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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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영업투혼’ 내모는 세상 여러 가지 좋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19 말이다. 그렇다. 심지어 프로야구도 열린단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정상 개막일을 이미 훌쩍 넘겼고 올해 리그가 열릴지도 알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경기를 했던 메이저리그인데. 우리는 국민과 정부가 다들 잘해내고 있는 까닭에 참화를 피했다. 사람들은 포스트 코로나를 얘기하고 있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는 죽음 이후의 안녕을 기원하는 분위기가 발화되는 대사건이었다. 전염병은 사회를 바꾼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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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다시는 안 봤으면 했던 장면들 돌이켜보면,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1997~1998년, IMF 외환위기 사태였다. 당시 식당업의 고통을 매스컴에서 자주 다뤘다. 경기 하락을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게 식당 동네이니까. 그때 즐겨 다루던 게 중고 주방기구 도매상 인터뷰였다. 주방기구들이 ‘근으로 달아 팔리는’ 현장이 뉴스에 중계되었다. 그걸 보면서 눈물짓는 식당업주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은 그 후 어떻게 살아갔을까. 재기했을까. 아니면…. 당시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모양이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같은 업자들은 눈물겨운 이름이다. ‘반값’. 반값 삼겹살, 반값 햄버거, 반값 치킨…. 뭐라도 해서 살아남자는 몸부림이다. 통계는 모르겠지만, 시중의 식당들은 대략 절반 밑으로 매출이 줄어든 듯하다. 원래 상인들이야 늘 장사 안된다고 아우성이게 마련이나, 지금은 절박한 상황이 맞다. 친구에게서 이런 문자가 어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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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요즘 부모 노릇 요즘은 제대로 아비 노릇을 하는 것 같다. 왕년의 아비들은 ‘실물’을 손에 들고 들어옴으로써 가장다웠다. 통닭이든, 귤이나 군고구마 봉지든. 심지어 월급도 누렇고 큰 봉투에 담아 가지고 왔다. 보너스를 받는 달에 봉투는 두 배쯤 두꺼웠다. 더 옛날로 가자면, 사냥감을 가지고 가족이 기다리는 동굴로 돌아오던 원시인을 상상해도 되겠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모바일로 들어가면서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아버지가 묻혀온 바깥 공기 냄새와 함께 뒤섞이던 통닭의 고소한 기름 냄새도, 이제는 ‘띵동’ 하는 초인종 소리와 결합되어서 청각으로만 남게 된 듯하다. 아버지는 신용카드를 내미는 일조차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사전결제 기능이 있으니까. 버튼 하나를 꾹 누름으로써 그 수고가 해결되었다. 대신 노릇을 하게 된 건 그놈의 마스크 때문이다. 마스크를 구해오마! 이 아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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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반지하에 사람이 산다 전국에 반지하 셋방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 역사가 오래된 건 아니다. 1970년대에 도시는 팽창했다. 낡은 단층 슬래브 집들이 다세대라는 묘한 이름의 주택으로 바뀌었다. 의미로 보자면 아파트도, 호화빌라도 다세대이지만 다세대는 독립적으로 슬픈 이름 다세대다. “다세대 사는 애들과 놀지 말라”는 엄마들이 있던, 가난과 멸시의 상징. 봉준호가 주목한 건 바로 이 멸시가 아니었을까. 더 많은 ‘가구수’를 공급해야 했던 당국과 건폐율을 더 받아서 차익을 바라던 건물주의 이익이 만들어낸 다세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층이라도 세대를 더 만들면 얼마나 이익이 늘겠는가. 주차장이나 창고로 써야 할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 완전히 지하가 아니라고 해서, 그나마 햇빛이 일정 시간 들어온다는 걸 위안 삼아 반지하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절묘한 명명과 구성은 세계 건축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일이다. 완전한 지하도, 지상도 아닌 반만 지하. 삶도 죽음도 아닌 어정쩡한 무간도적 공간을 봉준호는 주시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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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굴, 지금이 진짜 꿀맛 독자들께 살짝 팁을 드리자면 지금이 진짜 굴 철이다. 굴은 지금부터 맛있다. 찬바람 불면 맛있다 했으니 11월이 아니었어? 아니다. 11월의 바람은 차지만 바닷물은 미지근하다. 개인적으로 1월과 2월의 굴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굴은 대개 1년생으로 출하한다. 겨울을 처음으로 넘기게 된다. 앗, 추워. 겨울을 맛본 굴은 영양을 더 몸 안에 응축한다. 그러면서 11월보다는 더 성숙한다. 1월의 굴은 종종 더 진한 빛깔을 띤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이다. 1월과 2월의 굴은 농익어서 향도 맛도 진하다. 