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아영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
직설 박물관의 시간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 박물관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아무리 일정이 빠듯해도 두세 군데는 꼭 들른다. 역사상의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치 있다고 여겨져 보존되는 유물, 예술품, 기록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의 생애를 훌쩍 뛰어넘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흔적을 마주하는 일도 즐겁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시간에 물리적인 형상이 있다면,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은 아마도 박물관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두는 일. 그것은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자 망각에 저항하는 일이다.
-
직설 무수한 별들의 빛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지난겨울부터 아껴 읽은 시집의 첫 시에 실린 구절이다. 아름다운 시집은 그냥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두고 싶다. 그래서 김이듬의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타이피스트, 2024)는 책상 근처에 두고 언제든 읽었다. 굳게 마음먹었다가도 금세 무너지곤 하는 것이 흔한 인간사라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 사실이 유독 아프다. 이 구절 다음에는 이런 구절이 온다. 마음은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는 것. 깨끗하고 고운 마음은 어째서 영원하지 않을까. 눈발로 세차게 쏟아져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눈석임물로 줄줄 흐를 때는 덧없는 눈처럼.
-
직설 신체 기억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그와 더 이상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상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이전에 나누었던 시간을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관념적인 의미만도 아니다. 그것은 나와 그를 둘러싼 구체적인 감각의 세계가 한꺼번에 사라진다는 뜻이다.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웃는 표정을 볼 수 없고, 겁먹었을 때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 배어든 특유의 살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기억은 무엇보다 촉각으로 남는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갗이나 촘촘하고 가느다란 털, 곁에서 잠드는 동안 전해지는 뒤척임, 포옹하면 느껴지는 신체의 굴곡 같은 것들. 촉각은 단지 물리적인 접촉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의 가장 깊은 바닥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
직설 보수주의의 형식 보수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어 뜻대로라면 전통적인 가치와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영국 언론인 에드먼드 포셋은 <보수주의>에서 근대 이후 서구 보수주의가 생존해온 맥락을 이렇게 정리한다. 19세기 초 자유로운 시장과 유연한 노동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흐름에 반대하면서 폐쇄된 시장과 안정적인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보수주의자들은 법, 종교, 군사를 관할하는 단체의 지원을 얻어내면서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 대변하는 집단이 됐다. 요컨대 보수주의는 특정한 이념을 고수하기보다는 시대마다 새로운 가치와 충돌하거나 결합하면서 세력을 유지해왔다.
-
직설 주의자들의 나라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누구의 지지도 받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 작년 12월3일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이고 어쩌면 인류에 반복되어온 역사다. 그런데 이 문장이 적힌 소설에는 조금 더 맹랑한 구석이 있다.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정부가 되자마자 ‘주의자 소탕령’을 내린 것이다. 그것인즉슨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주의’를 금지한다는 돌발 명령이다. 정부는 이상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현실주의 등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지닌 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지만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주의’를 포기한다. 김홍의 단편소설 ‘조금자 여사 아주 깊이 잠들다’(‘자음과모음’ 2024년 가을호)의 이야기다.
-
직설 ‘살았다’는 문장 다음 잊고 있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계엄령이 내려지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착륙하려던 여객기의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 2024년 말은 참으로 잔혹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2024년은 세월호 10주기이기도 했다.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므로 기억해야만 하는 일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그 기억을 위한 에세이에서 김현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십 년을 살았다./ 살았다고 끝나는 문장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죽었다고 끝난 문장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하는 사람들, 기억하려는 사람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오늘은 4월17일입니다’)
-
직설 아름다운 최애의 아이 만약 좋아하는 아이돌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올해 합계출산율이 0.7명 이하로 예상되는 시대에 이희주 소설가의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인기 남자 아이돌의 정자가 인공수정 시술용으로 판매되는 사회가 배경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여성 우미는 자신의 ‘최애’ 아이돌인 유리의 정자가 공여되었다는 소식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냉철하게 결정한다. 아름다운 유리의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
직설 귀여움의 기술 다이어리, 스마트폰, 가방, 신발까지 각종 스티커나 키링으로 꾸미기를 즐기는 요즘 문화의 핵심은 ‘귀여움’이다. 종이 만화 전성기이자 각종 팬시 제품이 성행한 1990년대 문화의 귀환이라고도 하고, 사회가 각박할수록 무해한 대상에 이끌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하지만, 귀여움은 의외로 오래된 학술적 연구 대상이다. 커다란 눈, 통통한 볼, 넓은 이마, 작은 코 등 포유류 유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귀여운 외모는 상대에게 돌봄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외부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조건이 된다고 보는 진화론적 연구가 대표적이다. 귀여운 외모에 대한 본능적인 편향은 ‘킨첸슈마(Kindchenschema)’라고도 불린다.
