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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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폐허 터를 홀로 지켜온 큰 나무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는다. 세월이 흐르면 한때 번성했던 절집이라 해도 터만 남기고 가뭇없이 사라진다. 홀로 사람살이의 무늬를 지키는 건 오직 큰 나무뿐이다. 문헌 기록조차 따로 남지 않아 내력을 알기 어려운 충북 진천 보련산 자락의 ‘연곡리 절터’도 그렇다. 전각은 물론이고, 절집 이름조차 사라진 폐허의 터다. 그나마 10세기에 세워진 ‘진천 연곡리 석비’가 남아 있어서 고려 전기에 번창했던 절집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 석비조차 명문이 없는 백비(白碑)여서 절집 내력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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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고려청자 도요지 지켜온 푸조나무 이름만 듣고 외래종으로 짐작하게 되는 나무 중 ‘푸조나무’가 있다. 하지만 푸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저절로 자라온 토종 나무다. 남부지방에서는 중부의 느티나무나 팽나무만큼 흔하게 볼 수 있다. 나뭇가지를 넓게 펼치는 특징 때문에 바닷가 마을에서 정자나무나 방풍림으로도 심어 키운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 어귀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푸조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인 ‘강진 사당리 푸조나무’다. 고려청자 가마터로 유명한 이 마을은 전국의 도공들이 모여 저마다의 작품을 빚어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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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장군 형제의 넋 기억하는 나무 스무 가구가 채 안 되는 전남 장성 단전리 마을의 어른들께 모두 마을 당산나무 앞으로 나오시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말씀드렸다. 공영방송 인기 프로그램의 촬영을 위한 자리였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으로 집을 나섰는데, 한 어르신은 아쉬운 표정을 내비치며 “갈 수 없다”고 했다. “어제 비린 것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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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꽃향기로 존재감 드러내는 멀구슬나무 멀구슬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심어 키운 나무이지만, 남부지방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중부지방에는 다소 생경한 나무다. 하지만 따뜻한 기후의 제주에는 매우 익숙한 나무로, 제주 사람들은 나무의 열매가 말의 목에 매다는 구슬을 닮았다는 이유에서 ‘멀쿠실낭’이라 부르다가 ‘멀구슬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던 중에 ‘전가만춘(田家晩春)’이라는 시에 “비 갠 방죽에 청량한 기운 일고/ 멀구슬나무 꽃에 바람 잦아들자 해 길어지네”라며 늦은 봄에 피어난 멀구슬나무 꽃을 노래했던 걸 보면 남부지방에서는 친근한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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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람의 마을서 제 이름 지킨 고욤나무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제 존재감을 내려놓아야 하는 얄궂은 운명의 나무가 있다. 고욤나무다. 고욤나무도 분명히 감을 닮은 열매를 맺기는 하지만, 크기가 작은 데다 떫은맛이 커서 환영받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감나무를 키우려면 고욤나무가 필요하다. 씨앗으로 키우면 튼실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감나무는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접붙여 키워야 맛난 감을 맺는다. 고욤나무는 결국 감나무를 사람에게 환영받는 나무로 키워내는 뿌리이자 바탕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감나무 그늘에 묻히는 바람에 제 이름을 내려놓고 그저 감나무로 불리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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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우리나라 전나무 중 최고의 나무 전나무는 추위를 잘 견디는 나무여서 높은 산에서 잘 자란다. 곧은 줄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는 전나무는 무리를 이뤄 자랄 때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만, 곧게 자라는 품이 아름다워 홀로 심어 키우기도 한 우리 토종 나무다. 전나무 가운데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나무는 전북 진안 운장산 기슭의 ‘진안 천황사 전나무’가 유일하다. 신라 헌강왕 때에 창건한 천년고찰 천황사를 찾으면 먼저 절집 돌담 곁에서 줄기의 중동이 댕강 잘린 나무나이 800년의 전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세월의 풍진을 켜켜이 쌓은 나무지만, 부러진 줄기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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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도심 한복판서 전통 이어가는 나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라도 나무가 있다. 도시라고 다르지 않다. 번거롭고 복잡한 도시라 해도 크고 오래된 나무는 있다. 다만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야 하는 사정에 밀려 나무를 위한 자리가 넉넉히 마련되지 못해 존재감이 낮을 뿐이다. 근대 개항의 중심 역할을 한 인천시 도심 한복판에서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가을이면 어김없이 형광빛 노란 단풍으로 화려하게 단장하는 한 그루의 융융한 은행나무는 그래서 더 없이 소중하다. 개항 초기뿐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중추 역할을 한 수도권 도시에서, 사람들이 나무의 넉넉한 자리를 지켜왔다는 점에서 나무의 소중함은 더 커진다. 이태 전인 202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가 그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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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성공의 기원 담아 심은 큰 나무 그때 그들은 후손의 성공을 기원하며 나무를 심었다.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살림집 대문 앞에 서 있는 ‘해남 연동리 녹우당 은행나무’(사진)가 그 나무다. ‘녹우당’은 500여년 전에 이 자리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림을 시작하면서 ‘해남윤씨’를 일으킨 어초은 윤효정((尹孝貞·1476~1543)을 시작으로 윤선도, 윤두서(尹斗緖·1688~1715) 등이 살림을 이어간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택’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전남 지역의 살림집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건물로, 보존 가치가 높아 1968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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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조상 음덕 오래 기억하는 나무 추석 차례상을 비롯한 모든 제사상에는 반드시 밤을 올려야 한다. 이유가 있다. 밤나무의 씨앗인 밤을 땅에 심으면 새싹을 돋운 뒤에 껍질이 썩지 않고 줄기에 남아 있다. 심지어 백년 동안이나 남아 있다고까지 하지만 이는 과장이고, 실제로 3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옛사람들은 이 같은 밤의 특징을 보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공을 오래 기억하는 씨앗이라고 생각하고, 제사 때에 밤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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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마을 살림살이를 지켜온 잣나무 밤나무가 많아 ‘한밤마을’로 불리는 전통 마을이 있다. 950년 무렵 홍란(洪鸞)이란 선비가 마을을 일으킨 대구 군위군 대율리다. 마을 어귀에는 소나무들이 무리지어 자라는 ‘한밤 솔밭’이 있는데, 그 안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던 홍천뢰(洪天賚·1564~1615)와 홍경승(洪慶承·1567~?)의 공적을 기리는 기적비가 있다. 오랜 역사와 사람들의 기품이 담긴 마을이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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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마주침 알아차리고 몸 바꾼 나무 미국의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역저 <세계 끝의 버섯>에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체와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알아차리게 되는 대상에 맞춤하게 변화하는 과정이 생명의 기본 원리라고 강조했다. 다양성을 갖추며 살아가는 생태계의 발전 원리이기도 하다. 칭의 이야기처럼 전남 장흥에는 곁에 있는 나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나무 형태를 바꾸며 살아온 특별한 나무가 있다. ‘장흥 삼산리 후박나무군(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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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나무에 담긴 민족해방의 염원 일제강점기의 시인 심훈(1901~1936)은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그날이 오면’ 중에서)라며 민족 해방의 그날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는 조국 광복을 희구하는 시를 모아 시집 <그날이 오면>을 내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충남 당진군 부곡리 농촌마을로 찾아들게 된 계기였다. 1932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