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아영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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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귀신과의 이별 연습 고전 설화에서 귀신은 대개 사무치는 원한이나 억울한 사정이 있어 사람을 찾아온다. 이승에서 풀지 못한 응어리를 누군가가 대신 처리해주기를 바라면서. 이때 귀신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하러 온다. 그러나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타나기 위해서,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찾아오는 귀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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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어둠에서 보기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깜깜한 침실에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점차 어둠에 적응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불을 끈 직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가도 조금씩 방 안에 있는 사물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사물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어둠이란 빛이 0인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미세한 광자가 움직이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어둠도 완전한 어둠이 아니므로 눈이 아주 낮은 조도에 익숙해지면서 희미한 빛의 대비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이렇게 잘 보인다니. 아무리 깜깜해도 무언가가 보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문학을 읽을 때마다 하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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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실패의 사용법 우리는 성공의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더 좋은 직장과 더 넓은 집, 적기의 연애·결혼·출산, 취미·건강을 위한 자기계발이 좋은 인생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2011)은 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는 “실패(failure)”라는 부정적 단어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여는 방식으로 다시 쓰자고 제안한다. 실패를 낙오가 아니라 다른 방향키로 보자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공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균열을 내고 그 틈에서 다른 삶의 감각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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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한국 남성’이라는 젠더 현기증 버락 오바마는 2009년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다. 평등한 교육 기회라는 정책 목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다정한 아버지의 면모를 드러낸 편지는 당선 직후 행보란 점에서 고도의 정치적인 전략이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공격적이고 강인한 남성적 이미지를 과장하는 반면 민주당은 포용적이며 협력하는 여성적 이미지를 강조해왔다. 상류층 이성애자 백인 남성을 모델로 삼는 헤게모니 남성성과 차별화하면서도, ‘분노하는 흑인 남성’이라는 낙인찍힌 이미지를 피하고자 부드러운 여성성이라는 코드를 채택했으리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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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윤회의 꿈 모든 작가가 오랜만에 신작을 낸다고 해서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작가’가 오정희라면 말이 달라진다. 더구나 그 ‘오랜만’이 21년이라면 어떨까. 1968년 ‘완구점 여인’으로 등단한 오정희의 신작 소설집 <봄날의 이야기>(삼인, 2025)를 읽으려면 이 정도의 맥락은 상기해야 한다. 이 책에는 오정희의 첫 소설집 <불의 강>(1975)으로부터 이어지는 지난 반세기의 세월이 응축돼 있다.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대 초반 작가에게서 어렴풋이 보였던, 삶과 죽음을 향한 서늘한 시선이 산수(傘壽)를 앞둔 작가의 근작에서 이토록 투명하게 발견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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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시는 누구와 말하는가 나희덕의 시에서 자연은 한 번도 단순한 풍경이나 고정된 사물이었던 적이 없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인간과 감응하는 대상에 가깝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발표된 <가능주의자>(문학동네, 2021)가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들리는 자연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였다면, 열 번째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이르러 시는 하나의 물질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시란 과연 어떤 물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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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박물관의 시간 어느 도시를 방문하든 박물관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아무리 일정이 빠듯해도 두세 군데는 꼭 들른다. 역사상의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치 있다고 여겨져 보존되는 유물, 예술품, 기록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의 생애를 훌쩍 뛰어넘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흔적을 마주하는 일도 즐겁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시간에 물리적인 형상이 있다면,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은 아마도 박물관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서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두는 일. 그것은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자 망각에 저항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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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수한 별들의 빛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지난겨울부터 아껴 읽은 시집의 첫 시에 실린 구절이다. 아름다운 시집은 그냥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두고 싶다. 그래서 김이듬의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타이피스트, 2024)는 책상 근처에 두고 언제든 읽었다. 굳게 마음먹었다가도 금세 무너지곤 하는 것이 흔한 인간사라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 사실이 유독 아프다. 이 구절 다음에는 이런 구절이 온다. 마음은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는 것. 깨끗하고 고운 마음은 어째서 영원하지 않을까. 눈발로 세차게 쏟아져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눈석임물로 줄줄 흐를 때는 덧없는 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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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신체 기억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그와 더 이상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상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이전에 나누었던 시간을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관념적인 의미만도 아니다. 그것은 나와 그를 둘러싼 구체적인 감각의 세계가 한꺼번에 사라진다는 뜻이다.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웃는 표정을 볼 수 없고, 겁먹었을 때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 배어든 특유의 살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기억은 무엇보다 촉각으로 남는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갗이나 촘촘하고 가느다란 털, 곁에서 잠드는 동안 전해지는 뒤척임, 포옹하면 느껴지는 신체의 굴곡 같은 것들. 촉각은 단지 물리적인 접촉이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의 가장 깊은 바닥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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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보수주의의 형식 보수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어 뜻대로라면 전통적인 가치와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을 의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영국 언론인 에드먼드 포셋은 <보수주의>에서 근대 이후 서구 보수주의가 생존해온 맥락을 이렇게 정리한다. 19세기 초 자유로운 시장과 유연한 노동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흐름에 반대하면서 폐쇄된 시장과 안정적인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보수주의자들은 법, 종교, 군사를 관할하는 단체의 지원을 얻어내면서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 대변하는 집단이 됐다. 요컨대 보수주의는 특정한 이념을 고수하기보다는 시대마다 새로운 가치와 충돌하거나 결합하면서 세력을 유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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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주의자들의 나라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누구의 지지도 받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 작년 12월3일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이고 어쩌면 인류에 반복되어온 역사다. 그런데 이 문장이 적힌 소설에는 조금 더 맹랑한 구석이 있다. 절대로 집권해서는 안 될 세력이 정부가 되자마자 ‘주의자 소탕령’을 내린 것이다. 그것인즉슨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주의’를 금지한다는 돌발 명령이다. 정부는 이상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현실주의 등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지닌 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지만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주의’를 포기한다. 김홍의 단편소설 ‘조금자 여사 아주 깊이 잠들다’(‘자음과모음’ 2024년 가을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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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살았다’는 문장 다음 잊고 있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계엄령이 내려지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착륙하려던 여객기의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 2024년 말은 참으로 잔혹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2024년은 세월호 10주기이기도 했다.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므로 기억해야만 하는 일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그 기억을 위한 에세이에서 김현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십 년을 살았다./ 살았다고 끝나는 문장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죽었다고 끝난 문장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하는 사람들, 기억하려는 사람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오늘은 4월17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