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능 민주주의를 향하여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고성능 민주주의를 향하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나누어 각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삼권분립은 지금도 민주주의 정치를 떠받치는 기둥이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아니 될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하지만 2020년대의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그 발전과 효율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이 삼권분립으로 갈라진 정부 그리고 그 틀을 이용하여 똬리 틀고 앉은 정당정치라는 것에 분노와 공격이 모아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좌절과 한탄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과연 현대사회 나아가 미래사회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고성능 민주주의를 향하여

이 삼권분립 원칙의 문제점은 산업혁명이 벌어지기 이전의 농경사회를 전제로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 세력의 분립과 정치의 문제는 고대 로마까지의 몇천년 동안 동일하게 반복되는 패턴들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대에 정치의 문제는 크게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내부적인 계급 분열과 외부 세력과의 갈등에 대처하는 군사력 확보 문제 두 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토지의 소유권은 단순한 물질적인 부의 불평등을 넘어서서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서 두 개의 계급으로 사회를 갈라놓는다. 귀족 세력은 물질적 정신적 자원들을 독점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기존 질서와 전통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나라를 몰고 가려고 한다. 뼈빠지게 일을 하면서도 그 소출의 대부분을 빼앗겨 항상 궁핍한 다수의 빈민들은 이러한 귀족들의 책동에 맞서 자신들의 몫과 권력을 늘리려고 악다구니를 쓰며 맞선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력한 개인이 개입하게 된다.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행사에 필요한 효율적인 작동을 책임지는 관료제나 특히 군대는 피라미드형의 위계 서열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 정점에 앉은 최고 책임자는 한 개인임에도 엄청난 권력을 쥘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의 권력 요소가 전면화될 때에 각각 귀족정, 민주정, 군주정(혹은 참주정)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토지 소유와 전쟁 국가가 삶의 틀인 현실에서는 이 세 세력이 모두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게 되어 있으므로 하나가 독주하는 정치 체제는 필연적으로 불안하여 필연적으로 다른 세력에 권력을 넘기게 되어 있어서, 정치 체제는 플라톤이 이미 간파하였듯이 이 세 가지를 순환하며 끝없는 불안정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아이디어가 이른바 혼성 정체론이며, 이를 18세기에 헌법의 원리로 굳혀놓은 것이 삼권분립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세 세력 모두에게 각각의 존재 이유와 기능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권력을 부여하여 서로를 견제하도록 묶어 놓자는 것이다. ‘다수’는 자신들의 대표를 통해 요구를 내놓고 그것을 법으로 제정하는 입법부를 만든다. 이것이 ‘다수의 전횡’으로 이어져 기존 질서를 침식하고 혼란을 낳지 않도록 법의 판단을 내리는 역할은 사법부에 일임된다. 그리고 법의 집행에 필요한 효율성과 강제성을 담보할 수 있는 관료적 합리성의 조직으로서 행정부가 존재하게 된다. 이 원리는 공화정에서 (나아가 모든 정치체에서) 권력이 생성되고 집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각자의 독자적 논리를 가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놓는다.

현대 민주주의는
극단적 파당정치인
‘비토크라시’로 전락
87년 항쟁과 ‘민주화’로
태어난 우리의 6공 또한
‘비토크라시’ 전락 증후
지금 풍성하게 보여줘

‘비토크라시’와 전체주의 극단 오가

서로가 없이는 어느 하나도 작동할 수 없지만 반대로 서로는 서로의 독주와 전횡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권력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그야말로 18세기 정치사상이 도달한 합리성의 정점이요 이를 최초로 체현한 미국의 건국 헌법은 거기에서 태어난 인류 이성의 걸작으로 여겨졌다.

이후 삼권분립의 원칙은 모세의 석판에 새겨진 신의 말씀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누구든 이를 넘보는 자는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리려 했던 카이사르처럼 피투성이로 죽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게 된다.