-
직설 눈동자의 사랑 얼마 전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읽다가 마음에 오래 남은 구절을 보았다. “나는 나의 내면을 보려다 눈동자 하나를 발견한다./ 누구의 눈인가?/ 알 수 없다.” 배시은의 ‘수면의 신’(<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이다. 화자는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 누군가를 보고 싶어하거나 무언가를 저울질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깊은 눈동자. 그러자 예상치 못하게 무언가를 보려는 능동적 행위는 곧 스스로가 보이는 수동적 행위가 된다. 이 매력적인 시를 읽고 나면 니체의 유명한 잠언에서 ‘심연’이라는 단어를 ‘눈동자’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이 눈동자를 오래 바라본다면, 눈동자 또한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
직설 두 단어 사이로 숨쉬기 사라 바트만(Sarah Baartman)은 18세기 말 남아프리카의 코이코이족으로 태어나 서유럽으로 끌려간 뒤 프릭쇼에 전시되었던 흑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백인 사이에선 흔치 않은 커다란 엉덩이의 체형을 가진 그녀는 당시 유럽인들의 인종주의적인 호기심으로 동물과 비교되는 등 과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사망 후에도 기괴하고 특이한 신체의 표본이라는 명분으로 200년 동안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별명은 식민주의 시대의 아이러니한 멸칭이지만, 이후 여러 예술가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성의 이름을 재해석해왔다. 평생 백인 사회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온 시인의 귀에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처럼. “내 목구멍, 내 장기, 내 뼈를 되찾아라.”
-
직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어 지난 6월18일 대법원은 동성 동반자에 대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에서 동성 부부의 법적 권리를 최초로 인정한, 65쪽에 달하는 역사적인 판결문의 쟁점 중 하나는 동성 커플과 이성 커플의 ‘본질적인 동일성’이었다. 대법관 13명 중 9명의 다수의견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취급함을 금지”하는 헌법상 평등원칙에 따라 경제적 생활공동체를 형성한 동성 동반자를 차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나머지 4명은 현행법상 혼인으로 인정되어 법적인 부양의무를 부담하는지 여부가 “두 집단의 공통점을 압도할 만큼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차이점”이라는 별개의견을 제출했다. 치열한 보충의견이 덧붙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질적인 동일성’이 인정된 셈이다. 2012년 워싱턴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 투표를 앞두고 널리 울려 퍼진 매클모어 & 라이언 루이스의 노래 ‘same love’의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어(it’s all the same love).”
-
직설 AI, 창작에서 감상의 문제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고 있는지. 내가 맡고 있는 대학교 문학 글쓰기 강의에서는 특히 난감하고 까다로운 문제다. 교재에는 AI에 관해 필수적으로 가르치게 되어 있지만,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가 챗GPT로 쓴 것은 아닌지 검사해야 하고, 어떤 학생들은 AI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한창 변화하는 와중에 무언가를 규정해서 지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대한 안전하고 윤리적인 선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강의를 마친 뒤 당부를 덧붙이게 된다. 이것은 현재 시점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언제라도 상황은 바뀔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