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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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K팝, 그 후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며 가정을 해봤다. 만약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면 어땠을까? 재임 중 발표됐다가 사라진 홍보영상 같은 구리다 못해 어이가 없어지는 콘텐츠를 계속 봐야 했을 것이며 김연아가 성화를 점화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남북 단일팀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고 MBC와 KBS의 중계진도 다른 진용이었으리라. 촛불과 정권교체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됐다. 특히 개·폐회식을 보며 더욱 그랬다. 최순실과 차은택이 관여했다면 ‘국뽕’과 한류 스타 잔치로 도배되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정유라가 말을 타고 나타나 성화를 붙였을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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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이름의 무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커피가 강배전으로 쓴맛만 내는 것은 커피가 식었을 때에조차 그 잡내들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그는 후일 프랜차이즈 커피 광고에 출연했다. 그는 설탕에 대해 “무뇌아적 중독을 일으키는 ‘환상’의 맛”이라고, 고추장에 대해 “맛을 얼버무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썼다. 설탕과 고추장의 조합인 떡볶이 광고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도 “길들여진 맛”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말했던 떡볶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얘기다. 먹방, 쿡방은 여러 스타를 만들어냈다. 요리사와 사업가가 대부분인 가운데 황교익은 직접 음식을 만들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명세를 탄 인물일 것이다.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 전국을 누비며 보고 먹은 식재료에 대한 지식, 유려하고 또렷한 문체로 이미 팬이 적지 않았던 그다. 방송을 타며 날개를 달았다. <수요미식회>에 이어 <알쓸신잡>까지 히트했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 권위자이자 전문가가 됐다. 무거운 이름이 됐다. 이름에 무게가 생기면 신중해지기 마련이다. 가볍게 소비되는 연예인이 아닌, 전문가라면 더욱 그렇다. 직업윤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황교익의 최근 행보는 그래서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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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무쇠달에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경상북도 영주시. 볼 빨간 사춘기의 고향이자 부석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전주 한옥마을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운 무섬마을, 이 마을 앞의 외나무 다리 등이 참 좋다. 시내에서 한참 벗어나 소백산 자락 입구에 무쇠달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초겨울 시골 마을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옷을 벗은 나무들이 즐비했고 많지 않은 주택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간이역인 희방사역이 있다. 곧 폐역을 앞두고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제법 번성했던 역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 자체가 역이 생기고 돈이 모여들면서 생긴, 철교에서 따왔으니 평범한 농촌이 번성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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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베트남 후에에서 만난 ‘청년 문화’ 베트남 다낭을 거쳐 후에에 도착했을 때, 비가 몹시 내렸다. 베트남 어느 도시나 그렇듯 오토바이는 개미떼처럼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도로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걷기 힘든 곳 투성이였다. 날씨까지 안 좋았으니 첫인상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다닐 때, 지역의 명승지는 가지 않는 편이다. 런던에 갔을 때 비교적 오랜 시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빅벤이나 버킹엄 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도쿄, 오사카, 방콕, 뉴욕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유산은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는 게 지론이기 때문이다. 대신 동시대의 문화를 느끼러 가곤 한다. 클럽을 다니고 레코드 스토어를 들른다. 그런데 후에라니? 여행, 하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지인이 후에가 미식의 도시라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먹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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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가정의 탄생 지난겨울의 노량진은 좀 특별했다. 활어 수족관 대신 스티로폼 박스가 주욱 늘어선 도매시장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하는 친구 따라 간 덕에 TV에서나 보던 경매도 직접 봤다. 귀공자처럼 스티로폼 박스 사이를 누비며 필요한 물건들을 찍어 놓은 그와 시장 뒤편 포장마차로 향했다. 겨울바람에 강바람까지 더해진 노량진에서 그 허름한 포장마차는 이글루처럼 느껴졌다. 상인과 경매인, 트럭 운전사 등 새벽 시장에서 밥벌이를 하는 이들이 모여 드는 곳이었다. 어둑한 내부를 연탄 난로가 덥혔다. 라면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가는 이들이 있었고, 손맛 좋은 이모가 프라이팬 하나로 만들어내는 계란말이 등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비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 틈에 비집고 앉아 친구가 가져온 고등어를 난로에 구워 소맥을 말아 마셨다. 팔도에서 모여든 이들이 나누는 새벽의 대화는 어떤 활어보다 싱싱했다. 난방 따위 없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찬물에 손을 대야만 살아가는 이들만의 치열함은 난로보다 뜨거웠다. 난 그때 옆에 있던 일행에게 말했다. “이게 진짜 삶이라는, 그 무엇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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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한스 짐머, 한 시대의 OST 지난 7일 밤 서울 잠실 주경기장. 1990년대의 시네필들이 매일 밤 기다렸을 음악, <트루 로맨스>의 ‘You are so cool’을 두 명의 비브라폰 주자가 연주하기 시작했다. 전설적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시그널 뮤직이었던 이 노래를 실제로 듣다니, 라디오를 사랑하던 때의 옛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회상에 빠져 있을 무렵 한스 짐머가 무대로 올라왔다. 