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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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우리나라 전나무 중 최고의 나무 전나무는 추위를 잘 견디는 나무여서 높은 산에서 잘 자란다. 곧은 줄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는 전나무는 무리를 이뤄 자랄 때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만, 곧게 자라는 품이 아름다워 홀로 심어 키우기도 한 우리 토종 나무다. 전나무 가운데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나무는 전북 진안 운장산 기슭의 ‘진안 천황사 전나무’가 유일하다. 신라 헌강왕 때에 창건한 천년고찰 천황사를 찾으면 먼저 절집 돌담 곁에서 줄기의 중동이 댕강 잘린 나무나이 800년의 전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세월의 풍진을 켜켜이 쌓은 나무지만, 부러진 줄기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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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도심 한복판서 전통 이어가는 나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라도 나무가 있다. 도시라고 다르지 않다. 번거롭고 복잡한 도시라 해도 크고 오래된 나무는 있다. 다만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야 하는 사정에 밀려 나무를 위한 자리가 넉넉히 마련되지 못해 존재감이 낮을 뿐이다. 근대 개항의 중심 역할을 한 인천시 도심 한복판에서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가을이면 어김없이 형광빛 노란 단풍으로 화려하게 단장하는 한 그루의 융융한 은행나무는 그래서 더 없이 소중하다. 개항 초기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중추 역할을 한 수도권 도시에서, 사람들이 나무의 넉넉한 자리를 지켜왔다는 점에서 나무의 소중함은 더 커진다. 이태 전인 202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가 그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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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성공의 기원 담아 심은 큰 나무 그때 그들은 후손의 성공을 기원하며 나무를 심었다.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살림집 대문 앞에 서 있는 ‘해남 연동리 녹우당 은행나무’(사진)가 그 나무다. ‘녹우당’은 500여년 전에 이 자리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림을 시작하면서 ‘해남윤씨’를 일으킨 어초은 윤효정((尹孝貞·1476~1543)을 시작으로 윤선도, 윤두서(尹斗緖·1688~1715) 등이 살림을 이어간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택’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전남 지역의 살림집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건물로, 보존 가치가 높아 1968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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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조상 음덕 오래 기억하는 나무 추석 차례상을 비롯한 모든 제사상에는 반드시 밤을 올려야 한다. 이유가 있다. 밤나무의 씨앗인 밤을 땅에 심으면 새싹을 돋운 뒤에 껍질이 썩지 않고 줄기에 남아 있다. 심지어 백년 동안이나 남아 있다고까지 하지만 이는 과장이고, 실제로 3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옛사람들은 이 같은 밤의 특징을 보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공을 오래 기억하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고, 제사 때에 밤을 올린 것이다. 밤나무 열매인 밤송이에는 억센 가시가 솟아나오는 탓에 나무 그늘이 아무리 좋아도 정자나무로 키우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도 심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히 밤나무를 마을 한가운데에 심어 키운 오래된 밤나무가 있다. 퇴계 이황의 친형인 온계 이해(李瀣·1496~1550)가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가던 경북 안동 온혜리 온계종택 앞 마을 길에 서 있는 ‘안동 온혜리 밤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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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마을 살림살이를 지켜온 잣나무 밤나무가 많아 ‘한밤마을’로 불리는 전통 마을이 있다. 950년 무렵 홍란(洪鸞)이란 선비가 마을을 일으킨 대구 군위군 대율리다. 마을 어귀에는 소나무들이 무리지어 자라는 ‘한밤 솔밭’이 있는데, 그 안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던 홍천뢰(洪天賚·1564~1615)와 홍경승(洪慶承·1567~?)의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가 있다. 오랜 역사와 사람들의 기품이 담긴 마을이란 증거다. 전통 가옥들 사이로 정겹게 쌓은 돌담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돌아들면 길 끝에서 잣나무 한 쌍이 우뚝 서 있는 남천고택(南川古宅)에 닿게 된다. 남천고택을 상징하는 건 두 그루의 ‘군위 대율리 잣나무’다. 고택 담장에 서 있는 이 나무는 나무 나이 250년, 높이 10m, 줄기 둘레 2m에 이른다. 잣나무가 비교적 수명이 짧은 편임을 감안하면 매우 크고 오래된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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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마주침 알아차리고 몸 바꾼 나무 미국의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역저 <세계 끝의 버섯>에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체와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알아차리게 되는 대상에 맞춤하게 변화하는 과정이 생명의 기본 원리라고 강조했다. 다양성을 갖추며 살아가는 생태계의 발전 원리이기도 하다. 칭의 이야기처럼 전남 장흥에는 곁에 있는 나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나무 형태를 바꾸며 살아온 특별한 나무가 있다.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군(群)’이다. 후박나무는 원래 정자나무로 많이 쓰일 만큼 나뭇가지를 넓게 펼치며 크게 자란다. 후박나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나무에는 나뭇가지를 펼칠 공간이 필요하다. 