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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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마지막 주막을 지켜온 회화나무 1300리 낙동강 줄기가 스쳐지나는 예천 강변에는 이 땅의 마지막 주막으로 불리는 ‘삼강주막’이 있다. 주모라는 이름의 여인이 지켜온 명실상부한 주막이다. 낙동강 내성천 금천에서 흘러나오는 세 강물이 하나로 만나는 자리여서 삼강(三江)이라 불리는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다. 강 위로 삼강교라는 육중한 다리가 놓이고 옛 나루터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50년 전까지만 해도 삼강나루터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번화한 나루터였고, 나루터 주막은 영남 지역 보부상들에게 최고의 쉼터였다. 2005년에 주모 유옥연 노인이 돌아가신 뒤,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옛 보부상의 숙소와 주막을 재현하고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한 이 주막거리를 생생하게 살아서 지켜온 나무가 있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된 ‘예천 삼강리 회화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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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람 발소리를 들으며 자라는 나무 나무들이 붉거나 노랗게 물들었던 잎들을 내려놓는 조락의 계절이다. 겨울나기 채비를 마쳤다는 신호다. 이제 씨앗을 품은 열매를 튼실하게 키우는 데에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겨울잠에 들어야 한다. 낙엽을 마치면 나무의 열매가 눈에 들어올 차례다. 어미를 떠나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가기 위해 열매는 사람에게 혹은 초식동물의 눈에 들어야 한다. 잎 떨군 나뭇가지 위에 남은 빨간 까치밥이 눈에 띄는 것도 그래서다. 더불어 맛도 좋아야 한다. 맛이 제대로 들어야 사람이든 새든 짐승이든 찾아와 그의 씨앗을 옮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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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정성으로 살려낸 방학동 은행나무 한 그루의 나무에 넓은 땅을 내어주는 게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는 서울 도심에서 이례적으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600년 된 큰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다. 하늘 향해 25m까지 솟아오른 나무는 지름 20m가 넘는 원형 공간의 땅을 홀로 차지했다. 이 나무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여주로 떠날 때 치성을 올린 나무라고도 하고, 조선 후기 경복궁 증축 때 징목(徵木) 대상에 선정되어 베어내야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감 나무’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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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백성의 삶 배려한 선비의 나무 나무는 매오로시 사람살이를 고스란히 담는다. 비단이 재산의 척도이던 시절,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얻기 위해 키운 뽕나무도 그런 나무이건만 세월 흐르며 뽕나무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뽕나무 가운데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는 단연 강원 정선군청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뽕나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단종 때에 호조참판을 지내던 제주 고씨 중시조 고순창이다. 단종 폐위와 함께 낙향한 그는 살림집을 짓고 대문 앞에 한 쌍의 뽕나무를 심었다. 소나무 회화나무처럼 학문과 권력 혹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온 나무들과 달리 남녀상열지사의 상징이거나 나무 이름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인 뽕나무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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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제사장 단군의 제사 터 지키는 나무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을 기리기 위해 단군은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제단을 쌓고 제를 올렸다. 사람이 보금자리를 틀 수 있도록 세상을 열어준 하늘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제사이자 축제다. 하늘과 사람이 어우러진 제사 터를 지키는 건 한 그루의 소사나무다. 기록이 없어서 누가 일부러 심어 키운 것인지, 지나는 새들이 씨앗을 물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단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꾸미기 위해 자리를 신중히 골라 심은 것처럼 참성단 돌축대 위에 우뚝 서 있는 소사나무 풍광은 볼수록 절묘하다. 주로 서해안과 남해안의 산기슭에 자생하는 소사나무는 강화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토종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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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정삼품 벼슬 받은 천년 은행나무 큰비와 태풍이 남긴 상처가 깊은 탓에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을 재우치게 된다. 사람의 성마름과 다르게 나무들은 천천히 가을을 채비한다. 단풍이야 아직 이르지만, 잎 위의 짙은 초록은 서서히 힘을 내려놓는 게 눈에 들어오는 즈음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고 노란 단풍이 짙어지며 가을로 화려해지리라. 노란 단풍으로 아름다운 은행나무 가운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다. 무엇보다 규모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몇 그루의 은행나무 가운데 한 그루다. 높이가 무려 42m에 이르고,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14m나 된다. 