자신의 오랜 팬이라는 멕시코 청년과 그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청년은 무릎을 꿇고 청혼했다. 그 어떤 영화보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영화음악 공연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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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지금, 사라는 즐거울까 스무 살 언저리였다. 친구가 책 한 권을 빌려줬다. 고인이 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였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친구에게 술까지 사줬다. 이미 판매금지가 된 소설이었다. 깊은 밤에 읽었다. 문장을 읽는 맛은 좋았다. 책장이 쑥쑥 넘어갔다. 하지만 실망했다. 수위가 한참 낮았다. 이 정도는 이미 마스터한 지 오래였다. ‘빽판’을 사러 다니던 세운상가에서 구한 일본 ‘야설’ 번역본은 물론이요, 서점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보다 못했다. 책을 반납하며 친구에게 얻어 마신 술을 뱉어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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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아날로그의 반격 스마트폰이 마침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된 2010년 즈음, 나는 결국 CD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아이폰3GS를 처음으로 샀던 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CD플레이어를 서랍에 넣어 두는 것이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항상 음반으로 음악을 들었다. 처음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에 입문했을 때, 선망했던 건 LP였다. 용돈을 모아 테이프를 하나씩 사면서도 언젠가는 나도 방에 전축을 놓고 LP(그때는 ‘판’이라고 불렀다)로 음악을 듣겠다고 꿈꾸곤 했다. 그 꿈이 이뤄진 건 고등학교 입학 후였다. 주말만 되면 청계천 4가와 8가의 음반 도매상을 돌아다니면서 음반들을 사곤 했다. 테이프와 판 사이에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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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홍어, 너 없인 못 살아 맛있다는 건 무엇인가.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맵고, 이 오미(五味)의 강약과 조화일 것이다. 지방의 고소함, 아미노산염의 감칠맛 역시 맛의 요소다. 그 외에도 담백한 맛, 진한 맛 등등…. 대부분이 공감하는 맛들이 있다. 공감대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 맛은 사라진다. 단어의 기의가 기표에 부합하지 않거나 혹은 과도하게 넘쳐났을 때, 우리는 맛없다는 말을 쓴다. 이걸로 충분한가. 물론 그럴 리가. 세상에는 맛있음과 맛없음의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맛이 존재한다. 그 맛은 취향을 탄다. 부합하는 자에게는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샘을 활성화시키고 부합하지 않는 자에게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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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탈서울·탈입시의 대중음악을 위해 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취임 일성, “문화예술 지원하되 간섭 않는 원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말 한마디를 얼마나 기다려왔단 말인가. 이 말은 DJ정부 때 확립되어 참여정부 때까지 이어진 표어였다. 이명박 시절에는 지원하되 간섭도 했다. 박근혜 일당은 지원보다 간섭이 많았다. 아니, 지원은 없고 간섭만 있었다 해도 허무맹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 이후 대중음악 지원 정책은 음반 제작과 신인 발굴, 해외 공연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흘러왔다. 아직 디지털 음원이 음반을 완전히 대체하기 전에는 음반 제작비를 지원했다. 그 후 신인 발굴 및 지원 프로그램이 생겼으며 최근에는 해외 페스티벌 및 쇼케이스에 참가하는 국내 음악가의 경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생겼다. 근 10년 가까이 지속된 흐름이다. 장점도 있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성과도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사이 음악 시장의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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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위로의 풍경 사춘기를 겪은 기억이 거의 없다. 반항아도 아니었고 매사에 순종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 무렵, 음악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서 돌부리 같은 감정들을 음악으로 해소했다. 이유도 없이 분노가 치솟고 우울이 가득한 나이에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 이유도 없이 마음은 잔잔해졌다. 헤비메탈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부수고,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으며 심미안이란 걸 싹틔웠다. 주로 해외 음악을 들었으니 가사보다는 소리 그 자체를 통해 내면의 감정들과 교류했다. 그러니 세상과 부딪힐 일도 없었다. 아니, 부딪혀도 부딪힌 줄 모르고 예민한 시기를 지나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그 시절, 음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존재였다고 세월이 흐르고서야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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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홍준표라는 거울 지난 연말 촛불정국의 하이라이트는 12월29일이었다. 전인권과 신대철이 무대에 올라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노래하고 연주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박근혜 정부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오염된 태극기, 그리고 태극기를 든 일련의 친박세력들이 불렀던 이 노래가 원작자의 아들에 의해 본래 의미를 찾는 순간이었다. 이미 그 전에 촛불집회에 참석, ‘애국가’ 등을 불렀던 전인권은 다시 한번 촛불 광장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랬던 전인권이 곤욕을 치렀다.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뭇매를 맞은 것이다. 실망했다, 배신자다, 공연티켓을 취소하겠다, 심지어 ‘적폐가수’다 등 화살 더미가 꽂혔다. 문재인 후보가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으로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문재인 캠프에서 문화예술정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신대철 또한 “누구를 지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전인권에 대한 일각의 악의적 반응이 멈추는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