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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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바위틈 뚫고 살아남은 소나무 산다는 것은 제 삶의 특징 일부를 상처내고 내려놓는 일이다. 환경에 적응하려면 제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고, 때로는 자신이 할 수 없던 일도 해야 한다. 자기만 고집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경남 하동 악양 들녘을 내다보는 지리산 자락의 축지리 대축마을 뒷동산에 서 있는 ‘하동 축지리 문암송’은 그 사례를 보여주는 특별한 나무다. 천연기념물인 이 소나무는 4m쯤 솟아오른 너럭바위 위에서 자라는, 볼수록 경이로운 나무다. 누구는 이 소나무의 나이가 300년 됐다고 하고, 또 누구는 600년도 넘었다고 한다. 나무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는 게 불가능해서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물 한 방울 스미지 않는 바위 위에서 살아와 여느 소나무와 비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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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민족의 상처 함께 슬퍼한 나무 동해 낙산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해상 관음 도량’으로 서해에는 강화도에 딸린 작은 섬 석모도에 천년고찰 보문사가 있다. 서해 일몰의 장엄한 풍광으로도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절집이다. 보문사는 신라 진덕여왕 3년(649)에 지어진 절집이다. 그때 이 마을 어부가 바다에서 건져올린 22개의 바위를 ‘천축국에서 보내온 불상’으로 점지받아 지금의 보문사 석굴에 모시면서 절집의 역사가 시작됐다. 보문사에는 석굴의 불상만큼 신비롭게 자란 향나무가 있다. 큰법당인 석굴 앞에 수문장처럼 자리 잡은 1.5m 높이의 바위 위에서 700년을 살아온 장한 나무다. 둘레 3m쯤 되는 줄기는 1.7m 높이에서 둘로 나뉘며 동서 방향으로 뻗었다. 대략 1.5m 굵기의 두 줄기는 제가끔 용틀임하듯 배배 꼬이고 비틀리면서 기묘한 모습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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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고속도로 휴게소의 ‘소원 나무’ 난데없는 참사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이 하냥 어둡다. 누구라도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큰 바람을 꺼내어 되새기게 되는 새해 앞이 어수선하다. 새해에는 더 이상 가슴 쓸어내릴 일 없이 평안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기원할 뿐이다. ‘소원의 나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맡아 하는 큰 나무가 있다. 나무나이 500년의 이 느티나무는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 대구 달성군 구간의 마산 방향 현풍휴게소의 낮은 동산 마루에 서 있다. 마을 당산나무였던 이 느티나무는 고속도로가 마을을 통과하게 되면서 베일 위기에 부닥쳤다. 그때 이 자리에 고속도로 휴게소를 짓고, 당산나무는 휴게소의 상징으로 삼자는 결정이 나왔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보기 드문 좋은 결정이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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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광장의 역사 기억하는 큰 나무 600년 전, 경북 안동 풍천면의 하회마을 사람들이 강변의 큰 마당에 모여 마을의 재앙을 몰아내기 위해 굿을 벌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탈춤이며 국가무형유산인 ‘하회별신굿탈놀이’가 그것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그 시절에 사람들은 탈을 쓰고 신명나는 춤을 추며 양반의 패악질을 꾸짖었다. 흥겹게 이어지는 춤사위에서는 비장함이 배어나왔다. 더 좋은 세상을 이루라는 백성의 엄중한 경고였다. 양반들은 백성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살림살이에 신중해야 했다. 모든 사람살이의 바탕은 결국 큰 마당에서 펼쳐진 백성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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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팔려나간 나무를 지켜낸 사람들 순수하게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힘만으로 지켜낸 감동의 사연을 품고 살아남은 나무가 있다. 경북 상주 용포리 평오마을 들녘 가장자리에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다. 사건은 2009년 초여름에 시작됐다. 마을 어귀에 다정하게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가 나무 수집상에게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의 땅 주인이 급하게 돈이 필요해 땅을 내놓는 바람에 나무도 함께 팔린 것이다. 창졸간에 300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나무가 사라지게 됐다. 오랫동안 할배 할매처럼 여겨온 나무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지킬 방도를 궁리했다. 먼저 ‘나무 이식 반대에 관한 주민 동의서’를 작성해 상주시청과 상주경찰서에 냈다. 마을 역사의 증거이자 상징인 나무를 지켜달라는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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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성전환하면서 사람 곁에 살아온 나무 조선 초에 세운 최고의 유학 기관인 서울 문묘 명륜당 마당에는 특별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높이 26m, 가슴높이 줄기둘레 12m의 이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무너앉은 문묘 일원을 복원한 1602년에 새로 심은 나무로, 명실상부한 문묘 일원의 랜드마크다. 생김새도 근사하지만, 나무에 담긴 전설은 더 특별하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나무는 ‘성을 전환한 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졌다. 400년 전부터 이 나무는 오랫동안 씨앗을 풍성하게 맺는 암나무였다. 먹을거리가 넉넉지 않던 그 시절에 큰 나무에서 풍성하게 맺는 은행은 더없이 훌륭한 먹을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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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너럭바위와 한 몸 되어 살아온 1100년 충북 괴산 청천면 낙영산 자락에 터잡은 천년 고찰 공림사에는 ‘천년 느티나무’로 불리는 큰 나무가 있다. 1100년 전인 신라 시대에 경문왕의 지시로 절집을 지은 자정 스님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느티나무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다. 