굴을 잔뜩 사들여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젓 담그는 일이다. 천일염 넉넉하게 쳐서 짜게 담그면 경상도 내륙식 굴젓(구젓)이 된다. 굴이 삭도록 두었다가 입맛 없는 여름에 북어포, 고춧가루에 버무려 밥반찬 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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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스티로폼 찌개 예전 시장에서는 스티로폼 사용량이 적었다. 수산시장에서는 나무 상자가 많이 쓰였고, 채소시장에는 종이상자나 나무상자가 주력이었다. 이제는 스티로폼이 많이 쓰인다. 냉장, 냉동에 스티로폼만큼 싸고 좋은 재질이 없기 때문이다. 요새는 새벽배송이라고 하여 저마다 아침 일찍 음식이며 재료를 배달해대는데, 포장을 끌러보면 기가 탁 막힌다. 내용물보다 훨씬 큰 스티로폼 상자에 재활용 수거도 안되는 보냉재, 어떤 경우는 내용물의 흔들림을 방지하려는지 작은 스티로폼 조각이 추가로 들어 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있으나 그 후과는 어쩌려는지 모르겠다. 식당을 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운 건 포장재 처리다. 수산물, 육류가 들어온 스티로폼 상자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재활용으로 버리고 있으나 실제로 재활용이 잘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내용물의 찌꺼기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지 않아서 재활용이 어렵다. 재활용할 충분한 인프라도 없다. 스티로폼은 참으로 편리하고 기능이 뛰어나지만 곧 거대한 재앙이 되어 인간을 공격할 게 분명하다. 배달되어 온 스티로폼은 대개 구석이 닳아 있다. 배달과정에서 마모되고 상처입는다. 그 가루(작은 알갱이)가 많이 떨어진다. 하수구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다. 수산시장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스티로폼 알갱이가 하수구로 흘러가는지. 식당에서는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서 별도로 처리하게 되어 있는데, 이때 개수대에 모인 찌꺼기도 같이 버린다. 그 안에는 생선 등을 꺼낼 때 묻어온 스티로폼 알갱이도 들어 있다. 그걸 일일이 골라낸다고?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작업에는 모두 비용이 든다. 직원이 그걸 골라내는 일 자체가 비용이다. 겨우 노동비용을 감당하고 있는 식당들에 이런 작업이 우선시될 리 없다. 음식물 찌꺼기의 상당량은 매립되지만, 어느 정도는 잔반으로 처리돼 가축 먹이 등으로 재활용된다. 바닷가에서 구출된 바다거북의 배에서 다량의 스티로폼 조각이 발견되었느니, 물고기 배를 갈라보면 그렇다느니 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음식물 찌꺼기의 사료 공급으로 스티로폼을 비롯한 미세플라스틱이 얼마나 축적되는지 연구 결과도 없을 것이다. 당장의 노동에 지친 요리사들에게 그걸 분류하고 처리하라고 하는 건 현실적이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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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무서운 식탁 위의 월드컵 25. 무슨 숫자일까. 놀랍게도 한국의 식량자급률이다. 세계 꼴찌다. 자급률 100%가 넘는 쌀을 포함해도 그렇다고 한다. 그나마 쌀 자급률이 높은 것도 밀과 같은 수입곡물로 만든 빵과 국수, 과자류 때문에 밥을 덜 먹는 까닭이다. 식당에 가보면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는데 올림픽을 하는 것 같다. 각종 재료의 수입국가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식당에서 수입품을 많이 쓰는 것은 실제 그런 면도 있고, 다른 면으로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당국의 원산지 표기 대상 의무가 점점 넓어지면서 식당에선 써 붙여야 할 품목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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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풍로와 라면 국도변을 달리다보면 우리 식당의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보양식이거나 복고풍이거나. 몸에 좋다는 온갖 설명이 가득하다. 그게 어떤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식당과 메뉴를 정할 때 마음이 가는 곳을 정하게 마련인데, 몸에 좋다는 건 아주 좋은 소재가 되는 거다. 여기에다 복고풍은 여전히 손님들의 향수를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란 뜻이다. 가마솥으로 스물 네 시간 고아 냅니다, 옛날식 할머니 된장 맛! 직접 장작을 때어 밥을 지어드립니다! 검불 넣고 장작 때서 밥 지어보면 이게 할 일이 아니란 걸 5분 안에 알게 된다. 연기는 맵지, 불은 잘 안 일어나지, 시간은 흐르지. 진땀을 흘렸을 옛 할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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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택시에서 듣는 맛 택시를 타고 가다보면 노인 기사가 많다. ‘노인’이 몇 살부터 부를 수 있는 호칭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삼촌뻘이다. 대략 해방 후 6·25 이전 세대들. 그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정을 나는 잘 모른다. 요즘 어떤 모바일 차량 공유 서비스의 광고 문구에 ‘손님에게 말 걸지 않습니다’가 있다. 