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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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헌법재판소의 ‘서울 재동 백송’ 소나무 종류 가운데 줄기 껍질에 흰 빛의 신비로운 얼룩 무늬를 지닌 나무가 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이다. 백송은 옮겨심기가 잘 안 되는 까탈스러운 나무여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나무에 속한다. 백송은 그래서 원산지인 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외교관이나 중국인과의 친밀한 교유관계를 가진 권세가들의 집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권세가들이 모여 살던 수도권에 오래된 백송이 집중돼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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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장마 뒤 꽃 피우는 선비의 나무 장맛비 지나고 삼복더위 다가오면 우윳빛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회화나무 꽃이다. 조선시대 학동들은 이 꽃을 보며 과거 시험 채비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또 나무의 생김새가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아예 ‘선비수’ ‘학자목’이라고 불렀다. 풍성하고 품위 있는 생김새를 자랑하는 나무이건만 우리나라의 회화나무 중에서 유난히 빈약한 몸으로 서 있는 회화나무가 있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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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선조의 뜻 어린 최고의 상수리나무 참나뭇과 가운데 그 열매인 도토리의 맛이 가장 좋다고 알려진 게 상수리나무다. 상수리나무는 굴참나무, 갈참나무 등 참나뭇과에 속하는 여느 나무와 마찬가지로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오래된 큰 나무를 찾기가 쉽지 않다. 2023년 현재 산림청 지정 보호수 약 1만2000건 가운데 상수리나무는 80건이 채 안 되고,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 지정한 문화재급의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참나뭇과의 나무를 땔감으로 베어내 쓰도록 권장한 조선시대의 소나무 보호정책에 따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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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전쟁의 참상 기억하는 ‘평화의 나무’ ‘호국보훈의달’이면 떠오르는 ‘작지만 큰 나무’가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과 북으로 나뉜 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 학살을 벌인 참극의 현장인 대전 중촌동 ‘대전감옥터’ 한쪽에 홀로 서 있는 왕버들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그때, 이 마을의 ‘대전감옥’을 지키던 남쪽의 군인들은 감옥에 투옥했던 좌익 인사들을 죄 없는 양민과 함께 무참히 학살하고 남쪽으로 떠났다. 무려 1800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대전 산내골 학살사건’이다. 이어 한·미 합동작전에 따른 인천상륙이 성공하자, 대전감옥을 점령했던 북쪽 군인들은 퇴각을 서두르며 수감했던 우익 인사를 학살해 앙갚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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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경관적 가치 품은 최고의 느릅나무 느티나무만큼 우리 민족의 삶에 깊이 스며든 나무는 없다. 산림청 보호수 1만1000여건 가운데 느티나무는 무려 6100여건이나 된다. 느티나무는 시무나무·비술나무·느릅나무와 함께 느릅나뭇과에 속한다. 당연히 느릅나무가 이들의 대표적인 나무다. 하지만 느릅나무 노거수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심지어 국가 지정 자연유산이나 지방기념물이 한 그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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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헤어진 아들 그리워하며 심은 나무 세상살이 부질없이 변해도 가족을 향한 애틋함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오래된 가족 이야기일수록 애틋함이 더 깊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효(孝)를 사회 이데올로기로 여기며 살던 옛 시대로부터 전하는 이야기는 더욱 그럴 수밖에. 경남 거창 남상면 무촌리 감악산 연수사(演水寺)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애틋한 그리움을 담고 서 있는 은행나무가 있다. 600년 넘게 살아온 ‘거창 연수사 은행나무’(사진)는 높이 38m, 가슴높이 줄기둘레 7m,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 펼침폭은 20m를 넘는다. 