나무는 높이 12m, 줄기둘레 8m이며, 나뭇가지는 동서로 11.6m, 남북으로 14m까지 펼쳤다. 이 정도 규모라면 비슷한 기후에서 자라는 여느 느티나무와 견주었을 때 1000년 넘은 나무로 보기에 무리가 있는 건 사실이다. 나무를 심어 키운 기록이 남지 않아 나무나이를 비롯한 나무를 키워온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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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죽음의 고비 넘긴 특별한 나무 세계 기네스북에 오른 우리나라의 아주 특별한 나무가 있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깊은 산골 마을인 용계리에 서 있는 은행나무(사진)다. 나무높이 31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의 큰 나무인데,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건 규모가 아니라,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 내력 때문이다. 700년 전에 뿌리 내리고 마을 당산나무로 살던 이 나무에 위기가 찾아온 건 1987년이었다. 임하댐 건설 계획에 따라 수몰 위기에 처한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나무도 물을 피해 오랫동안 살아온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나무는 옮겨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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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한글 지킨 선비처럼 올차게 자란 나무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가람 이병기(李秉岐·1891~1968)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선생이 태어나고, 고단했던 삶을 마친 곳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을 이 집에서 보냈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는 내내 이 집을 떠나서 살았다. 오로지 한글을 지키고, 우리 전통 문학장르인 시조를 되살리기 위해서 분주했던 탓에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선생에게 고향집은 오래도록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집에 돌아온 것은 1957년 창졸간에 맞이한 뇌출혈로 활동이 어려워진 뒤였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온 고향집에서 그는 사랑채에 머물렀다. 사랑채 앞, ‘승운정(勝雲亭)’이라고 이름 붙인 모정(茅亭)은 선생이 하늘을 바라보며 해바라기하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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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하늘 아래 첫 감나무 감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에 가을 기미가 스미면 감이 붉게 익어가면서 단맛이 들기 시작한다. 감나무는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잘 자라지만 그 가운데에 경북 상주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을 만큼 유명한 감나무 명소다. <세종실록>은 상주의 공물 목록으로 곶감을 지명했고, <예종실록>에는 상주 곶감을 조정에 진상했다고 기록돼 있다. 상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 ‘하늘 아래 첫 감나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부르는 상주 소은리 감나무다. 예전에 이 마을에는 ‘할미샘’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었다. 소를 몰고 가던 할머니가 목이 말라서 소 발자국이 찍힌 자리를 호미로 파니 샘물이 솟아올라서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할미샘’이라 불렀다. 할머니는 이 샘물을 마시고 젊어져서 딸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병을 얻자 딸은 어미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늘까지 올라가 곶감을 얻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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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우체부가 싫어하는 마을’의 옻나무 옻나무는 가까이하기에 어려운 나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옻나무가 담고 있는 ‘우루시올’이라는 성분이 가려움증과 심각한 발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을 한가운데에서 오래도록 정성껏 키운 옻나무를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충북 단양 가곡면 보발리 말금마을에는 마을 한가운데 사람들이 자주 찾는 우물가에 한 그루의 오래된 옻나무가 있다. 나무높이 15m, 줄기둘레 1m의 이 옻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해발 500m에 위치한 이 마을에 들어서려면 자동차 한 대가 길섶의 나무들을 스치며 지나야 할 만큼 비좁고 굴곡이 심한 산길을 지나야 한다. 여간 조심스러운 길이 아니다. 이 길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우체부가 제일 싫어하는 마을’이라는 마을 별명을 절로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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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독립투사’ 흔적을 간직한 나무 유관순, 안중근, 김구 등 독립투사들의 빛바랜 사진을 인공지능(AI)으로 환하게 웃는 장면으로 부활시킨 영상이 화제였다. 밝은 웃음이 뭉클했다. 그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김마리아’ 열사가 있어 반가웠다. 김마리아의 독립투쟁을 보좌한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다. 이화학당과 정신여고의 전신인 연동여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김마리아는 1913년부터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때 일제 순사들이 김마리아를 체포할 빌미를 잡으려고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연동여학교를 급습한 적이 있었다. 순사가 들이닥칠 낌새를 눈치챈 김마리아는 독립운동과 관련한 비밀 문서들을 학교 운동장에 서 있는 회화나무 줄기의 구멍 안쪽에 숨겼다. 나무줄기가 썩으면서 생긴 큰 구멍이 평소 나무 상태를 세심히 보살피던 김마리아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순사들은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나무줄기의 썩은 구멍 안쪽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