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
대중문화평론가
최신기사
-
문화와 삶 격랑의 시대 뒤에서 팝 음악계는 변혁의 격랑 위에 있다.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면서 스포티파이, 애플뮤직의 플레이리스트 담당자는 과거 디제이와 저널리스트의 자리를 차지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인종, 성소수자에 대한 다양성 배려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BTS를 비롯한 K팝 스타들의 승승장구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격변의 시대를 읽기 위해서는 음악성과 상업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중 음악’의 탄생 또한 기술 및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후반 토머스 에디슨이 레코딩 기술을 발명하면서, 음악에는 악보와 공연뿐만 아니라 음반이라는 세계가 주어졌다. 음반은 악보를 읽기 위한 지식, 공연을 보기 위한 시공간적 제한으로부터 청자를 해방시켰다. 무한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언제 어디서나 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스타가 탄생할 수 있던 배경이었다.
-
문화와 삶 오디오 요지경 2년이 다 되어가는 코로나19 시대. 음악계는 말 그대로 위축되고 쪼그라들었다. 어둠과 빛은 공존한다. 작년 가을 무렵, 한 고급 오디오 취급 업체 사장을 만났다. “어려우시죠?”라는 질문에 그는 멈칫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남들한테 미안해서 말은 못하는데 이쪽 시장은 엄청 호황이에요.”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많은 활동들이 중단됐다. 자영업자들이야 고난의 행군을 겪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금융자산의 가치는 폭등했다. 부동산, 주식, 가상통화… 가리지 않고 그랬다. 부동산으로 얼마를 벌었다더라, 비트코인으로 돈이 복사되는 체험을 했다더라… 이런 이야기들이 쉽게 들려왔다. 그런데 거리 두기로 인해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 대폭 줄어들었다. 번 돈이 많아진 사람, 원래 많이 벌던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 그 돈의 일부가 고급 오디오 시장으로 흘러든 모양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디오 시장이란 게 그리 크지 않아서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체감은 할 수 있었다. 중고가 오디오를 주로 들여놓던 편집숍이 있다. 올봄 언젠가 그곳을 방문했다. 예전엔 거의 없던 하이엔드급 오디오가 즐비했다. 몇천만원대 세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최근 강남 못지않은 고급 주거지로 떠오르는 이 지역에 이사 오는 사람들이 몇천만원짜리 세트를 다이소에서 물건 사듯 구입한단다. 조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
문화와 삶 그래도 지금, 음악은 곁에 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접종률이 올라가면서 희망을 가졌다. 한순간에 사라지다시피 한 공연들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다시 멀어지는 무지개처럼 공연은 왔다가 다시 멀어져갔다. 올가을도 많은 페스티벌과 콘서트가 취소되고 연기됐다. 그래도 숨통이 꽁꽁 틀어막힌 건 아니다. 정식 공연장으로 등록된 시설에서 열리는 행사는 다행히 가끔 보인다. 거리 두기 때문에 수익이 보장되지 않고, 따라서 적극적으로 개최되지 않을 뿐 공연에 대한 욕망과 의지는 이어지는 것이다. 오는 22, 23일 열리는 <아카이브 케이 온-우리, 지금 그 노래>라는 공연이 있다. 동아기획과 학전소극장과 관련된 뮤지션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노래한다.
