과를 잊지 않겠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니. 사람이 잊지 않는다니. 영원하자던 사랑의 맹세마저 잊을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은 암송해서, 그려서, 써서, 녹음·녹화해서, 기록이라는 행위를 해왔다. 본격적인 기록물은 따로 문헌이라 일컬어 애지중지했고, 문헌을 문헌답게 쓰자고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의 체계까지 만들어냈다. 그러고도 잊는다. 잊기, 망각은 인간의 벽이 아니라 조건이다. 그래서 자꾸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아득인다. 별다른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호명하며 되풀이해 아득이는 수밖에는. 그래서 다시 냉정하게 아득인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대륙과 대륙, 문화와 문화를 가로지른 만두 “붉은 찬합 열고 보니/ 만두가 서리처럼 희구나/ 보드랍고 따뜻한 것이 병든 입에 딱 맞고/ 기분 좋은 매끄러움이 쇠약한 속을 채운다/ 종지에는 초간장/ 소반에는 찧은 계피와 생강이라/ 어느덧 싹 먹어치웠지만/ 친구의 도타운 마음은 참으로 못 잊어(朱榼初開見/饅頭白似霜/軟溫宜病口/甛滑補衰腸/甕裏挑梅醬/盤中擣 桂薑/居然能啖盡/厚意儘難忘).” 조선 전기 문인 서거정이 친구가 선물한 만두 한 통에 부친 시가 흐뭇하기만 하다. 이만한 친구를 두었다면 충만한 인생 아닐까. 이즈음에 더욱 그리운 만두는 피에 소를 싸 빚어 익힌 음식이다. 지져도, 쪄도, 삶아도, 튀겨도, 국물에 띄워도 다 좋다. 피와 소는 서로가 서로에게 폭 안긴다. 아니, 피와 소가 따로 놀지 않아야 제대로 된 만두다. 만두는 짭짤하게도, 심심하게도, 달콤하게도 연출 가능하다. 차면 차서 좋고, 따듯하면 따듯해서 좋다. 맑고 가벼운 육수, 짙고 무거운 육수, 기본 장국, 중앙아시아 및 그 서쪽의 크림·요구르트와도 잘 어울린다. 만두는 온 지구 어느 민족에나 보편적인 음식이다. 이베리아에서부터 지중해 권역, 중앙아시아, 유라시아, 인도, 중국,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만두가 없는 곳은 없다. 그래서일까. 민족을 넘은 사랑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는데/ 회회(回回)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하는 고려 사람의 노래 속 ‘쌍화(雙花)’ 또는 ‘상화’란 발효해 부푼 밀가루 반죽 찐빵 또는 만두이다. 회회아비는 이슬람 세계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이 노래 한 자락이 곧 대륙과 대륙, 문화와 문화를 가로지른 만두의 자취이다. ‘상화’는 조선 여성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도 이어진다. 장계향은 밀가루에 술을 써 반죽을 부풀리는 ‘상화’와 함께 다양한 만두를 기록했다. 만두의 피는 밀가루 또는 메밀가루 반죽에서 밀고, 소에는 무·꿩고기·후춧가루·초피가루·표고·송이·석이 등을 두루 쓴다. 잘 삶은 만두에는 생강즙 친 초간장을 곁들여 풍미를 더했다. 생선살을 만두피로 쓰는 어만두, 숭어만두도 실려 있다. 어만두 항목을 보자. “생선을 매우 얇게 저민다. 소는 석이·표고·송이와 꿩고기, 잣을 한데 찧어 간장기름에 볶고, 저민 고기에 넣는다. 녹두가루를 빚어서 살짝 묻혀 만두같이 삶아서 쓰라.” 눈으로 먼저 먹으라고 만드는 화려한 만둣국인 석류탕(石榴湯)은 이렇다. “(전략) 밀가루를 곱게 다시 쳐서 물에 반죽하여 지지되, 얇게 만두피를 빚듯이 한다. 고기 볶은 것과 잣가루를 함께 넣어 작은 석류 모양처럼 둥글게 집는다. 맑은 장국을 안쳐 매우 끓거든 (중략) 술안주에 쓰라.” 물만두인 ‘수교애’는 이렇다. “표고·석이·오이를 가늘게 썰어 잣, 후춧가루로 양념하여 밀가루를 베에 쳐서 국수처럼 반죽하여 얇게 쌓아 놓고, 놋그릇 굽을 박아 도려내어 그 소를 가득 넣어 오래 삶아 기름을 묻혀 초간장과 함께 드려라.” 