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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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미국 공정위원장 된 ‘아마존 저격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는 미국의 ‘하우스리스’들을 다룬 영화다. 2008년 금융위기로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하게 되자 집을 팔고 캠핑카 등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매드(유랑민)들이 생겨났다. 저널리스트인 제시카 브루더가 이들을 3년간 밀착 취재해 쓴 르포가 원작인 <노매드랜드>는 살던 도시가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유랑인이 된 노년 여성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일상을 그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매드들은 중·노년이 대부분이다. 평생 일했지만 금융위기로 집을 날린 뒤 퇴직연금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캠핑카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정처없이 떠돌다 추수감사절 즈음 유통기업 아마존에서 모집하는 ‘캠퍼포스’에 응모해 생활비를 번다. 아마존은 쇼핑 시즌 일할 임시 노동자들을 모집하는데 노매드들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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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대중 외교에 대한 ‘거친 생각’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처럼 보수, 진보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보수는 공동성명에서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언급하며 중국 견제에 발을 들였다고 보고 점수를 줬을 테고, 진보는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대한 미국 지지가 확인된 것에 주목했다. 중국이 ‘견제’로 간주할 만한 내용이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이 대중 외교의 변화로 비칠 만했지만 국내의 우려는 크지 않았다. 대만·남중국해를 언급했으나 중국을 지칭하지 않았고, 정부가 한·중관계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압적인 전임 대통령과 딴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의 능란한 환대가 한국을 저항감 없이 미국 쪽으로 한발짝 끌어당긴 면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에 누적돼온 ‘중국 피로증’이 여론 지형을 바꿔놓은 것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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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한·일 정상회담 불발 국가 정상 간의 외교는 만나서 어떤 협의를 했는지가 우선이지만, 어떤 형식으로 만났는지도 중요하다. 국가를 대표하는 정상이 상대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국가 위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의전상 결례라도 생기면 회담의 성과도 퇴색한다. 외국 정상의 방문은 국빈방문, 공식방문, 실무방문 등으로 나뉜다. 국빈방문에는 의전상 최고 예우가 수반된다. 외교부의 규정을 보면 국빈이 도착하는 공항에 장관이나 차관급 인사가 나가 영접하고 의장대가 21발의 예포를 발사한다. 청와대의 공식환영식과 대통령 연회는 물론 협의에 따라 국회 연설 기회도 부여된다. 거리의 가로기 게양, 경호 사이드카의 수도 세세한 지침이 있다. 음식 기호를 챙기는 것은 기본이다. 2002년 2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김대중 대통령 주최 오찬에서는 샴페인, 레드와인과 함께 사과주스와 포도주스가 준비됐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부시를 위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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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교황청의 ‘코레아누스’ 장관 세계 가톨릭교회를 통솔하는 교황청의 문헌에 조선이 등장한 것은 1660년이었다. 중국에 관심이 컸던 교황 알렉산더 7세는 난징대목구(南京代牧區)를 설치하면서 조선을 그 관할에 포함시켰다. 120여년이 지난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첫 천주교 신자가 됐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평신도에 의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고, 모진 박해와 순교 속에 성장한 한국 천주교 230여 성상(星霜)은 언제 봐도 경이롭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년을 맞은 올해 ‘코레아누스(Coreanus·라틴어로 한국인)’ 최초의 교황청 장관이 등장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유흥식 라자로 대주교(70)를 임명한 것이다. 파격을 거듭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사 가운데서도 파격으로 꼽힌다. 유 대주교가 취임할 성직자성은 전 세계 50만명에 달하는 사제와 부제의 직무·생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한다. 가톨릭교회 운영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만큼 이탈리아 추기경들이 독식해온 자리에 유 대주교를 임명했으니 교황의 ‘빅픽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교황의 북한 방문이다. 