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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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햄버거 넷, 셋업! 우스운 얘기이지만 40년도 넘은 먼 옛날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햄버거 계가 있었다. 브랜드 햄버거와 밀크셰이크 값이 당시 고등학생에겐 적지 않은 돈이었다. 서너 명이 계를 만들고 돈을 몰아주었다. ‘맥도날드’가 한국에 상륙한 건 의외로 늦어서 1988년이었다. 그것보다 먼저 들어온 외국 브랜드는 ‘훼미리 햄버거’ 같은 일본계였다. 당시엔 캐셔가 주문을 외치면 주방에서는 “투 햄버거, 로저”라고 답해야 했다. 롯데리아는 “햄버거 둘, 셋업”이라고 누군가 내게 일러주었다. 지금도 그렇다면, 안산의 그 지점에서는 “햄버거 넷, 셋업”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햄버거 네 개는 단순한 숫자에서 ‘밈’이 되었다. 그 자리는 동시에 내란 셋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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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순대의 비밀 어느 방송작가의 질문을 받았다. 순대의 역사가 어떻게 되느냐고. 잘 모른다고 답했다. 아직 우리나라에 순대(국) 연구자는 없는 것 같다. 옛날 신문 자료를 뒤져도 아주 적다. 심지어 순대의 변천사를 더듬어볼 기록조차 없다. 언제부터 누가 당면을 넣었는지, 부산 돼지국밥은 이북 피란민이 전파한 것인지, 들깨는 누가 넣었는지, 서울의 순댓국은 전라도식인지 이북식인지 충청도식인지 아니면 그저 서울식인지 모른다. 다만 돼지 사육이 본격화된 1970년대 이후 도시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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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장맛이 진짜가 아니라서 얼마 전에 경기 이천의 한 식당에서 장독대 구경을 했다. 주인은 정작 자기가 만든 음식보다 옹기 내용물에 자부심이 더 커 보였다. 한 항아리를 열자 아주 달큼하고 미묘한 냄새가 풍겼다. 어렸을 때 큰집 장독대에서 나던 그 냄새, 어쩌면 학교 앞 뽑기집에서 나던 설탕도 태우고 애도 타던 그 냄새처럼 캐러멜의 매력이 나오기도 했다. 주인 말씀이 “100년 넘은 씨간장”이란다. 친정집에서 한 독을 받아 그걸 더 익히고, 거기에 새 간장을 부어 가르고, 더하여 잘 숙성된 씨간장 맛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였다. 음식 맛이 보통 아니었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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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꿀통배추 배추 파동 얘기는 지금 삼척동자도 안다. 단순히 배추값이 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여름 혹독한 더위를 겪으면서(사실 가을인 지금도 덥다) 기후 문제, 나아가 지구가 과연 이렇게 생존 가능할지 심각한 경고도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경제는 엉망이고 물가가 살벌하게 올라 민심이 분노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 배경인 듯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불안하다. 그래도 배추 문제로 좁혀서 생각해보자. 1990년대에는 미국산 배추도 수입했던 정부는 흉악한 민심에 얼른 중국산 배추 수입안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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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유튜브와 집밥 요리사로 일하면 “무엇을 만들어 먹을까 하는데 조리법 좀 알려달라”는 말을 듣는다. 어디서 어떤 음식을 맛있게 먹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하다는 질문도 많았다. 언젠가부터 그런 말을 거의 듣지 않게 됐다. 유튜브 덕분(?)이다. 아프리카 수단이나 콩고, 아시아의 타지키스탄 같은 나라의 요리법도 유튜브로 금방 찾을 수 있다. 노하우가 생기면 더 세밀하게 검색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단 음식이라고 해도 해당 음식의 조리법을 배운 ‘다른 민족’이 올린 타이틀인지 아니면 수단 사람이 올린 것인지 비교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 나라에서 거주하는 사람의 요리법인지 또는 그 민족이라고 해도 외국에서 사는 사람이 만든 요리인지 따져볼 수도 있다. 어떤 음식은 요리 기술도 중요하지만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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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라면은 엄마한테 배운다 한국 라면이 요즘 난리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붐을 일으키고 있다. 외국에서 말이다. 한 회사는 주가가 치솟고 있다. 내가 기억하기에 그 회사는 한때 경영이 어려워 크게 고생하기도 했다. 그 회사 제품은 매운 라면인데, 공장을 세게 돌려가며 납기를 맞추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 라면이 빅 히트를 기록한 경우가 적지 않아 업계에서도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다고 한다. 그러던 경쟁 업체들이 진땀을 흘리며 추격에 나섰다. 얼마 전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방문했다. 선물로 그 라면 한 박스를 준비했다. 갈 때 보니 양손에 두 박스씩 들고 공항 수화물 카운터에 나타난 게 아닌가. 원조 나라에 갔으니 많이 사오라고 가족이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선물용으로 특히 인기라고 한다. 언론은 이 라면의 성공 요인을 K팝으로 보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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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분식센타’의 탄생 “서울시는 혼분식을 이행하지 않은 업소 22개소를 적발, 3개월 영업정지 및 폐쇄 조치했다.”(경향신문 1971년 12월3일자) 1960~1970년대 정부의 가장 큰 고민은 식량 문제였다. 그 결과 혼·분식을 강제했다. 사실 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착은 오랜 세월 누적돼온 것이었다. ‘쌀밥에 고깃국’은 당시 남북 모두 사활을 건 선언이었다. 쌀을 대체할 밀가루의 등장은 파란만장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한반도는 원래 ‘밀가루 부족 지대’였다. 맛있는 국수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지만 생산이 부족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우습게도 밀가루 염원을 해결해주었다. 