이미 허균이 여름 별미로 장미전(薔薇煎)·수단(水團)·쌍화·만두를 손꼽았으니 한반도 만두의 내력이 더욱 새삼스럽다. 이어받아 꽃피우자고 하면 또한 꽃피울 만한 내력 아닌가. 이런 내력이 곧 한식의 밑천 아닌가.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보면 볼수록 만만찮은 호떡 연대기 “꿀 든 호떡을 먹을 적에는 반드시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서 먹어야 한다. 한 입 베어 물면 꿀이 꿰져 나와 뚝뚝 떨어진다. 그 꿀이 입에서는 뜨거운 줄 모르는데, 손등에라도 떨어지면 몹시 뜨겁고, 핥아먹고 나면 살갗이 알알하다./ 이 꿀 든 호떡을 먹노라면, 입가에 검은 꿀이 묻어서 물에 씻어야 지워졌다.” 일평생 아동문학에 매달려 살다 간 어효선(1925~2004년)이 남긴 호떡 이야기 한 도막이다. 혓바닥 데는 줄 모르고, 입천장 까지는 줄 모르고 먹는 호떡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통칭 ‘중국 사람들’, 곧 화교가 꽉 잡고 있었다. 화교가 이 땅에 들여온 음식이니 그럴 수밖에. 굽는 풍경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어효선의 회고에 따르면 호떡은 화교의 중국집에서 팔던 음식이었다. 호떡집에는 벽돌로 쌓고 흙으로 미장한 부뚜막이 있다. 호떡은 부뚜막 위에 놓인 둥근 철판에서 애벌구이한다. 그러고는 불이 이글이글 타는 화덕에 빙 둘러 넣어서는 속을 고루 익혀 완성했다. 그때는 설탕소 말고 팥소도 썼다. 하지만 “아이들은 팥 든 것보다 검은 설탕 든 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팥 든 호떡은 지름이 10㎝, 설탕 든 호떡은 얇아도 지름이 15㎝였다. 아이들은 찐득한 흑갈색 설탕소를 ‘꿀’이라 부르며 신나게 호떡을 먹어치웠다. <수정증보 조선어사전>(1940년) 또한 호떡을 일러 “양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둥글넓적하게 만들고 속에 흑설당이나 혹은 팥 소를 넣어 철판에 구운 떡”이라 했으니, 전에는 딱 한 가지 호떡이 다가 아니었음을 익히 알 만하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운수 좋은 날 “선술집은 훈훈하고 땃땃하였다. 추어탕을 끓이는 솥뚜껑을 열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김, 석쇠에서 뻐지짓뻐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북어며 빈대떡…. 이 너저분하게 늘어놓인 안주 탁자, 김 첨지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현진건(1900~1943)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의 한 장면이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늘따라 운수가 좋았다. 승객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덕분에 앓아누운 아내가 사흘을 조른 ‘설렁탕 국물’ 한 그릇을 마련하고도 남을 만큼 주머니가 찼다. 허기가 질 대로 진 김 첨지는 선술집에 들러 되는 대로 요깃거리를 골라잡았다. “배고픈 이는 우선 분량 많은 빈대떡 두 개를 쪼이기로 하고 추어탕을 한 그릇 청하였다.” 김 첨지는 허겁지겁 빈대떡을 먹어치운 뒤, 추어탕 한 그릇을 순식간에 물같이 들이켰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석쇠에 얹어 구운 떡은 ‘쭝덕쭝덕 썰어’ 먹어 치웠다. 요기를 마친 김 첨지는 잊지 않고 설렁탕을 사 들고 귀가한다. 하나 아내는 주검인 채였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 첨지는 오열하지만, 이제 설렁탕 따위 무슨 소용인가.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하릴없는 한마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음식에 부친 프랑스 문인 브리야사바랭(1755~1826)이 남긴 한마디이다. 