대북지원 사업을 맡아 4차례 방북한 바 있는 유 대주교가 교황청과 한국, 북한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을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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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북한의 노동당 규약 개정 ‘우리의 람홍색 깃발 창공높이 날릴 제’로 시작하는 북한 노래 ‘우리의 국기’는 2019년 보급됐다. 이 노래는 북한의 제8차 당대회 기간인 지난 1월14일 열병식의 국기 게양식에서도 연주됐다. 당이 국가를 이끄는 북한의 당대회에 조선노동당 깃발이 아닌 국기가 게양되고, 국기를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장면은 낯설다. ‘국가’를 앞세우는 것은 김정은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북한은 지난 4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명칭을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으로 바꿨다. 최고지도자를 체제와 동일시하면서 단체 등의 명칭에 김일성 부자 이름을 넣는 관행에서 벗어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8차 당대회에서 ‘우리국가 제일주의시대’를 공식 선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의 ‘우리민족 제일주의’에서 민족을 빼고 국가를 넣은 것이다. 이런 변화가 남북관계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북한이 ‘투 코리아’ 노선으로 전환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2016년 7차 당대회에서 통일이 “가장 중대하고 절박한 과업”이라던 김정은이 8차 당대회에서 “통일의 꿈은 더 아득히 멀어졌다”고 한 것은 이런 관측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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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보수야당이 띄운 ‘사상의 시장개방’ 국민의힘의 4·7 재·보선 승리에 대해서는 ‘이제 표를 줘도 될 만한 당이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그럴듯하다. 여권에 아무리 실망했더라도 극우와 손잡은 황교안 대표의 자유한국당이었다면 표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들이 주위에 꽤 있다. 지난해 총선 이후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행보가 당의 이미지를 중화(中和)시켰는데 그중 5·18묘지 앞 ‘무릎사죄’가 컸다. 한여름 뙤약볕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80대 노정객의 모습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역사적 사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의힘을 일으켜 세우기엔 족했다. 그가 떠났으니 ‘도로한국당’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요즘 그 당의 움직임을 보면 ‘글쎄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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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최종단계’를 왜 미리 걱정하나 미·중 갈등 정세를 놓고 보수성향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한국도 이제 미국 쪽에 확실히 서야 할 때 아닌가. 균형외교도 좋지만 종국에는 미국과 함께 가는 게 맞지, 중국과 함께 갈 수 있나?” 그의 말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갈등의 최종단계(end state)를 미리 당겨와 당장 양자택일하라는 태도에는 위화감이 들었다. 보수논객들은 미·중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으니 균형외교를 그만 접으라고 한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미국의 중국 견제에 맞장구치자 ‘거봐라’며 한·미 동맹의 완전 복원을 외친다. 지금의 한·미관계가 복원이 필요할 만큼 손상됐다는 것인지, 문재인 정부가 ‘반미 행각’이라도 벌였다는 건지 요령부득이다. ‘퍼줬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올려주고, 미국산 무기를 뭉텅이로 사들이는 문재인 정부가 어째서 반미인가. 미국이 공식 요청하지도 않은 쿼드(Quad)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친중’ 발언을 했다고 반미로 몰아붙이는 것도 부적절하다. 문재인 정부가 ‘친북’이니 ‘친중’이니 해도 한국은 이미 미국의 동북아 전략체제에 깊숙이 편입돼 있다. 딛고 선 지반 자체가 미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균형외교’라기보다 ‘현상유지 외교’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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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올림픽 보이콧 박정희의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1979년은 국제적으로도 격동의 해였다. 중동 최대의 친미 국가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이슬람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졌다. 이란 혁명의 파장은 동쪽 아프가니스탄으로도 번져 무장 게릴라 무자헤딘이 ‘좌파 세속주의’를 강요하는 소련에 맞서 봉기했다. 친소 정권이 위태로워지자 소련군은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24일 새벽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었다.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혼미해진 중동 정세는 우유부단하던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을 강경파로 돌려놨다. 