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출시된 비디오 게임 ‘챈트 오브 세나르’는 어드벤처 게임이자 언어해독 퀴즈로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지구라트 모양의 탑에 던져진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이 공간을 돌아다니다보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각 층에는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사는데(1층은 신자들의 수도원, 2층은 전사들의 요새, 3층은 예술가들의 낙원, 4층은 과학자들의 공장, 5층은 은둔자들의 고립구역) 이들의 언어를 하나씩 해독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이곳을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탐험해볼 수 있다. 첫째, 언어학적인 차원이다. 세나르의 각 민족은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신자들의 언어에는 복수형을 나타내는 조사가 없고, 예술가들의 언어는 ‘목적어-주어-동사’라는 독특한 어순으로 이뤄져 있다. 여러 정황을 힌트 삼아 상형, 표어, 표음 등 다양한 원리로 조직된 언어의 세계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드벤처 게임의 재미는 이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서 둘째, 서사적인 차원이 요구된다. 각 층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수호한다. 신자는 신, 전사는 의무, 예술가는 아름다움, 과학자는 발명, 은둔자는 고립을 위해 움직인다. 이들은 온전히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무시하거나 오해한다. 신자에게 전사는 위협을 가하는 무서운 존재인 한편, 전사는 예술가를 선택받은 자라고 추켜세우고, 예술가는 더 높은 곳으로만 올라가려는 과학자를 바보라고 놀린다. 오해와 적대감으로 점철된 각 민족은 서로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셋째, 번역학적인 차원이 작동한다. 플레이어는 이들의 소통을 돕기 위해 이질적인 언어들을 번역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의 세계에서 태어난 이들은 왜 이렇게 갈라지게 되었을까? 지구라트 모양 탑에 힌트가 있다. 바로 구약성서의 바벨탑이다(이름의 세나르는 바벨탑이 세워졌던 지역인 ‘시날’에서 가져온 것이다). 높은 탑을 쌓아 감히 하늘에 닿으려 시도한 인간에게 신이 분노하여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쪼갰고 이로 인해 인간 사이 오해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자크 데리다는 논문 ‘바벨탑으로부터(Des Tours de babel)’에서 바벨탑과 번역의 유비를 풀어낸 적이 있다. 신은 바벨탑을 해체하여 언어를 흩어지게 만들고 번역을 금지했지만 이로써 인간은 번역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번역가들은 이 불가능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빚진 사람들’이자 발터 베냐민의 표현으로는 ‘포기하는 사람들’이다(베냐민의 논문 ‘번역가의 과제’에서 과제(Aufgabe)는 독일어로 ‘포기’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듯, 완전한 번역도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만질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챈트 오브 세나르’의 결말은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은둔자들이 만들어낸 가상세계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그러나 게임 하는 내내 열심히 시도한 번역이 그저 꿈일 뿐이었다는 결말도 근사하지 않은가. 번역이란, 나와 다른 이를 이해해보는 일이란, 나도 모르게 짊어진 빚이자 실패가 예정된 포기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을 향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 약속의 의미에 대해서라면, 나는 데리다의 다음 문장보다 더 감동적인 설명을 본 적이 없다. “무언가 닿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의미에서라면 만남은 단지 약속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약속으로서 번역은 이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