광합성을 하기 위해 햇빛을 제대로 받으려면 그늘을 드리우는 방해물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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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나무에 담긴 민족해방의 염원 일제강점기의 시인 심훈(1901~1936)은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그날이 오면’ 중에서)라며 민족 해방의 그날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는 조국 광복을 희구하는 시를 모아 시집 <그날이 오면>을 내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충남 당진군 부곡리 농촌마을로 찾아들게 된 계기였다. 1932년의 일이다. 민족의 희망이 되는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그는 집을 짓고 ‘밭을 갈면서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으로 ‘필경사(筆耕舍)’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그는 창문 앞에 나무를 심었다. 민족 해방을 향한 희망과 기원이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도록 나무 향기가 하늘 높이 오르는 특징이 도드라지는 향나무를 골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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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옛 장군의 이름을 품은 최고의 왕버들 몸과 마음을 충전해야 할 삼복더위 한복판, 큰 나무 그늘에서 개울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시절이다. 물은 나무의 생존에 필수 요소이지만, 물 가까이에서 자라는 건 나무에게 좋은 환경이 아니다. 버드나무 종류가 개울가에서 자라는 건 특별한 경우다. 버드나무 종류 가운데 우리나라의 토종 나무로 왕버들이 있다. 능수버들과 달리 나뭇가지가 늘어지지 않고, 넓게 펼치면서 높이 치솟아오르는 생김새가 근사해 예로부터 개울가의 정자나무로 심어 키웠다. 하지만 물가에서 자라는 탓에 줄기가 쉽게 썩을 수밖에 없어 왕버들의 수명은 짧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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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헌법재판소의 ‘서울 재동 백송’ 소나무 종류 가운데 줄기 껍질에 흰 빛의 신비로운 얼룩 무늬를 지닌 나무가 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이다. 백송은 옮겨심기가 잘 안 되는 까탈스러운 나무여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나무에 속한다. 백송은 그래서 원산지인 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외교관이나 중국인과의 친밀한 교유관계를 가진 권세가들의 집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권세가들이 모여 살던 수도권에 오래된 백송이 집중돼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은 헌법재판소 경내에 서 있는 ‘서울 재동 백송’이다. 나무나이 600년, 높이 15m의 큰 나무다. 둘로 나뉜 굵은 줄기가 넓게 벌어져 큰비와 바람에 찢겨나갈 수도 있는 불안한 모습이지만, 백송 특유의 하얀 줄기 껍질만큼은 더없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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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장마 뒤 꽃 피우는 선비의 나무 장맛비 지나고 삼복더위 다가오면 우윳빛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회화나무 꽃이다. 조선시대 학동들은 이 꽃을 보며 과거 시험 채비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또 나무의 생김새가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아예 ‘선비수’ ‘학자목’이라고 불렀다. 풍성하고 품위 있는 생김새를 자랑하는 나무이건만 우리나라의 회화나무 중에서 유난히 빈약한 몸으로 서 있는 회화나무가 있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다. 이 나무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불편한 생김새를 갖게 된 건 1866년, 조선의 조정에서 천주교 탄압 교령을 발표하고 8000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를 처형한 병인박해 때부터다. 그때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한 백성은 1000명을 넘었다. 읍성의 관리들은 천주교 신도들을 나무가 서 있는 감옥 앞 공터로 불러내 배교를 강요했고, 선선히 배교를 허락하지 않은 신도들은 머리채가 묶여 나무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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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선조의 뜻 어린 최고의 상수리나무 참나뭇과 가운데 그 열매인 도토리의 맛이 가장 좋다고 알려진 게 상수리나무다. 상수리나무는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 참나뭇과에 속하는 여느 나무와 마찬가지로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오래된 큰 나무를 찾기가 쉽지 않다. 2023년 현재 산림청 지정 보호수 약 1만2000건 가운데 상수리나무는 80건이 채 안 되고,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지정한 문화재급의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참나뭇과의 나무를 땔감으로 베어내 쓰도록 권장한 조선시대의 소나무 보호정책에 따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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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전쟁의 참상 기억하는 ‘평화의 나무’ ‘호국보훈의달’이면 떠오르는 ‘작지만 큰 나무’가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으로 나뉜 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 학살을 벌인 참극의 현장인 대전 중촌동 ‘대전감옥터’ 한쪽에 홀로 서 있는 왕버들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그때, 이 마을의 ‘대전감옥’을 지키던 남쪽의 군인들은 감옥에 투옥했던 좌익 인사들을 죄 없는 양민과 함께 무참히 학살하고 남쪽으로 떠났다. 무려 1800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대전 산내골 학살사건’이다. 이어 한·미 합동작전에 따른 인천상륙이 성공하자, 대전감옥을 점령했던 북쪽 군인들은 퇴각을 서두르며 수감했던 우익 인사를 학살해 앙갚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