나무 높이가 38m라면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모든 은행나무를 통틀어 높이에 있어서 가장 큰 몇 그루의 나무에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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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탄신일쯤 꽃 피우는 ‘이순신 나무’ 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상스러운 봄, 대개의 경우 ‘충무공 탄신일’(4월28일) 즈음에 자잘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식물분류학의 이름은 ‘왕후박나무’이지만, 아예 ‘이순신 나무’(사진)라고 부르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가 그 나무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단항마을 앞 바닷가에 서 있는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용왕이 마을 어부에게 보내준 선물이다. 옛날 이 마을의 늙은 어부가 잡은 물고기의 배 속에 든 씨앗을 심어 키운 나무여서 그렇게 여겨왔다. 해마다 음력 3월10일이면 나무 앞에 모여 어부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리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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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조국 해방을 위해 백범이 심은 나무 1898년 인천감옥 탈옥에 성공한 열혈청년 김창수는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조국광복 투쟁을 이어갔다. 신고의 세월을 보내던 김구는 침략의 무리가 이 땅에서 물러가자 조국에 돌아왔다. 미완의 해방을 완성하기 위해 대중 활동을 시작한 김구는 중국에 가기 전에 3년 동안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했던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절집에서 하루 머무른 뒤 그는 조국의 완전한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절집 마당에 나무를 심었다. 지나온 일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무궁화 한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를 절집 마당에 심었다고 그는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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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사라진 절집의 자취 지켜온 큰 나무 사람 떠난 자리에 나무가 남는다. 아름다운 남도의 섬, 진도를 대표하는 노거수인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도 그렇다. 가뭇없이 사라진 사람살이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이룬 보금자리 한 귀퉁이를 버티고 서 있는 큰 나무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사진)’ 곁에는 구암사라는 절집이 있지만, 이 역시 새로 지은 절집이다. 구암사라는 이름은 절집 뒷산에 ‘비둘기 바위’ 혹은 한자로 ‘구암(鳩巖)’으로 부르는 큰 바위가 있어서 붙였고, 이 자리는 흔히 ‘상만사 터’라고 부른다. 마을 이름인 ‘상만리’에 기대어 ‘상만사’라는 절집이 있었을 것으로 본 때문이다. 이름조차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전에 사라진 절터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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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역사의 자취 아로새겨진 자연유산 충북 제천 송학면 무도리 서문마을에 들어서려면 먼저 마을 동쪽을 둘러싼 낮은 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려 패망의 역사를 담은 왕박산(王朴山)이다. 이곳으로 피신한 고려 왕족은 성을 박씨(朴氏)로 고치고 은둔했다. 왕족이 박씨로 성을 갈았다 해서 왕박씨, 그 뒷산을 왕박산이라고 불렀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전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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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천년고찰을 지킨 천년의 숲 동백나무 꽃 피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다. 제주도,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지역에서는 12월이면 피어나지만, 이제 겨우 꽃봉오리를 꿈틀거리며 피어날 채비를 마친 곳이 많다. 아무래도 우거진 동백나무숲에 들어 동백꽃의 진수를 느끼려면 삼월 중순이 지나야 한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나무숲으로는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숲(사진)’을 첫손에 꼽을 만하다. 백련사는 원묘(圓妙)국사 요세(了世·1163~1245)가 이끌었던 고려 후기의 신앙운동 결사체인 백련결사로부터 시작한 천년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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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명마를 추모하며 꽂아둔 채찍 경북 청송 안덕면 명당리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용맹하게 물리친 임씨 성의 명장이 있었다. 승마의 달인이었던 그가 타는 말은 천리 만리를 달리고도 지치지 않는 명마로, 거침없이 전쟁터를 달리며 왜적들 사이를 누볐다. 말을 타고 달리는 임 장군의 모습이 하도 강렬해서 왜적들은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고 한다. 그러나 장군의 말도 전쟁 중에 왜적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임 장군은 말의 무덤을 짓고, 용맹한 말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이 무덤을 사람들은 ‘마능지’라고 불렀다. 장군은 또 말 무덤인 마능지 앞에 말과의 소통을 이어주던 채찍을 꽂으며 말의 죽음을 추모했다. 놀랍게도 그 채찍이 얼마 뒤에 살아나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