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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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경관적 가치 품은 최고의 느릅나무 느티나무만큼 우리 민족의 삶에 깊이 스며든 나무는 없다. 산림청 보호수 1만1000여건 가운데 느티나무는 무려 6100여건이나 된다. 느티나무는 시무나무·비술나무·느릅나무와 함께 느릅나뭇과에 속한다. 당연히 느릅나무가 이들의 대표적인 나무다. 하지만 느릅나무 노거수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심지어 국가 지정 자연유산이나 지방기념물이 한 그루도 없다. 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삼척 하장면 느릅나무’가 있기는 했는데, 나무 주변에 졸참나무·단풍나무·음나무 등 다른 나무가 군락을 이루면서 수세가 위축된 느릅나무의 존재감은 미약해졌다. 결국 2012년에 천연기념물 명칭을 ‘삼척 갈전리 당숲’으로 고친 바람에 느릅나무 천연기념물은 한 그루도 없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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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헤어진 아들 그리워하며 심은 나무 세상살이 부질없이 변해도 가족을 향한 애틋함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오래된 가족 이야기일수록 애틋함이 더 깊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효(孝)를 사회 이데올로기로 여기며 살던 옛 시대로부터 전하는 이야기는 더욱 그럴 수밖에. 경남 거창 남상면 무촌리 감악산 연수사(演水寺)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애틋한 그리움을 담고 서 있는 은행나무가 있다. 600년 넘게 살아온 ‘거창 연수사 은행나무’(사진)는 높이 38m, 가슴높이 줄기둘레 7m,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 펼침폭은 20m를 넘는다. 나무 높이가 38m라면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모든 은행나무를 통틀어 높이에 있어서 가장 큰 몇 그루의 나무에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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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탄신일쯤 꽃 피우는 ‘이순신 나무’ 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상스러운 봄, 대개의 경우 ‘충무공 탄신일’(4월28일) 즈음에 자잘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식물분류학의 이름은 ‘왕후박나무’이지만, 아예 ‘이순신 나무’(사진)라고 부르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가 그 나무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단항마을 앞 바닷가에 서 있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용왕이 마을 어부에게 보내준 선물이다. 옛날 이 마을의 늙은 어부가 잡은 물고기의 배 속에 든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여서 그렇게 여겨왔다. 해마다 음력 3월10일이면 나무 앞에 모여 어부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리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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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조국 해방을 위해 백범이 심은 나무 1898년 인천감옥 탈옥에 성공한 열혈청년 김창수는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조국광복 투쟁을 이어갔다. 신고의 세월을 보내던 김구는 침략의 무리가 이 땅에서 물러가자 조국에 돌아왔다. 미완의 해방을 완성하기 위해 대중 활동을 시작한 김구는 중국에 가기 전에 3년 동안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했던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절집에서 하루 머무른 뒤 그는 조국의 완전한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절집 마당에 나무를 심었다. 지나온 일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무궁화 한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를 절집 마당에 심었다고 그는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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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라진 절집의 자취 지켜온 큰 나무 사람 떠난 자리에 나무가 남는다. 아름다운 남도의 섬, 진도를 대표하는 노거수인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도 그렇다. 가뭇없이 사라진 사람살이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이룬 보금자리 한 귀퉁이를 버티고 서 있는 큰 나무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사진)’ 곁에는 구암사라는 절집이 있지만, 이 역시 새로 지은 절집이다. 구암사라는 이름은 절집 뒷산에 ‘비둘기 바위’ 혹은 한자로 ‘구암(鳩巖)’으로 부르는 큰 바위가 있어서 붙였고, 이 자리는 흔히 ‘상만사 터’라고 부른다. 마을 이름인 ‘상만리’에 기대어 ‘상만사’라는 절집이 있었을 것으로 본 때문이다. 이름조차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전에 사라진 절터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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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역사의 자취 아로새겨진 자연유산 충북 제천 송학면 무도리 서문마을에 들어서려면 먼저 마을 동쪽을 둘러싼 낮은 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려 패망의 역사를 담은 왕박산(王朴山)이다. 이곳으로 피신한 고려 왕족은 성을 박씨(朴氏)로 고치고 은둔했다. 왕족이 박씨로 성을 갈았다 해서 왕박씨, 그 뒷산을 왕박산이라고 불렀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전하는 이야기다. 고려 패망과 조선 건국의 역사가 어른거리는 마을 어귀에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다. 나무나이 600년, 나무높이 13m, 가슴높이줄기둘레 4.6m의 큰 나무다.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나무다. 제천시의 큰 나무 가운데에 첫손에 꼽는 대표 노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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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천년고찰을 지킨 천년의 숲 동백나무 꽃 피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다. 