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구워 먹는 연탄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내가 어렸을 때인 1970년대에는 대도시에서도 여전히 연탄을 땠다. 액화석유가스, 즉 LPG는 이미 도입된 시기였지만 비싸고 시설이 부족해서 일부 아파트 등에만 공급되었다. 1960년대에도 이른바 ‘가스통’이라고 부르는 안전용기 LPG가 있었는데 이는 특이하게도 일본 수입품이었다. 대개의 가정은 연탄-석유-LPG로 연료가 바뀌었다. 우리 집은 오랫동안 연탄과 석유풍로를 같이 쓰다가 80년대 들어 LPG를 쓰기 시작했다.

연탄은 아궁이에 넣어 때므로 난방을 겸해서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효율적이었다. 물론 연탄가스 위험이 있어서 날씨가 추워지면 신문 사회면에는 언제나 중독사고 소식이 실렸다. 동회(주민센터)에서는 통반장을 통해서 각 가정의 장판을 열고 금이 간 곳은 없는지 살피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연탄가스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고압산소기가 설치된 병원을 소개하는 것도 그때 공무원들의 업무였다.

연탄은 냄새가 고통스러웠지만 열효율이 좋았다. 값이 비싸지는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는 그조차 늘 부담스러웠다. 집집마다 방구들 하나에 두 장을 때느냐 세 장을 때느냐로 골머리를 앓았다. 하루 종일 두 장만 때려면 공기구멍을 잘 조절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했고 연탄을 아끼다가 너무 늦게 갈아서 불을 꺼뜨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꺼진 연탄은 숯을 써서 불을 살려야 했는데 잘 붙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번개탄(상품명)이라 부르는 착화탄이었다. 연탄 모양으로 생겨서 불이 잘 붙도록 첨가물을 넣어 얄팍하게 만든 번개탄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연탄은 요리에 아주 적합하지는 않았다. 불 조절이 쉽지 않아서였다. 이때 공기구멍과 부지깽이나 연탄집게로 적절한 화력을 잘 만드는 사람이 뛰어난 주부였다. 이를테면 솥밥을 짓다가 뜸을 들이려면 부지깽이로 솥과 연탄의 거리를 떨어뜨려놓았다. 엄마들은 공기구멍 막는 헌 양말 뭉치를 절묘하게 조절했다. 이런 작업에 실패하면 소위 설익고 타는 삼층밥이 되고 말았다.

연탄은 대개 리어카로 날랐다. 문제는 고지대였다. 당시 주소로 ‘산 ○○○번지’라면 험한 언덕을 올라야 했다. 눈이 내리면 길이 얼어 빙판이기 십상이었다. 이런 동네는 난도에 따라 웃돈을 받았다. 연탄 한 장당 3원이니 5원이니 추가금이 붙었던 것이다. 그나마 산동네의 가난한 이들은 대량 주문을 하지도 못하고, 직접 산 아래로 내려가서 새끼줄에 꿴 연탄을 몇 장씩 사 날라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연탄은 무게가 엄청나서 더러는 ‘뒤밀이꾼’이라는 조수를 고용했다. 그 품삯이 아까워서 동네 어린이들을 10원 주고 임시로 쓰기도 했다.

최근 한동훈 여당 비대위원장이 연탄 배달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려서 화제를 모았다. 연탄도 많이 싣지 않은 것 같은데 뒤밀이꾼은 십수 명이 달라붙어 있어서 실소를 자아냈다. 뭔가 보여주려면 진심이 필요하고, 그 진심은 리얼리티가 필요조건이다. 왕년에 연탄배달장수를 숱하게 본 사람으로서 그건 낙제였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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