먹방 영상이 자주 써먹는 말이기도 하다. 이 한마디의 설득력은 예부터 대단했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1804~1872)는 이 문장을 철학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독일어 문장 “Der Mensch ist, was er ißt”로 번안했다. 이는 다시 영어권으로 번져 영어 격언 “You are what you eat”를 낳았다. 곧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라는 뜻이다. 읽는 눈에도, 소리 내 읽는 입속에서도, 듣는 귓가에도 쟁쟁한 한마디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제대로 살피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먹는 게’ 곧 ‘너 또는 나’라니, 잘 먹으면 잘 산다는 말인가. ‘잘 먹다’는 또 무슨 뜻인가, ‘잘 산다’는 또 무슨 뜻인가 하는 물음까지 따라오면 다시 무슨 답을 준비해야 할까. 문득 떠오르는, 인당수에 몸 던지러 가는 날,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에게 올린 이별의 아침상 장면이 이렇다. “심청이 들어와 눈물로 밥을 지어 아버지께 올리고, 상머리에 마주 앉아 아무쪼록 진지 많이 잡수시게 하느라고 자반도 떼어 입에 넣어 드리고 김쌈도 싸서 수저에 놓으며, ‘진지를 많이 잡수셔요.’ 심 봉사는 철도 모르고, ‘야, 오늘은 반찬이 별로 좋구나. 뉘 집 제사 지냈느냐?’ ”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오랜 친구 같은 먹을거리, 들깨 한여름 잎들깨가 한창이다. 이즈음 깻잎이 뽐내는 풀빛은 붉은 꽃에 못잖고, 그 내음은 고급 분갑에서 뿜는 분내며 값비싼 향수병에서 피어나는 향내에 못잖다. 들깨의 고향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동남아시아, 인도의 고원, 히말라야, 중국 남부, 한반도 등이 다 그 원산지로 거론된다. 아무려나 들깨는 아득한 예부터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다. 고고학 성과를 참고하면 안산·고성의 신석기시대 유적, 논산·부여·아산·천안·김천의 청동기시대 유적 등에서 들깨 및 들깨 재배의 흔적이 확인된다. 우리 조상들은 들깨를 임(荏), 임자(荏子), 수소마(水蘇麻) 등으로 기록해 남겼다. 오늘날 가장 익숙한 이 작물의 이름은 ‘들깨’이다. 들기름, 들깨즙, 들깨가루 등이 또한 한국인의 일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들기름의 한자어는 ‘법유(法油)’이다. 법유에는 ‘법식에 따라 엄격한 품질 관리를 거쳐 나온 기름’이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엄격한 관리가 필요한 요긴한 일상의 사물, 들기름은 예부터 그런 대접을 받았다. 또 다른 한자어로는 ‘소유(蘇油)’가 있다. 이런 어휘는 <월인석보>(1459), <훈몽자회>(1527) 등에서 볼 수 있다.
-
고영의 문헌 속 ‘밥상’ 국수를 찾아서 국수의 계절이다. 익숙하고 친근한 이 사물의 조리 원리에는 재미난 구석이 꽤 있다. 국수의 전제는 곡물의 가루 또는 다양한 식물의 전분에 물을 더해 친 반죽이다. 이 반죽에서 길거나 짧게, 넓거나 좁게, 가늘거나 굵게, 각지거나 원만하게, 별별 형상으로 가락을 내면 일단 식료품으로써 국수가 된다. 순 국숫발만을 일컫는 한국어는 ‘사리’이다. 이렇게 낸 식료품을 주재료로 한 음식이 또한 국수이다. 사람들은 차거나 따끈한 국물에 말아, 짭짤한 양념이며 매콤한 양념장을 얹어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한다. 만두는 국수의 하위분류에 들어간다. 만두란 늘이거나 편 반죽이 전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