문제는 20세기 이후의 인류가 농경사회가 아닌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사회 세력의 형성은 ‘소수의 귀족, 다수의 빈민, 군사 지도자’라는 농경사회의 단순한 논리로만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다수가 합의하는 법과 질서만 유지하면 자연의 순환에 따라 돌아가는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는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합리적 효율적인 법적 규제가 구석구석 받쳐주지 않으면 큰 사고와 재앙이 줄줄이 벌어지게 되며, 이에 국가가 해야 할 역할도 완전히 달라진다. 게다가 옛날에는 서로 아주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각자의 자율적 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의회와 법원과 행정부는 산업사회에서 거대한 산업 세력의 전횡으로 사실상 하나로 뭉그러지고 유착되면서 자율성을 잃게 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견제해야 할 권력은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 저 음울하고 소란스러운 산업이라는 벌판에 우뚝 선 거대 산업 세력이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삼권분립은 엉뚱하게도 민주주의 공화국의 효율성을 근본적으로 갉아먹는 장치로 전락하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기술과 산업의 끊임없는 진보와 변화를 기초로 성립하므로, 그것이 최대의 효율성을 발휘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안녕을 파괴하지 않도록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성과 고도의 기동성을 갖춘 집단과 세력이 철저한 실용주의와 합리성에 입각하여 숙의와 합의를 신속하게 도출하고 또 신속하게 집행해야 한다. 삼권분립의 원칙은 자칫하면 이 새로운 ‘산업국가’의 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이 세 부분 모두가 다른 부분을 압도할 권력은 없지만 다른 부분(들)의 작동을 가로막을 정도의 권력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권분립 원칙 덕에 전면적으로 양성화되고 제도화된 정당정치라는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다. 이 각각의 정당들 또한 사회 전체의 합의를 만들어낼 힘과 지도력은 없지만, 다른 정당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힘들은 가지고 있으며 또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각자의 발전 전략으로 삼는다. 이에 산업사회의 현대 민주주의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또 모든 정당이 다른 모든 정당에 대해 발목을 잡고 옴짝달싹 못하게 마비시켜 버리는 ‘비토크라시’로 전락해 버린다. 경제와 사회가 잘 돌아갈 때에는 그래도 이러한 정치 체제가 만인의 욕받이 정도로 그나마 유지되지만, 1930년대처럼 산업사회의 모순이 극악하게 폭발하게 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삼권분립이고 정당정치고 뭐고 단일의 ‘인민 권력’으로 싹쓸어 버리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개헌은 더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번의 개헌은
‘고성능 민주주의’ 설계할
큰 작업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제헌’일 정도로

대선판 ‘고성능 민주주의’와 괴리

파시즘과 공산주의 정치의 기초이다. 그래서 현대의 민주주의는 답답하고 속이 터지는 ‘비토크라시’와 끔찍한 ‘전체주의’라는 두 개의 극단을 오갈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에 로베르토 웅거와 같은 사상가는 삼권분립과 정당정치제를 넘어서서 산업사회의 작동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고성능 민주주의’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87년 항쟁과 ‘민주화’로 태어난 우리의 6공화국 또한 ‘비토크라시’로 전락했다는 증후를 지금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답답한 산업사회의 현실과 맞서서 스스로 혁신하고 돌파구를 뚫고 나가려고 하는 정치 세력은 찾아볼 수가 없고, 제도 정치란 그저 적대 세력들의 무능력과 비위를 꼬집고 폭로하여 얻는 ‘반사이익’의 장이 되어 버렸다. 삼권분립과 정당정치라는 게 현실에서 사회의 발목을 잡는 귀족들의 기득권 똬리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막강한 ‘대권’을 쥔 대통령을 뽑아서 그(녀)가 이러한 막다른 골목을 뚫어 내어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대통령 선거판은 그러한 ‘고성능 민주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표만 된다면 무슨 말이든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지만 또 표만 받고 나면 또 무슨 말이든 무슨 행동이든 하는 것이 현실 정치의 ‘표준’으로 굳어졌다는 것을 매일매일 구역질과 함께 확인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번 선거의 결과와 무관하게 개헌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되어 있다. 하지만 대통령 중임제나 심지어 내각제로의 개헌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다. 이번의 개헌은 케케묵은 18세기에 생겨난 삼권분립이니 뭐니 하는 원칙을 훌쩍 넘어서서 21세기의 산업사회의 현실을 주도할 수 있는 ‘고성능 민주주의’를 설계하는 큰 작업이 되어야 한다. 차라리 ‘제헌’이라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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