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내면, 독서

인아영 문학평론가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SF 드라마 <삼체>의 원작 소설은 과학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나노 연구자 왕먀오는 주위의 가장 유능하고 똑똑한 과학자들이 자살하거나 실종되는 이상한 현상이 외계 행성 때문임을 알게 된다. 이 현상을 수사하는 경찰 스창은 지구의 모든 정부와 군대를 벌벌 떨게 만드는 이 악랄하고 고능한 적이 외계인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지만, 그들의 전략만은 정확히 꿰뚫고 있다.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뭡니까?” “당신들이지, 과학자들.” 삼체인이라 불리는 외계인이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기초과학자부터 제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초과학은 어떤 문명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그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왕먀오의 걱정에 스창은 조언한다. “출근해서 계속 연구해. 그게 바로 가장 큰 공격이야.”

그러나 삼체인이 소립자 크기의 인공지능 컴퓨터 ‘지자’를 지구에 송출해 인류의 모든 과학활동을 감시하면서 외계 전쟁은 새 국면을 맞이한다. 당황한 인류도 반격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 무기는 다르다. ‘지자’보다 은밀하고 과학보다 복잡한 것. 바로 인간의 내면이다. 삼체인이 인류의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아무리 빠르게 스캔한다 한들, 인간의 사유가 깃든 내면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인간으로 선발된 네 명의 ‘면벽자’는 외부와 소통하지 않고 오직 머릿속으로만 전략을 세워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문명의 토대인 ‘기초과학’과 사유의 바탕인 ‘인문학’. 이것이 <삼체>가 제시하는 인류 최후의 무기다.

그런데 애초에 지구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린 적이 외계 행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 소설의 섬뜩함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 적은 내부에 있다. 처음으로 외계의 메시지를 받은 중국의 천체물리학자 예원제가 지구의 위치가 추적될 수 있도록 전파를 쏘아보낸 까닭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일어난 문화대혁명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뒤 인류에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전근대적인 산물을 타파한다는 명목 아래 온갖 문화유산과 기초 학문을 파괴한 이 20세기의 분서갱유로 인해 예원제는 가족과 함께 인류에 대한 희망도 잃는다. <삼체>의 원작자인 중국 소설가 류츠신은 중국의 역사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수준을 거꾸로 되돌리는 장본인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슬프게도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운 것 같지 않다. 정부는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작년보다 4조6000억원(14.7%)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과학기술계의 잇따른 반발로 내년 R&D 예산의 원상 복구가 결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지만, 예산 감축의 칼날은 여전히 기초 학문에 겨눠진다. 독서와 출판 문화에 대한 경시는 더욱 심각하다. 문체부는 올해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과 중소출판사 창작지원, 지역서점 문화활동에 대한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전 국민의 독서율이 매년 떨어지는 상황에서 독서 인프라는 더 열악해지고 있다. <삼체>에서 예원제가 기초과학 발전을 저지한 이유는 인류의 사악함과 어리석음에 실망했기 때문이지만, 현재 독서와 출판 문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 감축엔 고작 그만큼의 성찰도 없어보인다. 오직 이윤과 효율성에 대한 계산뿐이다. 독서가 내면의 철학적 사유를 진전시킨 인류 발명품이라면, 책 읽고 사유하는 시민의 역량은 그 사회 수준의 척도다. 외계인 침략까지 갈 문제도 아니다. 공부하지 않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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