제주도,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지역에서는 12월이면 피어나지만, 이제 겨우 꽃봉오리를 꿈틀거리며 피어날 채비를 마친 곳이 많다. 아무래도 우거진 동백나무숲에 들어 동백꽃의 진수를 느끼려면 삼월 중순이 지나야 한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나무숲으로는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숲(사진)’을 첫손에 꼽을 만하다. 백련사는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1163~1245)가 이끌었던 고려 후기의 신앙운동 결사체인 백련결사로부터 시작한 천년고찰이다. 천년의 세월을 거치며 절집은 숱한 풍진을 겪었지만, 절집 뒷산의 동백나무숲은 훼손되지 않고 의연하게 남았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백련사 사적비에도 아름다운 숲이라고 기록돼 있으며, 조선시대 문인들이 최고의 숲으로 예찬한 시문(詩文)도 여럿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진 숲이다. 이 숲이 특별한 건 사람의 출입이 자유롭다는 사실이다. 동백꽃의 처연한 낙화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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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명마를 추모하며 꽂아둔 채찍 경북 청송 안덕면 명당리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용맹하게 물리친 임씨 성의 명장이 있었다. 승마의 달인이었던 그가 타는 말은 천리 만리를 달리고도 지치지 않는 명마로, 거침없이 전쟁터를 달리며 왜적들 사이를 누볐다. 말을 타고 달리는 임 장군의 모습이 하도 강렬해서 왜적들은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고 한다. 그러나 장군의 말도 전쟁 중에 왜적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임 장군은 말의 무덤을 짓고, 용맹한 말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이 무덤을 사람들은 ‘마능지’라고 불렀다. 장군은 또 말 무덤인 마능지 앞에 말과의 소통을 이어주던 채찍을 꽂으며 말의 죽음을 추모했다. 놀랍게도 그 채찍이 얼마 뒤에 살아나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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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람살이 교훈 위해 심은 향나무 돌아가신 어버이를 기억하기 위해 심어 키운 나무가 있다. 신비로운 생김새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연기 봉산동 향나무’(세종시 조치원읍)다. 나무 위쪽으로 삐죽 내민 가지까지 합쳐봐야 고작 3m밖에 안 되는 낮은 키의 이 향나무가 보여주는 경이로움은 옆으로 넓게 드리운 나뭇가지 아래쪽에 있다. 뿌리에서 올라온 줄기 맨 아래에서부터 비틀리며 솟아오른 나뭇가지는 그 자체로 용틀임을 연상하게 하며 사방으로 11m 넘게 펼쳤다. 나무 높이의 4배 가까운 폭이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하늘을 가렸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나뭇가지를 뻗었기에 허리를 굽히고 그 아래에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긴 세월에 걸쳐 빈자리를 하나하나 채워가면서 가지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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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마방의 흔적 지켜온 국내 최고의 밤나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집에서 태어나 그 나무를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그곳을 떠났다. 강원 평창 방림면의 산골마을 운교리 지방도로변 낮은 동산에 서 있는 밤나무와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길손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식당집 주인장 이야기다. 밤나무 가운데 유일하게 200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평창 운교리 밤나무’.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뒤에 식당 건물을 헐어내자 주변 풍광은 휑뎅그렁해졌다. 50대 중반이던 식당의 여자 주인장은 쪽창으로 밤나무가 내다뵈는 방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밤나무집’으로 더 잘 알려졌던 이 집은 나그네가 하룻밤 쉬어가던 주막이자 말들을 쉬게 하는 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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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폐허가 된 절터를 지키는 나무 사람이 떠나도 나무는 남는다. 처음 뿌리내린 곳에서 사람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 나무의 운명이다. 가뭇없이 사라진 사람살이의 터전에서 옛사람의 자취를 찾는 데에 나무를 기준점으로 삼는 건 그래서다. 원주 부론면에는 오래전에 마을 살림살이의 중심이었던 큰 절집 법천사(法泉寺)의 이름을 따 ‘법천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마을의 중심은 휑뎅그렁하게 남은 폐허의 절터다. 절터 한편에 옛 스님의 탑비가 남아 있긴 하지만, 사람살이의 다른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절집의 내력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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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크리스마스 즈음 돋보이는 호랑가시나무 겨울 채비를 마치고 거개의 나무들이 적막에 드는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유난스레 돋보이는 나무가 있다. 호랑가시나무다. 상록성의 초록 잎 사이의 빨간 열매가 도드라지는 호랑가시나무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겨울나무’ 혹은 ‘크리스마스 나무’다. 잎 가장자리의 가시가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 해서 호랑가시나무라고 이름 붙인 나무인데, 일부 지방에서는 얼기설기 엮은 가지로 호랑이가 등을 긁을 때 쓸 만하다 해서, 호랑이등긁개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만든 나무라고도 하고, 예수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다가 자신의 여린 몸이 찢겨 피를 흘리며 죽어간 작은 새 ‘로빈’이 좋아하는 먹이여서 예수의 수난과 함께 기억하며 성탄 장식에 썼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