-
문화와 삶 중국 공산당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지난 8월31일은 걸그룹 아이즈원의 멤버였던 장원영의 생일이었다. 이미 해체한 팀인 데다가, 솔로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장원영의 팬덤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서울 지하철역을 장원영으로 도배했다. 장원영 팬클럽이 산 광고판만 1200개 이상으로 추산되니, 얼마나 큰 비용이 들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 돈의 대부분은 중국 팬클럽에서 나왔다. 중국 팬클럽은 몇 달 전부터 웨이보 공식 계정을 중심으로 모금 행사를 진행, 우리 돈으로 약 3억6000만원을 모았다. 잠깐, 여기서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아이즈원과 장원영은 중국에서 정식으로 데뷔한 적이 없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중국에 방영된 적이 없고, 아이즈원과 장원영 또한 한국과 일본에서만 활동했다. 알다시피 중국에서는 유튜브를 비롯한 서구 SNS를 쓸 수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팬으로부터 자금을 모으고 행동하게 했다. K팝 산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자, 중국 내 K팝 팬덤의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문화와 삶 K팝과 엘리트 체육 나는 <슬기로운 음악대백과>라는 유튜브 콘텐츠를 진행한다. 레드벨벳의 슬기와 MC를 맡아 음악인들을 심층 인터뷰하는 콘텐츠다. 얼마 전 이날치가 게스트로 나왔다. 이 밴드의 네 소리꾼은 중학교, 늦어도 고등학교 때 국악 엘리트 코스에 들어섰다. 보통 사람이면 장래 희망은커녕 가고 싶은 학과도 막연할 때 인생을 거는 선택을 했다. 옆에 있는 슬기 또한 10대 초중반부터 SM에서 연습생으로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다. 근대 교육은 예술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어릴 때부터 명인의 레슨을 받고, 관련 학교에 진학한다. 유수의 클래식 콩쿠르에서 수상하는 청년들이 대부분 그런 코스를 밟았다. 현대 대중 예술에는 그런 ‘영재 코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에 관련 학과가 있다는 점은 같지만 10대에는 모두 취미의 영역에 머문다. 친구들끼리 밴드를 결성해서 동네에서 활동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었고, 지금은 유튜브에 자신의 연주 및 노래 영상을 올리며 SNS 스타를 기대한다. 20세기 초반 팝이 탄생한 이후, 큰 흐름에서 달라진 적이 없다. 예외가 있다면 가족 단위에서 이뤄진 훈육일 것이다. 마이클 잭슨, 재닛 잭슨을 배출한 잭슨 파이브가 대표적이다. 한국도 같았다. 다운타운에서 노래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발탁, 정식으로 데뷔하던 시대가 있었다. 조용필, 김현식 같은 가수들이 그렇게 스타가 됐다. 대중음악 산업은 스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지만 이 시스템 바깥 단계에서는 개인의 재능, 또는 가족 단위의 훈육이 성장의 연료였다.
-
문화와 삶 모두에 의한 검열 “요즘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느 예능 작가가 모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제안한 성인 예능을 거절했다며 한 말이다. 방송국도 아니고 OTT다. 심의에서도 자유롭고 제작사의 압력도 없다. 게다가 타깃이 성인층이니 지상파나 케이블의 예능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다. 제의받은 페이도 꽤 짭짤했다. 그런데 왜? 짐작할 수 있었다. 시청자, 또는 소비자의 압력이 너무 크다. 관에 의한 검열은 대부분 반기를 든다. 독재 정권 시절의 검열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를 회피해서 메시지를 숨겨놓는 경우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선희의 ‘한바탕 웃음으로’를 비롯해 적지 않은 인기곡들이 5·18에 대한 노래였다. 관에 의한 검열은 공연윤리위원회 폐지와 함께 1996년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청소년유해매체물, 청소년유해약물, 청소년유해물건, 청소년유해업소 등의 심의 및 결정 등에 관한 사항’을 주요 업무로 내걸었다. 공연윤리위원회 못지않은 촌극이 벌어졌다. 동방신기의 ‘미로틱’이 성행위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유해곡 판정을 받았다. 그뿐인가. 가사에 ‘술’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유해 판정을 받는 노래들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10㎝의 ‘그게 아니고’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감기약’이 다른 약물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유해 판정을 받기도 했다. 당시 나는 어느 방송국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 해당 위원회의 심의위원들과 토론을 했었다. 거대한 벽이었다. 시청자 게시판에서도 그들의 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
문화와 삶 코언의 풍경 얼마 전 울릉도에 다녀왔다. 이장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와 경상북도, 울릉군이 함께 만든 울릉천국 문화센터에서 대화를 나눴다. 1970년대 포크계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가 막히게 좋은 날씨 아래, 기가 막히게 좋은 풍경을 옆에 두고, 맛있는 와인과 안주를 나누며 듣는 이야기가 생생했다. 의외였던 건 레너드 코언의 존재였다. 흔히 그 시절 한국 포크계에 영향을 준 팝 뮤지션으로 밥 딜런, 피터 폴 앤 메리, 존 바에즈 같은 이들이 거론되긴 하지만 레너드 코언이 인용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당시 여러 인기 뮤지션들의 노래가 한국어로 번안되어 남아 있지만, 레너드 코언의 곡은 그랬던 적이 없기 때문일 것 같다. 이장희는 특히 조동진에게 레너드 코언이 끼친 영향을 말했다. 코언의 데뷔곡이었던 ‘수잔’에 경이된 조동진이 끝까지 그 스타일을 고수했노라 말했다. 일평생 시와 음악을 한 몸처럼 여겼던 조동진의 음악을 떠올리며 속으로 무릎을 쳤다.
