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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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단도직입 “대북 강경책 펴다 북·일 접근 땐 한국 소외…미·일 일변도 벗어나야”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도호쿠(東北)대, 국민대를 거쳐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후 일본의 정치와 외교를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문맥에서 추적·분석하고,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와 평화운동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 등 한·일관계 현안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왔다.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제자다. 저서로는 <기지국가의 탄생-일본이 치른 한국전쟁> <아베 시대 일본의 정치와 외교-보수정치가 주도하는 국가혁신> 등이 있다. -
여적 궈차오(國潮)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제품들이 중국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847년 상하이에서는 외국 상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양행(洋行)들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24개국과 거래하고 있었다. 1890년대 들어선 상하이의 거의 모든 백화점이 양화(洋貨·외국 상품)를 판매했고, 1917년 상하이 난징루에 들어선 백화점들은 외국 상품만을 취급했다. 1890년대부터 진출한 일본 자본은 고무신 등 소비품은 물론 기계, 방직업 등으로도 진출하며 중국 경제를 잠식해갔다. -
여적 은하로 떠난 마쓰모토 레이지 마쓰모토 레이지(1938~2023)가 만화가의 꿈을 안고 도쿄로 상경한 것은 19세가 되던 1957년. 고속철도 신칸센이 없었던 당시 그가 살던 일본 규슈에서 도쿄까지는 열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그의 대표작 <은하철도999> 주인공 철이가 탄 것과 같은 구식 좌석에 앉아 흥분에 휩싸인 채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떠올렸을 것이다. -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한국 경제 위기는 대전환의 기회…공공정책이 혁신 뒷받침해야”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노트르담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일본 리쓰메이칸대를 거쳐 1998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개혁적 시각에서 한국 경제의 발전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으며 경제 성장, 소득 분배, 경제 민주화 등 분야에서 정책 대안을 제시해 왔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금융행정혁신위원회, 생활방역위원회 등에서 정책 자문을 했다. 2019년 발표한 ‘전환적 뉴딜’ 보고서가 ‘한국판 뉴딜’ 정책의 밑거름으로 평가받아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유종일의 진보 경제학> <경제119> <위기의 경제> <경제 민주화가 희망이다> 등이 있다. -
여적 키리바시의 한국인 유해 적도 근처 태평양에 산호초로 이루어진 타라와섬.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서서히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키리바시공화국의 수도다. 80년 전 ‘철의 폭풍’이 타라와섬에 몰아쳤다. 1943년 11월 일본군이 장악한 섬에 미군이 상륙을 시도하면서 벌어진 ‘타라와 전투’다. 과달카날 해전 승리로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잡은 미군은 태평양의 일본군 전략거점을 하나씩 탈환한 뒤 일본 본토로 북진한다는 구상 아래 타라와섬에 3만5000명을 투입했다. 함포사격과 함재기 공습으로 주력을 파괴한 뒤 해병대를 상륙시키면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전투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수천명이 희생됐다. -
여적 횡재세 ‘횡재세’는 이미 100년 전부터 주요국들에서 시행돼왔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전시이윤 원리’를 환수해 전비 조달에 기여토록 하는 횡재세를 도입했다. 미국에서도 1917년 ‘수익률 8%’를 초과하는 자산소득에 최고 80%까지 세금을 물렸다. 영국은 1997년에도 공공부문 민영화 과정에서 발생한 시세차익을 환수하기 위해 횡재세를 도입했다. 일본도 2004년 미국계 펀드 리플우드가 공적자금 370억달러가 투입된 신세이은행 주식을 사고팔아 막대한 차익을 거두고도 세금 한 푼 내지 않게 되자 횡재세인 ‘신세이(新生) 조항’을 마련했다. -
여적 43년 만의 참배 5·18 이듬해 입학한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매주 한차례 성경수업을 담당하는 전도사 선생님은 어깨가 떡 벌어진 특전사 출신이었다. 5월 어느날 수업 도중 불쑥 광주 이야기를 꺼냈다. 5·18 당시 진압군으로 광주에서 겪은 경험담이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쩔 수 없이 총을 쏴야 했다”며 미간을 일그러뜨리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다. -
여적 ‘평양 폭격’ 사진 공개 한국전쟁 시기 미군 공중폭격에 대해서는 민간지역 폭격을 부정하는 주장과 초기부터 무차별 폭격이 이뤄졌다는 주장이 맞서왔다. 한국전쟁 연구자 김태우는 두 ‘신화’를 벗겨내기 위해 미 국립문서보관소와 미공군역사연구실 문서 10만장을 뒤졌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미 공군 조종사의 ‘일일임무보고서’였다. 일일임무보고서는 미군 지도부에 의해 검열되지 않은 1차 사료여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였다.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창비)으로 2013년 출간된 연구에 따르면 미군은 전쟁 초기 군사목표에 한정한 ‘정밀폭격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전폭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목표지역에서 정찰 후 폭격을 수행하기 어려웠고, 전폭기를 안내하는 전술항공시스템은 불안정했다. 조종사들은 단시간 내에 육감과 우연, 자의적 판단에 의해 표적을 식별·공격해야만 했다. 오폭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
여적 자문단 공화국 참여정부는 ‘위원회 공화국’으로 불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위원회에 힘을 실으면서 김대중 정부 때보다 60%가 많은 579개 위원회가 만들어지자 나온 비판이다. 그러나 위원회 숫자는 진보·보수 정부 간에 큰 차이가 없었다. 이명박 정부가 초기에 431개까지 줄였으나 말기에 505개로 늘어났고, 박근혜 정부 때는 554개 위원회가 활동했다. 문재인 정부 때는 좀 더 늘어난 622개였다. 정부 위원회는 정책 결정에서 전문성 보완과 사회적 합의 도출을 목적으로 한다. 의견수렴이 지연되거나 행정 독주를 추인하는 부작용도 없지 않지만 공정성 확보, 이해관계 조정 등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위원회는 ‘행정 민주화’의 지표이기도 한 셈이다. -
여적 ‘35층 룰’의 퇴장 중세 서양에선 교회의 첨탑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15세기 벨기에의 세속도시 브뤼헤에서 옷감 제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높이 108m 종탑이 인근 성 도나투스 대성당보다 높았던 게 유일한 예외다. 도시에 종교건물보다 높은 세속건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데는 그 이후로 4세기가 더 걸렸다. 19세기 후반 철골공법 도입과 엘리베이터 개량이 이뤄지며 마천루 시대가 열렸다. 미국 뉴욕의 수리공이던 엘리샤 오티스가 안전 브레이크를 도입한 엘리베이터를 1853년 세계박람회에서 선보인 것을 계기로 고층빌딩 건축 열풍이 불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극적으로 변모했다. 크라이슬러빌딩,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등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상징하며 개발도상국들의 본보기가 됐다. 한국은 그 대열의 선두에 섰다. -
여적 학현학파 경제학은 부(富)와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현실과 유리된다. 주류 경제학은 부에 치우쳐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사람들이 경제학에서 멀어지는 이유다. 그 역시 경제학자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의 비판이 통렬하다. “경제학은 일반인이 이 분야를 들여다보는 것을 꺼리게 만들어 영역보존을 하는 데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둔 학문이다.” -
여적 4·3과 미국 1948년 ‘제주 4·3’이 격화되자 미군정은 4월17일 모슬포에 주둔 중인 국방경비대 9연대에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우익단체인 서북청년회와 경찰의 도민 탄압이 사태의 도화선이라 보고,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김 중령은 4월28일 남로당 제주위원회 조직부장이자 무장대 군사총책 김달삼과 만나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뤄지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는 ‘평화협정’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