평균적인 아파트 14층 높이와 어른 8~10명이 둘러서야 겨우 나무 둘레에서 손을 맞잡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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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큰 나무의 태풍 대비 전략 태풍은 벼락과 함께 들녘에 홀로 우뚝 서 있는 큰 나무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이다. 몰려오는 큰 바람을 막을 수도, 피해 달아날 수도 없다. 버텨야 한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태풍을 못 이겨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힌 큰 나무 소식을 마주치게 된다. 키가 크고 곧게 자라는 나무들은 바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꾸어 왔다. 흔히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높이 솟아오른 키 큰 나무들로서는 그저 깊이 내린 뿌리만으로 큰 바람을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깊게 내려야 할 뿌리를 옆으로 넓게 뻗는 게 바람을 버티는 데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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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2억5000만원 들인 팽나무의 이사 마을의 살림살이가 그때 창졸간에 무너앉았다. 부산 가덕도 바닷가, 평화롭게 살아가던 율리마을에서 벌어진 10여년 전의 사건이다. 갯벌에 지천으로 널린 조개를 캐며 이어가던 마을의 풍요는 산산조각났다. 갯벌이 갈아엎어지고, ‘가덕도 일주도로’라는 자동차전용도로가 놓이게 됐다. 먹고사는 일이 묘연해졌다. 돌아보면 지치고 힘들던 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고단한 마음을 붙잡아준 건 ‘할배, 할매’라는 이름으로 500년 동안 사람살이를 지켜준 팽나무 한 쌍(사진)이었다. 나무에 얹혀진 마을의 역사는 이제 마을을 관통하는 큰 도로를 따라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온몸으로 공사장을 막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떻게든 나무를 지켜야 했다. 마을의 생명줄이었던 샘을 갈아엎는 일까지도 참을 수 있었지만 할배·할매나무가 쓰러지는 건 그냥 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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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70년 만에 꽃 피운 물푸레나무 북유럽 신화에서 세상을 연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땅 깊은 곳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하늘을 들어올리며 세상이 열렸다. 이른바 우주목 신화다.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리던 이 물푸레나무는 최고의 신 ‘오딘’이 사람을 만드는 재료로도 쓰였다. 라그나로크 전쟁을 치른 오딘은 이그드라실의 가지 하나를 잘라내 사람을 지었다. 결국 신화에서 물푸레나무는 세상을 열고 생명을 지은 최고의 나무다. 물푸레나무는 농경문화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나무다. 목재가 단단한 데다 질기기까지 해서 농기구의 재료로는 최상급이었다. 적당히 자라면 모두 베어내 써야 했던 까닭에 크고 오래된 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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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여름에 아름다운 병산서원 배롱나무 배롱나무의 계절, 붉은 여름이다. 여름에 백일 넘게 붉은 꽃을 피워서 ‘백일홍나무’라고 부르다가 배롱나무라는 남다른 이름을 얻은 이 나무는 햇살 뜨거운 여름이면 가지 끝에서 고깔 모양의 붉은 꽃차례를 피운다. 주름투성이의 꽃잎 6장 안쪽에 40개의 수술이 돋는데, 가장자리에 자리한 6개의 노란 수술이 유난히 길어서 아름답다. 대개는 붉은빛이지만, 흰색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어 따로 흰배롱나무라고 부른다. 중부지방에서도 키울 수는 있지만,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나무여서 월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남부지방에서는 정원수로 흔히 심어 키우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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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신비로운 흰색 얼룩의 소나무 나무의 생명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태풍과 벼락이다. 들녘에 홀로 서서 비바람, 눈보라와 맞서야 하는 나무로서 피할 수 없는 위협 요인이다. 해마다 태풍과 벼락이 빈번하게 찾아오는 여름이면, 곳곳에서 큰 나무들이 쓰러지는 사태를 맞이하는 건 하릴없는 노릇이다. 이태 전 태풍 ‘마이삭’으로 나뭇가지의 절반이 찢겨나간 ‘이천 신대리 백송’도 그랬다. 우르르 쏟아져 쌓인 나뭇가지 잔해들은 이 나무가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살아남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197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천 신대리 백송’(사진)은 우리 땅에 살아 있는 백송을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나무였다. 200여년 전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이 자신의 선조인 민달용의 묘지 앞에 심은 이 나무는 조선 후기 여흥(지금의 여주)민씨 일가가 누렸던 세도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인문학적 자연자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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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호랑이 주눅들게 한 큰 나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충남 금산군의 요광리를 둘러싼 서대산 기슭에도 호랑이가 살았던 모양이다. 숲속의 호랑이가 이 마을을 어슬렁거리던 중에 낮잠 자는 농부를 찾고 다가서려 했다. 그런데 사람 곁에 호랑이가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큰 ‘무엇’이 있었다.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은 호랑이는 하릴없이 숲으로 돌아갔다. 백수의 제왕을 주눅 들게 한 건 ‘금산 요광리 은행나무’였다. 천년 전부터 이 자리에서 살아온 나무는 율곡 이이의 글에도 등장할 만큼 널리 알려진 나무다. 높이 24m, 줄기둘레 13m에 이르는 이 나무는 긴 세월 동안 굵은 줄기 안쪽이 썩어 외과수술 처리로 보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