카터는 소련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1980년 모스크바 하계올림픽에 불참하겠다고 경고했다. 1980년 3월21일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카터는 보이콧을 확정했다. 동맹인 한국, 일본과 서방 국가들이 뒤를 따랐고, 1960년대 소련과 국경분쟁을 겪은 중국도 불참했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국제올림픽위원회 147개 회원국 중 80개국만 참가하는 반쪽 대회가 됐다. 여파는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하계올림픽에까지 미쳤다. 선수단 안전보장 문제를 빌미로 소련과 동구권 15개국이 대회에 불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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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존엄을 지키는 한·일 화해 방안 2+2 회담차 한국을 찾은 미국 국무·국방장관이 청와대를 예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들에게 “한·일관계 복원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11년 만에 미국 주요 장관들이 방한한 진짜 목적이 한·일관계 복원임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위해 구축 중인 다자 연대에서 가장 약한 고리를 주요 장관들의 첫 순방지로 정했다는 분석대로다. 며칠 뒤 서욱 국방장관도 “한·일 안보협력이 가치 있는 자산”이라고 했다. 한·일의 불화가 북한 위협보다 더 걱정이라던 바이든 행정부로선 흐뭇해할 만한 상황 전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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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불황형 가계 흑자 1990년대 경제 거품이 빠지면서 장기불황의 초입에 들어선 일본에서는 기업들의 가격파괴 경쟁이 치열해졌다. ‘게키야스(激安·매우 쌈)’ ‘고쿠야스(極安·극도로 쌈)’ 표시 상품들이 진열대를 메우기 시작했다. 일본 맥도널드는 1998년 130엔이던 햄버거 가격을 반값인 65엔으로 내렸다. 과도한 할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판매량이 1년 전의 10배에 달할 정도로 대박을 쳤다. 100엔숍, 저가 의류업체 유니클로, 규동(소고기덮밥) 체인 요시노야(吉野屋)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들이다. 요시노야가 후발업체 스키야, 마쓰야와 벌인 할인경쟁은 ‘규동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덮밥 가격이 180엔(약 1870원)까지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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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포털 종합상사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던 1974년 일본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1911~2007) 이토추(伊藤忠)상사 회장이 방한해 이낙선 상공부 장관에게 ‘한국에서의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계획서’를 건넸다. 중소 섬유수출업체 이토추상사를 세계적인 종합상사로 성장시켜 ‘전설의 상사맨’으로 통하는 세지마는 한국이 ‘수출입국(立國)’을 하려면 종합상사를 만들라고 조언했다. 이듬해 정부는 상공부 고시로 종합상사 제도를 도입하고 대우실업, 삼성물산, 쌍용, 국제상사 등 7개사를 지정했다. 한국 종합상사의 역사는 곧 수출의 역사이다. 종합상사들은 정부의 각종 세제·금융 혜택을 받으며 빠르게 수출 주역으로 자리잡았다. 종합상사를 통한 한국의 수출비중은 1999년 51%에 달했다. 전체 수출액의 절반을 종합상사가 책임졌던 것이다. ‘사막에서 담요를 팔고, 북극에서 냉장고를 판다’는 상사맨들 무용담이 회자됐다. 통행금지 단속에 걸려도 “내일 아침 바이어를 만나야 한다”고 하면 풀려날 정도로 존중도 받았다. 출국이 어려운 시기 해외를 제집 드나들 듯하니 우수 인재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사맨은 어학과 무역지식은 기본이고, 기획력, 순발력, 협상력, 도전정신이 두루 필요한 고난도 직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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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헬조선’과 ‘국뽕’을 넘어서려면 1980년대 중반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신식국독자’(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식반’(식민지반봉건사회)인가를 둘러싼 논전이 대학가를 달궜다. 어떤 쪽이건 한국 경제가 대외종속적이고 전근대성을 면치 못하니 변혁이 필요하다는 인식론이었다. 하지만 당시 경제는 1970년대 말 불황과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를 딛고 재도약하던 참이었다. 이론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경제가 역동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으나 경제 볼륨과 역량을 키우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노동은 물론 자본도 통제하는 총력전 방식으로 ‘원시적 축적’을 꾀했다. 박정희식 국가자본주의가 막을 내린 것은 1997년 외환위기다. 김대중은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의 대가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수입하는 대신 정보기술(IT) 인프라 확충과 대중문화 개방 정책으로 다음 세대를 예비했다. 노무현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며 개방형 통상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종속이론의 실례로 꼽히던 한국은 이런 ‘좌우합작’을 통해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 국가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