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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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다시 소환된 ‘잔반의 기억’ 고교 시절 무시무시한 눈빛의 선배가 있었다. 차마 곁에 다가서기 힘들었다. 학교에 폭력서클이 여럿 있었는데, 그 선배는 건드리지 못했다. “삼청교육대 출신이야, 저 선배.” 그랬다. 삼청교육대. 살아서, 몸 성히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는 말이 있었던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선배가 그곳에 끌려갔을 때가 고작 고교 1년생이었다. 그저 동네에서, 학교에서 껄렁하다고 잡혀갔다고 했다. 경찰서마다 학교마다 삼청교육대에 보낼 인원을 찍어 할당을 때렸다는 말도 있었다. 전두환 군부가 출범하고 사회악 일소니, 정의사회 구현이니 하여 내놓은 민심수습책이 바로 삼청교육대였다. 영장도 없이 사람을 잡아 군부대에 처넣고 ‘인간 개조’를 시킨다는 죽음의 명령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부의 정치깡패 처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다. 당시 텔레비전과 영화관의 대한뉴스에선 목봉체조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알았다, 목봉체조 좀 하고, 피티 체조로 기합을 주는 것이려니 했다. 그들 말대로 인간쓰레기를 사람 만들어 내보내주는 걸로 아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었다. 살아서 출소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지만 흉포한 소문이 돌았다. 무자비한 구타와 살상행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부대 조교로 근무했던 이들도 증언에 참여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명쾌하지 않았고, 배상도 제대로 안됐다. 최초 기안자, 결재자,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죗값을 치른 것이지” “깡패놈들은 좀 맞아도 싸”.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소위 건달과 깡패가 잡혀간 건 사실이다. 전과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영장도, 재판도 없이 강제구금될 이유는 없었다. ‘불량한’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통금을 어겼다고, 그냥 동네에서 사이 안 좋은 사람이 무고를 해서, 술 마시고 지나가다 ‘할당’에 맞춰 트럭에 태워진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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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청진옥의 ‘국잽이’ 종로의 유명한 해장국집 청진옥에 갔더니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머릿수건을 쓰고 뚝배기에 해장국을 푸는 젊은 여인의 사진이다. ‘국잽이’라고 부르는 업무를 오랜 시간 해냈던 직원이다. 그렇게 국잽이로서 정년 넘게 일하고 은퇴했다. 다들 셰프며 파티시에며 소믈리에인 지금 요리판에서는 생소한 직책이다. ‘~잽이’는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를 말한다. 왕년의 우리 직업판에서는 ‘꾼’이거나 ‘잽이’가 많았다. 근사한 벼슬을 호칭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손으로 평생 무언가를 주물러서 업으로 삼던 낮은 신분의 이들이었다. 요즘도 우리는 무얼 잘하는 이를 두고 꾼이니, 잽이니 한다. 직업의 세계에서는 거의 쓰지 않고, 이제는 입말로만 남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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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공족 이른바 카공족이란 말이 회자된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본디 카페는 토론의 장소로 유럽에서 성장했다. 유럽의 민주주의와 철학의 발전은 카페의 몫이 컸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건 그런 의미에서는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종종 심각한 논쟁을 유발한다. 카페의 수익 문제, 손님 윤리(?) 문제가 거론된다. 카페가 공부뿐 아니라 회의와 작업실의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공유 사무실이 유행하는 것처럼, 최근에는 혼자 일하고 움직이는 프리랜서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의 전통적인 카테고리가 무너졌다는 의미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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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김용균이라는 빛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는 작은 공장이 많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남녀들이 직공으로 일을 다녔다. 아마도 12시간 맞교대 일을 마친 그들이 삼양라면이나 롯데소고기라면 덕용포장을 사들고 퇴근하는 걸, 나는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보곤 했다. 언젠가 엄마가 “장도 못 담가 먹을 텐데 어떻게 간은 맞추는지 몰라”하고 혼잣말처럼 하시는 걸 들었다. 가난해도 집마다 장독이 있던 시절, 자취하는 노동자 청년들이 뭘로 간을 냈을까. 