일제 패망과 해방, 미국의 개입은 곧 식량원조를 이끌어냈고, 밀가루가 왕창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공급이 충분해지자 오히려 밀가루를 경원시하는 문화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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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도심 먹자상가의 쓸쓸함 페이스북에 꼬박꼬박 점심 먹은 걸 올리는 친구가 있다. 서울 강북 도심의 한 빌딩에서 일하는 그는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먹는다. 더러는 전날 음주 상태에 따라 새로운 해장거리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덕분에 서울 도심에 ‘이런 집이 있어?’ 할 정도로 깜짝 놀랄 만한 식당을 발견하곤 한다. 5000~6000원에 백반 한 상 차리고 찌개 올리고 돈가스도 주는 집 같은. 같이 식당을 하는 처지에서 당최 그 값에 어떻게 저런 음식을 차려내는지 놀랍다. 사실 원가에 밝은 내가 보면 짐작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이른바 자기 착취다. 주인이 자기 이익을 상당 부분 녹여내어 반납하는 거다. 이런 식당에서 한 상 잘 받아먹은 손님은 뭔가 미안해져서 인사라도 해야 한다는 책무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라 종내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 “도대체 이 값이 가능한 겁니까.” “아휴, 그냥 하는 거죠, 남는 게 없어요. 뭐.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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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식당이 끝나면 얼마 전에 내가 지인과 함께 오래 운영하던 가게를 접었다. 구구한 변명은 의미없지만 밥장사, 술장사의 종말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이익에 대한 희망은 없고, 온갖 악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나온다. 내가 개인 모바일망에 영업 중단 소식을 알리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부끄럽지만, 밥동네에 이름이 알려진 너마저! 이런 분위기였다. 음식 팔던 가게를 철수할 때는 정리해야 할 게 산더미다. 관공서에 폐업신고해야 하고, 직원들 임금도 정산해야 한다. 당연히 퇴직금과 실업급여에 대한 청구권을 도모해야 한다. 이런 행정적인 절차가, 많이 간소화된 요즘 세상에도 꽤 머리를 싸매야 한다. 동시에 ‘물리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다. 멀쩡한 기물들을 내놓고 구매자를 기다린다. 놀랍게도 예전에는 아주 인기 있는 몇몇 물건(진공포장기나 햄슬라이서 같은)도 사려는 이가 없다. 마지막에 전문업자를 부르는 방법이 있는데, 그들은 거의 ‘무게로 달아서’ 사듯이 싸게 매긴다. 워낙 폐업 물품이 많이 나오니 구매 매력을 못 느끼는 거다. 냉장고며 세척기 같은 전기장비는 그래도 어떻게든 싸게라도 넘길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동력이 달리지 않은 수많은 물건들이다. 원목으로 만들어 살 때는 아주 비쌌던 멀쩡한 탁자, 의자는 팔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가져가는 이에게 수거비를 주어야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무서운 마지막이 남아 있다. 가게를 원상복구해야 하므로 철거를 해야 하는데, 인테리어를 좀 복잡하게 한 집은 몇 천만원이 나온다. 물론 임차한 가게 주인이 전액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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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우유 유감 옛날에 내 친구가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를 했는데 한번은 감독이 선수들을 끌고 라이벌 학교 뒷산으로 데려가더란다. 그 산에서 가리킨 것은 학교 구석에 젖소가 풀을 뜯는 작은 울타리였다. “너희들도 우승을 하면 우유를 마실 수 있다!” 당시 지방 대회의 우승 상품이 젖소였고,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높이려 일부러 보여준 장면이라는 얘기였다. 운동장에서 그 학교 선수들이 꿀꺽꿀꺽 우유를 한 병씩 독차지하고 먹는 모습을 묘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친구네 학교는 우승을 못했고 젖소도 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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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빵지순례 인스타그램 시대다. ‘인스타그래머블하다’라는 말도 흔하게 쓸 정도다. 이 앱은 보여주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자신의 삶을 다른 이에게 중계하도록 한다. 내일 인스타그램에 올릴 이벤트를 기획하는 게 삶의 일부인 사람도 있다. 삶의 여러 방식을 바꾸고 있다. 블로그가 한창일 때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모바일한’ 스마트폰과는 물리적으로 다른 토대였다. 컴퓨터는 앉아서 켜고, 해당 블로그에 들어가야 볼 수 있었다. 일종의 동시성이 떨어지고 접속 시간도 적었다. 이제는 다르다.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늘 켜져 있는 스마트폰으로 접속하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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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추억을 구워 먹는 연탄불 내가 어렸을 때인 1970년대에는 대도시에서도 여전히 연탄을 땠다. 액화석유가스, 즉 LPG는 이미 도입된 시기였지만 비싸고 시설이 부족해서 일부 아파트 등에만 공급되었다. 1960년대에도 이른바 ‘가스통’이라고 부르는 안전용기 LPG가 있었는데 이는 특이하게도 일본 수입품이었다. 대개의 가정은 연탄-석유-LPG로 연료가 바뀌었다. 우리 집은 오랫동안 연탄과 석유풍로를 같이 쓰다가 80년대 들어 LPG를 쓰기 시작했다. 연탄은 아궁이에 넣어 때므로 난방을 겸해서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효율적이었다. 물론 연탄가스 위험이 있어서 날씨가 추워지면 신문 사회면에는 언제나 중독사고 소식이 실렸다. 동회(주민센터)에서는 통반장을 통해서 각 가정의 장판을 열고 금이 간 곳은 없는지 살피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연탄가스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고압산소기가 설치된 병원을 소개하는 것도 그때 공무원들의 업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