기사가 이런저런 푸념을 하고 말 거는 게 불편한 손님이 많다는 뜻이다. 나도 그리 편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때로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귀 기울이곤 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도서관급이라고도 하고, 시대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뒷골목 민초들의 생애사는 직접 듣는 것 말고는 알 수 없다. 그런 얘기를 택시기사들에게 듣는 맛이 있다. 그중에서도 거창하지만, 한민족 식생활사라고 부를 수 있는 진술이 꽤 다채롭다. 영등포가 물이 좋은 땅이어서 농사가 잘되었고, 가을걷이 무렵에는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솥을 걸고 추어탕을 끓였다는 기억은 흥미로웠다. 공장지대와 교통 요지였던 영등포가 물 좋은 농사지역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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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다시 소환된 ‘잔반의 기억’ 고교 시절 무시무시한 눈빛의 선배가 있었다. 차마 곁에 다가서기 힘들었다. 학교에 폭력서클이 여럿 있었는데, 그 선배는 건드리지 못했다. “삼청교육대 출신이야, 저 선배.” 그랬다. 삼청교육대. 살아서, 몸 성히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는 말이 있었던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선배가 그곳에 끌려갔을 때가 고작 고교 1년생이었다. 그저 동네에서, 학교에서 껄렁하다고 잡혀갔다고 했다. 경찰서마다 학교마다 삼청교육대에 보낼 인원을 찍어 할당을 때렸다는 말도 있었다. 전두환 군부가 출범하고 사회악 일소니, 정의사회 구현이니 하여 내놓은 민심수습책이 바로 삼청교육대였다. 영장도 없이 사람을 잡아 군부대에 처넣고 ‘인간 개조’를 시킨다는 죽음의 명령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부의 정치깡패 처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다. 당시 텔레비전과 영화관의 대한뉴스에선 목봉체조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알았다, 목봉체조 좀 하고, 피티 체조로 기합을 주는 것이려니 했다. 그들 말대로 인간쓰레기를 사람 만들어 내보내주는 걸로 아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었다. 살아서 출소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지만 흉포한 소문이 돌았다. 무자비한 구타와 살상행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부대 조교로 근무했던 이들도 증언에 참여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명쾌하지 않았고, 배상도 제대로 안됐다. 최초 기안자, 결재자,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죗값을 치른 것이지” “깡패놈들은 좀 맞아도 싸”.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소위 건달과 깡패가 잡혀간 건 사실이다. 전과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영장도, 재판도 없이 강제구금될 이유는 없었다. ‘불량한’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통금을 어겼다고, 그냥 동네에서 사이 안 좋은 사람이 무고를 해서, 술 마시고 지나가다 ‘할당’에 맞춰 트럭에 태워진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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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청진옥의 ‘국잽이’ 종로의 유명한 해장국집 청진옥에 갔더니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머릿수건을 쓰고 뚝배기에 해장국을 푸는 젊은 여인의 사진이다. ‘국잽이’라고 부르는 업무를 오랜 시간 해냈던 직원이다. 그렇게 국잽이로서 정년 넘게 일하고 은퇴했다. 다들 셰프며 파티시에며 소믈리에인 지금 요리판에서는 생소한 직책이다. ‘~잽이’는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를 말한다. 왕년의 우리 직업판에서는 ‘꾼’이거나 ‘잽이’가 많았다. 근사한 벼슬을 호칭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손으로 평생 무언가를 주물러서 업으로 삼던 낮은 신분의 이들이었다. 요즘도 우리는 무얼 잘하는 이를 두고 꾼이니, 잽이니 한다. 직업의 세계에서는 거의 쓰지 않고, 이제는 입말로만 남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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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공족 이른바 카공족이란 말이 회자된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본디 카페는 토론의 장소로 유럽에서 성장했다. 유럽의 민주주의와 철학의 발전은 카페의 몫이 컸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건 그런 의미에서는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종종 심각한 논쟁을 유발한다. 카페의 수익 문제, 손님 윤리(?) 문제가 거론된다. 카페가 공부뿐 아니라 회의와 작업실의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공유 사무실이 유행하는 것처럼, 최근에는 혼자 일하고 움직이는 프리랜서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의 전통적인 카테고리가 무너졌다는 의미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