샘표에 별표, 닭표니 하는 서울의 공장 제품을 썼을까. 어쩌면 설이나 추석에 집에 가서 장 같은 건 가져왔을 것이다. 상하는 것도 아니고, 한번 가져오면 오래 먹을 수 있었을 테니. 그런 명절 무렵에는 동네 전봇대마다 광고 전단이 붙었다. 대절 버스 광고였다. 기억하건대, 그 버스들의 행선지는 대개 호남이었다. 임실-순창-진안-전주…. 곡성-화순-광주-해남-목포…. 비슷한 지역을 묶어서 버스는 떠났다. 선글라스에 흰 장갑을 낀 기사님이 모는 버스였다. 미어터지는 고속도로나 고만고만한 국도에 시달리며 보통 10시간이 넘는 고행길을 갔으리라. 그래도 그 형들의 표정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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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노포의 조리기구 예전에 오래된 한 식당에 들른 적이 있다. 주방을 기웃거리는데, 칼이 좀 특이했다. 주방장이 비슷한 모양의 칼 두 자루를 번갈아 쓰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크기가 달랐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모양은 비슷하지만 아주 작았다. “칼이 비슷한 식도인데 크기가 왜 그리 다릅니까. 용도가 다른 건가요?” 주방장이 멋쩍게 웃더니 대답했다. “아, 이거요? 같은 칼인데 작은 칼은 워낙 오래 쓰다 보니 그리되었다오. 한 사십년 썼나.” 갈아서 쓰고 또 갈아 쓰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커다란 식도였던 칼이 닳고 닳아서 과도처럼 작아져버렸다. 그는 그것이 안쓰러운지 버리지 못하고 다른 용도를 찾아서 쓸모를 주었다. 무려 사십년 된 칼이니, 무생물이긴 해도 무슨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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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단것 권하는 사회 어렸을 때 박찬호 야구를 보는데 흑인 선수들이 많이 등장했다. 미국 국적 흑인이야 이미 우리가 어느 정도 그 역사를 아는 부분이다. 소설 <엉클톰스캐빈>이 그랬다. 메이저리그에 미국인이 아닌 중남미 국적의 흑인 선수가 많아서 좀 놀랐다. 아니, 왜 저들은 검은 피부일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거나 건너뛰었던 고통의 역사가 거기 있었다. 약탈적인 설탕 산업이 중남미 흑인들의 먼 조상을 잉태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설탕이 얼마나 돈이 되고 귀한 산업이었으면 유럽 여러 나라가 혈안이 되어 노예사냥과 생산지 개척에 나섰을까. 아시아라고 다르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설탕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애를 썼다. 오키나와는 본토 일본인들이 귀중한 설탕 공급지로 써먹었다. 강제 공출과 착취의 역사가 얼룩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참혹한 옥쇄작전에 민간인을 동원하고 이후 미군부대 주둔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태도도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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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옛날 냉면집에 갔다 옛날 냉면집에는 종이로 술을 만들어 매달았다고 하는데, 그 종이술이 국숫발을 의미한다고 했다. 직관적 광고물로 그만한 게 없지 싶다. 내가 기억하는 냉면집은 빨간색 바탕색에 흰 글씨로 ‘냉면 개시’라고 써 붙였다. 임시로 판다는 뜻이었다. 찌개 팔고 탕 끓이는 집은 여름에 손님이 줄어드는 법이라 한철 메뉴로 냉면을 추가했던 것이다. 그다지 품질 좋은 냉면이었을 리가 없다. 메밀을 쓴 냉면이라면 기계도 있어야 하고, 그걸 솜씨 있게 다루는 발대꾼이며 기술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만든 면을 풀어서 그럭저럭 만든 육수에 얼음 깨어 넣고 제공했다. 이 계절에 흔한 수박이며 토마토가 올라가기도 했다. 서울식 임시 계절 냉면으로 뇌리에 남아 있는데, 뜻밖에도 그런 냉면을 서울 밖의 냉면집에서 만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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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단것 당기는 시간들 당 권하는 사회. 한때 매운 음식 권하는 사회에서 이제는 당이다. 모두 스트레스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연구자들은 스트레스가 매운 음식과 당을 요구한다는 사회적, 의학적 연구 결과를 내놓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느낀다. 비록 설사를 할지언정 미친 듯이 매운 닭발을 뜯고 떡볶이를 흡입할 때가 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다. 속은 쓰리지만 머리꼭지가 벗겨질 것 같은 쾌감이 몰려온다. 문제는 ‘혈중 매운 농도’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매운맛의 마력이 뚝뚝 추락하고 나면 허탈해진다. 그래도 땀 한번 흘리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힘을 얻는다. 매운 것도 먹었으니, 자 이제 한번 또 해보자고, 이러면서. 우리는 늘 그렇게 막막한 세상에 부딪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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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먹는 일의 계급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라면이 화제다. 