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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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장마의 들녘을 붙드는 나무 장마철이다. 간단없이 이어지는 장맛비는 둑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삼키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즈음 어김없이 떠오르는 나무가 왕버들이다. 물가에 뿌리를 내리는 왕버들은 강물의 범람을 막고, 촘촘하게 뻗는 뿌리로는 강둑의 흙을 지켜낸다. 왕버들의 나뭇가지는 수양버들처럼 늘어지지 않고, 높고 넓게 펼치며 물가에 큰 그늘을 이루어서 개울가 정자나무로 맞춤하다. 습한 물가에서 자라다 보니 줄기 안쪽이 썩어 구멍이 생기기 쉬운데, 그 구멍으로 날벌레와 설치류가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구멍 안에 쌓인 벌레와 설치류의 사체에서 나오는 인(燐) 성분은 푸른 빛을 뿜어내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도깨비불이라고 하고 왕버들을 ‘도깨비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뿌리가 지킨 둑, 그늘이 된 유산 물과 해의 고을이라 불리는 전남 담양에는 한낮의 뙤약볕이 틈입하지 못하는 큰 숲이 있다. 영산강 상류인 담양천 둑길을 따라 이어지는 ‘담양 관방제림’이다. 한여름에도 관방제림 안으로 들어서면 서늘하고 맑은 숲의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걸 느낄 수 있다. 여느 천연기념물과 달리, 누구나 자유롭게 거닐며 평상에 누워 낮잠을 청하거나 맨발로 흙길을 밟는 일상의 쉼터로 활용된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숲이라 할 만하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개항의 그늘 지켜낸 양버즘나무 도시의 가로수 가운데 흔하게 마주치는 나무는 양버즘나무다. 플라타너스로 더 많이 불리는 양버즘나무는 그늘을 넓게 펼칠 뿐 아니라 잎 표면의 미세한 솜털이 미세먼지와 매연, 공해 물질을 흡착해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도 뛰어나 가로수로는 더없이 좋다. 세계 곳곳에서 이 나무를 가로수로 널리 심는 이유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에서도 가로수로 플라타너스 종류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도시 풍광에 제격이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근대 교육사를 증거하는 백합나무 강원 춘천시 교동, 시청 별관 앞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백합나무가 지난 3월 강원특별자치도에 의해 보호수로 지정됐다. 높이 20m, 가슴 높이 줄기 둘레 2.5m쯤 되는 나무는 대략 110년간 이 자리를 지켜왔다. 북아메리카 동부 숲에서 자라던 백합나무를 들여와 심어 키운 게 1920년대 초인 것을 바탕으로 하면,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백합나무 가운데 한 그루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백합나무는 목백합이라고도 불렸고, 꽃송이와 나뭇잎 모양이 튤립 꽃을 닮아서 ‘튤립나무’로도 불렸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1400년 고독 속에 일군 경이로움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나무로는 ‘정선 두위봉 주목’을 먼저 꼽는다. 물론 더 오래됐다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나무들도 꽤 있지만 공식적으로 나이를 확인한 나무로는 가장 오래됐다. 정선 두위봉 북사면 1340m 고지에 이뤄진 주목 군락지의 비조목이라 할 만한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은 1400년이다. 서기 600년 즈음, 태백산을 넘어 강원도 정선 지역에서 절터를 톺아가던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새싹을 내밀어 지금까지 꼿꼿하게 자리를 지켜온 큰 나무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오래된 절집 지켜온 큰 모과나무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나무는 삼국시대 때 우리나라에 들여와 오랫동안 심어 키운 나무이지만, 모과나무 노거수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로 군립공원에 지정된 강천산 군립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오르면 오래된 절집 강천사 바로 앞 개울가 언덕에서 크고 오래된 모과나무를 만날 수 있다. 나무 높이 20m, 가슴높이줄기 둘레 3.1m에 이르는 이 나무는 모과나무 가운데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청주 연제리 모과나무’의 크기를 압도할 만큼 당당하다. 300년쯤 이 자리를 지켜온 나무는 1998년에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천년을 이어온 사람살이의 향기 충남 부여 성흥산에는 백제 동성왕 시절 쌓아 올린 가림성 옛터가 있고, 그 가장자리에 하늘을 우러러 당당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림성 느티나무’다. 오래도록 ‘성흥산성 느티나무’라 불리다 최근 성의 본래 이름인 ‘가림성’을 확인하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는 나무 높이 22m, 가슴 높이 줄기 둘레 5.4m의 규모로 자랐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른 느티나무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전체 풍광도 장관이지만, 땅 위로 솟아오른 뿌리가 빚어낸 기묘한 형상은 더없이 신비롭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죽어서도 살아있는 ‘왕의 나무’ 경남 합천 가야산의 천년고찰 해인사에는 죽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나무가 이 자리에 심어진 것은 신라 애장왕 때다. 애장왕은 서기 800년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신라 제40대 임금이다. 애장왕은 관례에 따라 혼례를 치렀는데, 얼마 뒤 왕후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임금은 백방을 수소문했지만, 왕후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아 마침내 불가를 찾게 됐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비바람 눈보라로 매무시한 아름다움 소나무 종류 가운데 반송이 있다. 줄기가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부챗살처럼 넓게 펼치며 자라는 소나무다. 삿갓처럼 나뭇가지를 펼친다 해서 ‘삿갓솔’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사방으로 고르게 나뭇가지를 뻗는 대개의 반송은 작지만 아름다운 수형으로 자란다. 높지거니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사람살이 가까이에 심어 키우기 좋은 나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집 안 정원이나 묘지 앞에 심어 가꾼 것도 그래서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은사의 지조를 지켜온 남명매 봄 오는 기미, 또렷해졌다. 밤바람은 아직 싸늘해도 성마른 봄꽃들이 꽃잎을 열었다는 남녘의 기별이 이어진다. 여느 봄꽃에 비해 일찍 피어나는 매화꽃 개화가 이 무렵 가장 반가운 꽃 소식이다. 탐매행을 서둘러야 할 때다. 우리의 오래된 매화에는 대개 나무가 서 있는 장소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선암매’ ‘고불매’ ‘율곡매’와 같은 식으로 나무에 담긴 인문학적 자취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영풍 단촌리의 변천사 품은 느티나무 설 명절을 앞둔 농촌 마을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이 즈음, 대개의 농촌 마을은 사람살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당산제를 채비한다. 손길은 잦지만 번거롭지 않다. 절차와 과정이 모두 경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산제는 하늘과 사람을 잇는 큰 나무 앞에서 사람들이 소망을 표현하는 농경문화의 대표적 의식이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으로 여기는 까닭에 봄 기운 다가오는 이 즈음이 안성맞춤이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도시의 숨결을 기억하는 나무 청라지구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인천 서구 신현동의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면 초록의 빈터가 나타나고, 뜻밖에 웅장한 회화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천연기념물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다. 500년쯤 살아온 이 나무는 나무높이 22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5.6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에는 회화나무 특유의 기품이 담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화나무의 하나이지만, 주변 건물에 눌려 위용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