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
대중문화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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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등대의 빛이 보일지라도 ‘사상 최악의 해(the worst year ever).’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의 커버스토리다. 2020년을 설명하기에 이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지역, 한 세대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마찬가지리라.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 해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는 걸 업으로 하는 나는 올해 듣고 본 가장 좋았던 음악과 공연을 추리곤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에 U2가 내한했다. 마지막 본 블록버스터급 콘서트다. 2020년은 대규모 공연도 없었고 페스티벌도 모두 취소됐다. BTS부터 이날치까지, 이슈가 되는 음악은 간혹 있었지만 오프라인에는 거의 없었다. 예년 같았으면 무덤덤했을 일들이 소중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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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음악의 정물화 조동희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작사가, 음반 제작자다. 조동진과 조동익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1994년 조규찬 1집에 담긴 ‘조용히 떠나보내’의 가사를 쓰며 음악계에 입문한 그는 김장훈, S.E.S, JK김동욱, 이효리까지 여러 장르 뮤지션들의 목소리에 이야기를 담아냈다. 신윤철과 함께한 원더버드의 두번째 앨범에 보컬리스트로 참여하며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기 조동희가 우리에게 선물한 가장 소중한 음악은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일 것이다. 순식간에 쓰인 이 가사는 장필순의 목소리를 타고 댄스와 인디가 양분하고 있던 당시의 대중음악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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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스트리밍 시대의 라디오 스타 BTS가 빌보드에서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아쉬움이 생긴다. 왜 한국엔 빌보드나 오리콘 차트 같은 공신력 있는 지표가 없을까. 한국의 음악 차트는 지속적으로 망가져왔다. 매주 순위를 집계해 발표하던 음악방송이 TV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음원이 음원 시장을 대처하면서 공신력 있는 차트는 없어졌다. 일개 음원 사이트의 이용자들만을 대상으로 집계하는 차트가 주가 됐다. 특정 팬덤의 조직적 움직임이 차트를 결정하게 됐다. 좋아하는 가수를 실시간 차트 1등으로 만들기 위한 팬덤의 스트리밍 총공세, 이른바 ‘총공’이 차트를 좌지우지했다. 자발적으로 순위를 올려줄 두꺼운 팬덤을 보유하지 않은 뮤지션들에게 차트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대부분의 이용자가 차트를 바탕으로 음악을 듣는 국내 현실에서 차트에 들어가지 않는 음악은 사실상 발매되지 않은 음악과 동격인 현실에서, 팬덤이 강하지 않은 가수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다. 그런 이들을 위해 어둠의 시장이 열렸다. 매크로 조작을 통해 차트 순위를 올려주는 사재기 업자들이 등장했다. ‘스밍 총공 VS 사재기’는 이후 음원 차트의 구도가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차트에 대한 강력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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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아무도 원하지 않는 ‘온라인 공연장’ 정부가 온라인 K팝 공연장을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314억원이 투입된다고 한다. 음악계에서 기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삽질’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2020년은 21세기 음악산업사에서 페스티벌이 하나도 열리지 않은 해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코로나19로 세계의 공연이 멈췄다. 그러니 공연산업의 위기도 동시다발적이다. 미국의 대형 기획사들도 적게는 40%, 많게는 80%에 달하는 인원을 정리해고했다. 음악인들 또한 예정된 공연이 모두 취소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대신 온라인으로 진행된 비대면 공연이 주목받았다. 지난 4월 고군분투하는 의료진을 돕기 위한 기금마련 차원으로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투게더 앳 홈’은 1억3000만달러에 달하는 모금을 이끌어내며 코로나19 시대의 라이브 에이드가 됐다. 유튜브 같은 온라인 플랫폼으로도 대형 이벤트가 가능함을 제시했다. 방탄소년단은 취소된 월드투어 대신 온라인 유료 콘서트인 방방콘을 열었다. 약 100분간 진행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접속한 인원은 75만명 이상이었고 250억원의 티켓 수입을 올렸다. 