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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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천년을 이어온 사람살이의 향기 충남 부여 성흥산에는 백제 동성왕 시절 쌓아 올린 가림성 옛터가 있고, 그 가장자리에 하늘을 우러러 당당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림성 느티나무’다. 오래도록 ‘성흥산성 느티나무’라 불리다 최근 성의 본래 이름인 ‘가림성’을 확인하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는 나무 높이 22m, 가슴 높이 줄기 둘레 5.4m의 규모로 자랐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른 느티나무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전체 풍광도 장관이지만, 땅 위로 솟아오른 뿌리가 빚어낸 기묘한 형상은 더없이 신비롭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죽어서도 살아있는 ‘왕의 나무’ 경남 합천 가야산의 천년고찰 해인사에는 죽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나무가 이 자리에 심어진 것은 신라 애장왕 때다. 애장왕은 서기 800년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신라 제40대 임금이다. 애장왕은 관례에 따라 혼례를 치렀는데, 얼마 뒤 왕후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임금은 백방을 수소문했지만, 왕후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아 마침내 불가를 찾게 됐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비바람 눈보라로 매무시한 아름다움 소나무 종류 가운데 반송이 있다. 줄기가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부챗살처럼 넓게 펼치며 자라는 소나무다. 삿갓처럼 나뭇가지를 펼친다 해서 ‘삿갓솔’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사방으로 고르게 나뭇가지를 뻗는 대개의 반송은 작지만 아름다운 수형으로 자란다. 높지거니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사람살이 가까이에 심어 키우기 좋은 나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집 안 정원이나 묘지 앞에 심어 가꾼 것도 그래서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은사의 지조를 지켜온 남명매 봄 오는 기미, 또렷해졌다. 밤바람은 아직 싸늘해도 성마른 봄꽃들이 꽃잎을 열었다는 남녘의 기별이 이어진다. 여느 봄꽃에 비해 일찍 피어나는 매화꽃 개화가 이 무렵 가장 반가운 꽃 소식이다. 탐매행을 서둘러야 할 때다. 우리의 오래된 매화에는 대개 나무가 서 있는 장소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선암매’ ‘고불매’ ‘율곡매’와 같은 식으로 나무에 담긴 인문학적 자취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영풍 단촌리의 변천사 품은 느티나무 설 명절을 앞둔 농촌 마을은 생명의 기운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이 즈음, 대개의 농촌 마을은 사람살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당산제를 채비한다. 손길은 잦지만 번거롭지 않다. 절차와 과정이 모두 경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산제는 하늘과 사람을 잇는 큰 나무 앞에서 사람들이 소망을 표현하는 농경문화의 대표적 의식이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으로 여기는 까닭에 봄 기운 다가오는 이 즈음이 안성맞춤이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도시의 숨결을 기억하는 나무 청라지구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인천 서구 신현동의 좁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면 초록의 빈터가 나타나고, 뜻밖에 웅장한 회화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된다. 천연기념물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다. 500년쯤 살아온 이 나무는 나무높이 22m,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5.6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에는 회화나무 특유의 기품이 담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화나무의 하나이지만, 주변 건물에 눌려 위용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추사의 필법 닮은 순백의 기품 옛 선비들에게 나무를 심는 행위는 단순히 주변을 가꾸는 일을 넘어, 자신의 철학과 삶의 궤적을 심는 의례였다. 학자가 심은 나무에 학문적 신념이 깃들 듯, 충남 예산 용궁리 추사고택 뒷동산의 ‘예산 용궁리 백송’에는 추사 김정희의 삶에 얽힌 인문학적 서사가 담겨 있다. 중국 원산의 백송은 번식과 자람이 까다로워 우리 땅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나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백송은 중국을 오가던 선비들이 기념비적으로 심은 게 대부분이다. 이 나무 역시 김정희가 24세의 청년 시절,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다녀오며 가져와 심은 것이다. 추사에게 백송은 각별한 나무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살던 서울 통의동의 월성위궁에서 보냈는데, 바로 그 집 앞에 크고 아름다운 백송이 있었다. 추사가 백송을 가문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계기다. 청년이 되어 연경에서 마주한 백송은 추사에게 고향과 학문을 잇는 매개였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적요 속에 피어날 암향을 기원하며 “젊은 것보다 늙은 것을, 살진 것보다 마른 것을, 번거로운 것보다 희귀한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나무가 있다. 화려한 빛깔로 세상을 현혹하기보다 청초한 생김새와 그윽한 향기로 음전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매실나무다. 돌아온 날들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되는 세밑에 문득 떠오르는 나무다. 옛 선비들은 매실나무의 꽃, 매화에서 세속을 떠나 조용히 살아가는 은사(隱士)의 이미지를 보았다. 추위를 견디며 고매한 기품을 잃지 않는 지조를 닮은 때문이지 싶다. 선비들이 매화 향기를 일러 ‘암향(暗香)’, 곧 ‘숨은 채 피어나는 향기’라 칭송한 이유다. 번잡한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고요 속에 침잠할 때 비로소 배어나는 내면의 품격이자 절제의 미학이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공존과 존중으로 이룬 명품 풍경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아산 공세리성당 자리는 조선 성종 때인 1478년 부근의 40개 마을에서 농사지은 곡식을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갈무리해두는 창고가 있던 곳이다. ‘공세(貢稅)곶창’이라는 이름의 창고였다. ‘공세리’라는 마을 이름은 거기서 유래했다. 곡식 창고를 더 굳건히 지키기 위해 성곽처럼 방어시설까지 세웠다고 한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경쟁 대신 선택한 ‘아름다운 공존’ 예로부터 탱자나무는 산울타리로 많이 심어 키웠다. 그러나 정원 한가운데에 조경수로 키우는 특별한 경우도 있다. 경북 문경 대하리, 장수황씨 종택 앞마당의 탱자나무가 그런 나무다. 1593년쯤 이 집을 처음 지은 황시간(1558~1642)은 마당 한쪽에 연못을 파고 그 둘레에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 그로부터 400년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나무들은 모두 스러지고 탱자나무만 홀로 살아남았다. 종택의 후손들은 이 탱자나무를 가문의 상징으로 여기며 대를 이어 정성껏 지켜왔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의병의 함성 깨운 ‘북을 거는 나무’ 의병의 고장, 경남 의령 유곡면 세간리에는 ‘현고수(懸鼓樹)’라는 나무가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고향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다. 사람 키를 조금 넘는 자리에서 직각으로 꺾인 독특한 생김새의 줄기를 마주하면 누구라도 뭔가를 걸면 좋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 땅을 지키자는 큰 뜻 하나로 선비 곽재우는 붓을 내려놓고 의병을 일으켰다. 전투 경험이 없는 의병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신호가 필요했다. 의병장 곽재우는 그때 마당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이 나무에 북을 걸었다. 훈련 집합 신호도, 적군을 향한 출정 신호도 이 나무에 건 북으로 알렸다. ‘북을 거는 나무’라는 뜻의 ‘현고수’라는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정부인의 기품으로 살아남아 민족의 소나무 ‘정이품송’이 서 있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에서 남쪽으로 고갯길을 넘어 7㎞ 남짓 지나면 장안면 서원리가 나온다. 마을을 감도는 개울을 따라 난 호젓한 도로 곁에는 근사한 기품의 소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인 ‘보은 서원리 소나무’다. 뿌리 근처 둘레 5m, 높이 15.2m로 서 있는 이 나무는 줄기가 둘로 갈라지며 사방으로 넓게 나뭇가지를 펼쳤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고르게 넓게 펼친 나무 생김새가 아름답다는 게 이 나무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