이른바 ‘투뿔등심 짜파구리’다. 두어 해 전에 유행했던 음식이다. 라면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이 아닌, 일종의 번외의 ‘오덕’ 레시피였다. 좀 뜬금없이 등장하는 음식 같기도 한데 감독은 ‘부자들은 같은 걸 먹어도 다르게 해석한다’는 여지를 부여했던 것 같다. 짜파구리 같은 인스턴트 라면에 어울리지 않게 ‘투뿔등심’을 얹어 먹는 설정을 만든 것을 보면. 그 라면이 그다지 맛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빈대떡에 캐비어 얹은 것 같다. 서로 별 상성이 없다. 그것조차 감독의 의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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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부실해진 중국집 짬뽕 언젠가부터 중국집 짬뽕이 대체로 부실해졌다. 값은 거의 못 올리는데 해물 같은 재료비는 치솟았기 때문이다. 오징어 빼고 변변한 해물이 안 들어간 지 오래다. 그나마 그 오징어조차 질이 좋지 않다. 어획이 좋지 않아서다. 한때 오징어가 너무 많이 잡혀서 어부들이 출어를 포기하던 90년대가 있었다. 잡아봐야 돈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연근해 어황이 나빠져도 짬뽕은 별문제가 없었다. 더 먼바다로 나가서 잡아올 수 있었다. 선동이라고 부르는, 큰 배에서 잡아서 급속 냉동을 하면 품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우리가 먹어왔던 짬뽕의 오징어는 대부분 이런 물건이었다. 솜씨 좋은 중화요리사가 팬으로 볶고 끓여내는 짬뽕 기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간단해 보이는 요리지만, 손에 붙인 기술의 총화가 만드는 게 바로 짬뽕이었다. 감칠맛, 불에 지진 채소의 향, 뜨거운 육수가 속을 덥혀내는 느낌. 요리 기술자가 만들어내는 음식이다. 한데 우리가 그 ‘최종의 결과물’을 맛보려면 산업의 힘이 필요하다. 장인의 기술, 영혼의 공력 같은 수식어는 어쩌면 정서적 측면일 뿐이다. 언젠가 저 먼바다의 ‘선동’ 오징어가 잔뜩 저장되어 있을 냉동창고 단지를 지날 때가 있었다. 대한민국 냉동수산물의 상당량이 그런 단지에서 언 채로 보관되었다가 전국 각지로 팔려나간다. 전기, 산업 에너지, 이를테면 플랜트라고 불러도 될, 보통 인간의 경험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그런 거대한 시설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배경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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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차마 그리운 비빔국수 1947년 여름, 몽양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에 맞았다. 자택에서 기계면으로 만든 비빔국수를 점심으로 들고난 후였다. 이듬해인 1948년, 어느 신문 기사는 아마도 몽양의 식탁에 올랐을 당시의 유행 음식인 기계국수를 언급하고 있다.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배급된 미국제 건면 조리방법은 냉수를 부어가며 속까지 익히고 삶은 후 찬물에 5분간 담가두었다가 장국이나 비빔국수를 해먹으면 좋다.” 일제강점기에 제분시설이 속속 한반도에 세워졌고, 몽양의 그 ‘기계면’도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잔치국수가 바로 기계면의 일종이다. 제면기로 눌러 뽑는 국수가 흔했던 우리 전통 국수 문화에 이종(異種)이 이식된 셈이다. 가게에서 사들여 삶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기계면은 충격적이었으리라. 해방과 전쟁, 휴전으로 이어지는 동안 미국 원조로 받은 밀이 일제가 두고 간 적산(敵産) 제분공장에서 도정되었다. 동네 곳곳에는 제면기계를 갖춘 가내수공업 국수공장이 하나둘 생겼다. 원래 밀가루 국수는 오랫동안 양반과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옛 국수 조리법을 찾아보면 대개 소고기와 계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밀가루 원조는 국수 문화에 혁명적인 자극을 주었다. 국수는 고급 음식의 자리에서 내려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간이 음식이 되었다. 물론 비싼 고기 장국을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값싼 멸치장국이 있었으니까. 비빔국수도 마찬가지였다. 쇠고기 고명을 쓰는 전통적인 비빔국수 대신 고추장과 간장으로 비벼 먹는 대중음식이 되었다. 사카린과 일본식 간장에 비빈 1950, 60년대식 비빔국수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있을 정도다. 한국 음식사에서 밀가루 원조는 가장 파괴력 강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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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새벽 음식 배송 시대 새벽 음식 배송 시장에 전쟁이 붙었다. 몇몇 선발 업체들의 성공에 고무된 기존 인터넷 오픈마켓들까지 뛰어들었다. ‘고무된’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울며 겨자 먹기인지도 모른다. 안 쫓아가면 큰일 날 것 같아, 사업 참여나 일단 해보는 수준이다. 선발 업체들도 실제로 이익을 내는 것 같진 않은데,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고도 하겠다. 이런 새벽배송 음식의 상당수가 간편식(HMR)이다. 셰프가 만드는 음식이 새벽에 당신 식탁에 오른다는 슬로건을 꺼내든 업체도 많다. 시중의 유명 식당 음식도 물론이다. 배달이 불가능한 음식이 거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