그외에도 국제적 팬덤을 가진 아이돌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온라인 콘서트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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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혁명은 어디에 유독 추웠던 그 겨울, 그는 광장에서 풍찬노숙을 했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항의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텐트를 치고 ‘거리의 가수’가 됐다. 혹독한 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다. 함께 노숙하는 이들을 위해 수시로 기타를 들고 노래도 했다. 2016년 11월4일 시작된 광장의 겨울, 머잖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말마다 100만명이 모이고 100만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광장의 찬바람 한복판에 선 그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혁명이라고. 감정은 글이 되고 노래가 됐다. 이 노래에 그는 ‘R!’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혁명을 뜻하는 ‘revolution’의 약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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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인류의 멜로디 20세기를 살았던 이들에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삶의 순간 곳곳에 새겨진 나이테와 같다. ‘주말의 명화’에서 <석양의 무법자> 주제가를 들으며 총잡이를 꿈꾸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듣기 위해 심야 FM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동네 레코드 가게로 뛰어가 테이프나 LP로 이 앨범들을 샀을 것이다. <시네마 천국>을 본 후 짝사랑하던 이에게 고백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있었을지라도 그의 음악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넘어, 삶의 사운드트랙이 됐다. 영국 출신 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모리코네의 업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평범한 영화를 필견의 작품으로, 좋은 영화를 예술로, 위대한 영화를 전설적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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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흑인 음악 지금 한국 대중음악에서 흑인 음악 비중은 절대적이다. 힙합은 그 자체로 과거 록이 차지하던 위상, 즉 10대와 20대 문화의 일부를 대변한다. K팝을 말할 때 힙합 비트를 빼놓을 수 없고, 음원 차트에서 강세인 발라드 음악도 솔과 리듬앤드블루스(R&B)를 근간으로 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록이 음악 애호가들의 주류 장르였다. 록이야말로 진정한 음악이었으며 당시 빌보드에서 득세하던 솔과 R&B는 ‘연탄’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던 시절이다. 이렇게 배척받던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던 곳이 이태원의 전설적인 클럽 ‘문나이트’다. 남들이 록을 들을 때 최신 서구 댄스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곳이다. 애초에 내국인이 아니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였기에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이곳 출신인 서태지와아이들이 한국어로도 자연스러운 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한국 음악의 판도를 댄스로 바꿨다. 그들은 전례없던 역동적 춤도 선보였다. 기존의 고정된 카메라로는 잡을 수 없는 그림을 만들었다. 역동적인 화면을 채울 가수들이 필요했다. 가요 기획자들은 문나이트에서 유명한 춤꾼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해서 데뷔시켰다. 현진영, 알이에프, 박진영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치 공식처럼 랩을 쏟아냈고, 서태지와아이들이 3집 ‘컴백홈’에서 갱스터랩을 표방하면서 힙합이 가요계에 안착했다. 비슷한 시기 PC통신 천리안의 흑인 음악 동호회 ‘블렉스’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산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비트에 랩을 입혀 믹스테이프를 만들고, 무선호출기 연결음에 프리스타일로 랩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한국만의 독특한 언더그라운드 힙합 문화를 만들어냈다. 1990년대 중반 인디 문화를 탄생시킨 홍대앞 라이브 클럽 중 ‘마스터플랜’은 정기적으로 힙합 뮤지션들에게 무대를 제공하며 힙합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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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음악에 숨었던 언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생활에 타격을 입으면서 삶을 돌아보게 됐다. 정신승리 같지만 긍정적인 점이다. 더 이상 수동태로서의 삶에는 미래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삶을 재구성해보기로 했다. 일이 들어오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버젓한 어른이라면 창업을 한다거나 시장을 분석하는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어른으로 자라지 못했다.