-
문화와 삶 욕망 불변의 법칙 더 이상 책과 음반을 쌓아둘 공간이 없어 방을 대폭 구조조정했다.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구석구석 쌓여있는 온갖 짐들을 다 치웠다. 책상 서랍을 뒤지다 한 무더기의 녹음 테이프를 발견했다. 일련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Metal N’ Pop. 흠과 먼지 투성이인 케이스, 빛 바랜 잉크로 쓰인 글씨들. 그런 테이프가 한 100개쯤 서랍장 속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라디오와 함께 보내던 10대 때 기록이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어머니는 선물을 해주셨다. 삼성 마이마이 카세트. 음악의 바다에 빠지기 전이었던지라, 변변한 테이프 하나 없었다. 조지 마이클의 ‘Faith’와 ‘Nothing Gonna Change My Love For You’가 담겨있는 글렌 메데이로스의 앨범이 내 라이브러리의 전부였다. 따라서 들을 건 방송뿐이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별이 빛나는 밤에> <0시의 데이트> 같은 프로그램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엽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DJ의 침 쩝쩝거리는 소리, 요즘으로 치면 그만한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 없었다. 그런게 왜 그리 감미로웠는지 모른다.
-
문화와 삶 벚나무 아래서 이와이 슌지가 오랜만에 신작으로 돌아왔다. <러브 레터>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라스트 레터>. <러브 레터>가 이와이 슌지의 겨울이라면 봄은 <4월 이야기>다. 나는 이 영화를 봄이 되면 꺼내 보곤 했었다. 오프닝부터 휘날리는 벚꽃을 보며 여행이 곁에 있던 시절의 일본을 생각하곤 했다. 그 언젠가 처음 가본 요코하마의 흐드러지는 벚꽃을 떠올리곤 했다. 그 시절엔 봄마다 벚꽃을 보는 문화가 우리에게 널리 퍼지지 않았으니, 상춘객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골판지집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도 벚꽃나무 아래서 일요일의 봄을 즐기고 있었다. 계절과 자연이 주는 여유란, 낭만이란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 생각했다. 항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야무졌다. 하얀 꽃잎은 별처럼 흩날렸다. 짧은 며칠 동안의 일정을 취소하고 나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한참을 벚꽃과 상춘객의 풍경화를 즐겼던 기억으로 <4월 이야기>의 오프닝을 즐겼다. 사람과 풍경이 어우러지는 여행의 모습이었다.
-
문화와 삶 샤이니의 신대륙 샤이니는 한국 아이돌의 역사에서 기록할 만한 존재다. 2008년 데뷔곡 ‘누난 너무 예뻐’는 10대와 20대 중심의 아이돌 시장을 30대 이상으로 확장하겠다는 야심처럼 보였다. 그 야심은 성공했다. 2009년 ‘로미오’에서는 기존의 아이돌에겐 시도되지 않았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키치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이게 멋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기괴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던 ‘링 딩 동’, K팝의 이미지가 된 칼군무의 교과서가 된 ‘셜록’ 등 이후의 활동에서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했다. 번번이 성공했다.
-
문화와 삶 대리효도 지난 추석 때 처가에 갔다가 급체를 하고 말았다. 명절 음식을 푸짐하게 먹어서? 나의 소화능력은 평균 이상이다. 음식이 잘못 되어서? 오, 그럴 리가. 이유는 TV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트로트 때문이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가수들이 비슷비슷한 창법으로 비슷비슷한 노래를 부른다. 집이었다면 바로 채널을 돌렸겠지만 나는 처가에서 리모컨을 잡는 사위가 아니다. 연신 잔을 비우며 술의 힘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집을 뛰쳐나가 한 시간 정도 쌀쌀한 밤거리를 걸은 후에야 속을 달랠 수 있었다.
-
문화와 삶 장례 없는 이별 코로나19는 이별의 풍경도 바꿨다. 장례식장은 한산해졌다. 상주가 장례 일정에 더하여 계좌번호를 함께 알린다. 청첩장에 계좌번호를 적어도 눈살 찌푸리던 사람들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낯설다. 그나마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코로나19로 사망하면 장례조차 치를 수 없다. 사망 직후 화장터로 간다.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염습도 할 수 없다.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볼 기회조차 없다. 가족들마저 자가격리 중이라면 이별의 모든 과정은 생략될 것이다. 그 감정을 나는 차마 헤아릴 수 없다. 어디 사람과 사람의 이별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