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다. 나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제법 글을 쓰는 편이었고, 운 좋게 글로 밥을 먹은 지 20년 가까이 되니 어떤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한다는 감각은 있지만 그걸 스스로의 이론으로 정립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한창 글쓰기 강의가 성행할 때도 제의에 응할 수 없었다. 사기꾼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런 와중에 글쓰기 수업을 하나 열었다. ‘음악이 글이 된다면’이란 제목으로. 음악 글쓰기 수업이지만, 평론이나 칼럼 쓰기는 아니다. 가르칠 자신도 없거니와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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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이별의 풍경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은 건 20대 초반이다. 그때 서른은 너무 멀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는 더욱 멀었다. 하루하루가 만남으로 가득 찼다. 서른이 되어 다시 들었다. 가사의 다른 내용은 조금 와 닿았지만 삶에 이별은 그다지 없었다. 고작해야 한두 번 연애의 끝이 전부였다. 또 10년이 지났다. 이별의 경험은 그제야 인생에 몇 페이지씩 쓰였다. 친구들을 떠나보냈고 음악 영웅들의 부고 기사를 썼다. 가까운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짧건 길건 마음을 뒀던 공간과의 이별도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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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3.3% 인생 “어이 김형, 이리로 오라니까.” 우형이 나의 옷깃을 당기며 넌지시 말한다. 김형,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다. 평론가님, 작가님, 선생님, 형, 오빠, 김작…. 살면서 참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성이 김씨라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값도 없는 호칭, 김형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는 게 힘들어졌다. 상반기 강연과 행사가 쓰나미처럼 휩쓸려 나갔다. 글값만으로는 생계를 감당하기 곤란하다. 음악이나 미디어 업계에 있는 지인들에게 일감 좀 없냐고 손을 벌려볼까 생각했다. 이내 관뒀다.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공연과 행사가 다 취소돼 있는 직원도 줄여야 할 판이다. 이런저런 대출을 알아봤지만 근로소득세, 사업소득세를 내지 않는 프리랜서를 위한 대출은 없다. 기타소득세 3.3%만 내는 세입자를 위한 나라는 없어 보인다. 어쩌겠는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용직의 삶을 시작했다. 일정이 없는 날이면 수도권에 있는 물류센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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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코로나19 모든 게 취소되고 연기됐다. 한 공연 기획자는 사재를 털어넣어 통 크게 준비했던 공연을 취소했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뒤죽박죽인 그 메시지에서 그가 울분의 낮술에 취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홍보사들은 일제히 언론 시사회가 취소됐다는 메일을 발송했고 매주 듣는 수업도 긴급히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남의 처지를 안타까워할 때가 아니다. 겨우내 준비했던 글쓰기 개강을 미루기로 했다. 여기저기 잡혀 있던 강연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감염의 두려움은 마스크와 세정제로 어떻게든 달랠 수 있지만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는 예방책이 없다. 정부의 긴급 지원 대책도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는 남의 떡에 불과하다.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노는 일상이 위협받는다는 것처럼 두려운 상황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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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음악의 유혹 “우리가 경외롭게 생각하는 게, 처음에 천둥소리나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다들 기절초풍을 할 거예요. (중략) 호랑이 입에서는 천둥이 나오는 소리가 들려요. 그러니 너무 놀라잖아요. 그런 경험과 비슷한 걸 좋은 소리를 들으면 느껴요. ‘우리 상상력이 너무 트랜지스터에 위축되어 있구나. MP3에 갇혀 있구나.’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죠. 그건 경험해봐야 해요. (중략) 우리는 산울림 2집 때 ‘어느 날 피었네’를 녹음하면서 움트는 소리를 만들어 보려 했어요. 그걸 녹음하려고, 그 사운드를 만들려고 수십가지를 해봤죠. 물론 그런 소리는 없겠죠. 하지만 상상에는 있어요. 처음 시작은 유리가 금이 가는 소리로 시작해서 솜털이 돋아나오는 소리, 그래서 꽃이 확 웃는 소리를 재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못했죠.” 소리가 주는 상상력에 대해 김창완이 언젠가 들려줬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