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의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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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주한미군 감축, 피할 이유 없다 전임 대통령 윤석열의 불법계엄으로 초래된 외교공백기에 한반도 안보와 관련한 여러 논의들이 미·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리더십 궐위 상태인 한국은 체스판의 말 신세였고, 한국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듯한 수사들이 난무했다. 일본의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지난 4월 한반도 해역과 동·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쟁구역으로 보고, 모두 힘을 합쳐 중국에 맞서자는 ‘원 시어터(One Theater·하나의 전역)’ 아이디어를 내놨다. 표현이 자극적이란 지적이 있자 인도·태평양 해역을 하나로 간주해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이 협력을 강화하자는 ‘오션(OCEAN)’으로 수정했지만, ‘한국과 대만을 인계철선으로 묶자’는 핵심은 그대로다. 폭탄과 연결돼 건드리면 터지는 철선처럼 대만해협에서 충돌이 벌어지면 한국도 자동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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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그날의 마음들 KBS가 지난 2월부터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라는 영상물을 공개하고 있다. 비상계엄이 내려진 지난해 12월3일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증언을 담은 영상물로, 그날의 마음들이 드러난다. 이재승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국회 출입구에 잠시 틈이 열려 현장에 함께 있던 낯모르는 7~8명과 국회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국회 본청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인생 전체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딸들에게 잘못한 일도 떠오르고, 대학 다닐 때 비겁했던 일도 떠올랐다고 한다. ‘주마등’은 주로 죽음의 위기를 자각한 뇌의 작용에 의해 과거의 일들이 순식간에 재생되는 현상을 형용할 때 쓰인다. 그 심야에 군인들과의 충돌이 뻔히 예상되던 국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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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WTO 체제의 종언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교역 진흥을 위해 창설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한국이 정식 가입한 것은 1967년이지만, 실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GATT 가입이 추진된 바 있다. 박노형·정명현의 연구에 따르면 1950년 9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GATT 회원국(체약국) 회의에 주영공사가 참석했고, 약소국인 한국이 유리한 조건으로 GATT에 가입하는 데 회원국 3분의 2가 동의했다. 그러나 전시 상황으로 인해 의정서 서명을 몇차례 연기한 끝에 가입이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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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한·미 동맹 ‘중독’에서 벗어날 시기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에 지정한 배경과 관련해 조지프 윤 주한 미국대사대리는 한국인들이 로스앨러모스, 아르곤 등 미국 국책 연구소에서 반출해선 안 되는 자료를 빼내려던 사건들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원폭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는 아르곤과 함께 핵개발 및 원자력 기술 개발의 핵심 연구소다. 이들 연구소가 핵·원자력 외에도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있고, 어떤 이가 무슨 자료를 빼냈는지 공개되지 않아 ‘사안의 민감도’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민간인의 일탈행위에서 비롯된 단순 보안사고 때문에 미국이 오랜 동맹국을 ‘불량국가’로 분류했을 것 같진 않다. ‘큰 문제(big deal)’가 아니라는 조지프 윤의 외교적 수사 뒤에 가려진 배경과 맥락을 더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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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계엄이 정당화한 ‘적대적 두 국가론’ 12·3 비상계엄 시기 소집된 HID(북파공작원) 요원들에게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을 체포·심문하는 것 외에 어떤 임무가 부여됐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정보사가 구입한 북한군복 170벌 용도도 분명치 않다. HID 동원 총책인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 메모 조각들을 맞춰보면 정치·노동·종교·법조·언론계 ‘문제 인사’들을 체포한 뒤 배에 태워 북방한계선(NLL) 근처 해상에서 선박째 폭파시키는 그림이 그려진다. 노상원은 2016년 대북 임무를 마친 요원들에게 원격 폭탄조끼를 입혀 귀환 전 폭사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한군으로 위장한 HID 요원들에게 ‘반윤 인사’들을 처리토록 한 뒤 요원들까지 제거해 증거를 없앤 다음 이를 북한 소행으로 모는 ‘북풍공작’을 시도했을 것이란 극단적 추론도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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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한남동의 ‘키세스 시민들’ 지난 4일 밤 서울 한남동 관저 앞 도로. 자정 가까운 시각에도 많은 이들이 도로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대에 올라온 참가자들 연설에 귀 기울이며 구호를 외치거나 응원봉을 흔들었다. 노숙 채비를 든든히 한 듯 두툼한 깔개들이 보였고, 대열을 오가며 도시락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도 눈에 띄었다. 일행과 무대 가까이 비어 있는 곳에 자리 잡자 집회장을 떠나는 이가 은박담요를 건네줬다. ‘수고하라’ ‘이제부터 내가 지킨다’는 무언의 바통터치가 곳곳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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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로제의 눈물 대중문화 예술인들은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다. 악플이나 루머의 표적이 되기 쉽고 얼굴이 알려져 사생활에도 제약이 많다. 대중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가 늘 충돌하면서 내면의 갈등도 극심하다. 100점이나 정답이 없는 예술 세계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하기 어렵고, 그런 탓에 대중들의 비판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K팝 아이돌에서 글로벌 아티스트로 성장한 로제가 미국 뉴욕타임스와 최근 한 인터뷰는 화려한 조명의 사각지대에 꾹꾹 감춰진 아티스트들의 고단한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35분 분량의 팟캐스트로 지난 23일 공개된 인터뷰에서 로제는 아침 9시반 기상해 새벽 2시까지 보컬·댄스, 어학 훈련이 반복되는 연습생 과정이 얼마나 혹독한지 외부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낙담할 때도 있었지만, 호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실패한 과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결국 “살아남았다”고 했다. 데뷔 초기 몇해가 어려웠지만 “실은 아직도 힘들다”며 이런 감정은 아마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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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대격차 시대 만든 윤석열의 ‘양극화 해소 쇼’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후반 국정 목표로 ‘양극화 해소’를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직접 개입을 해서라도 임기 후반기에는 소득·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해 전향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서민·청년·중소기업을 지원할 정책 리스트를 만들고 있고, 국회 예산안 심사에서 여야의 양극화 관련 사업을 수용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느닷없는 태세전환이다. 2년 반 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국민살림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몰랐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 정도로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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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이시바의 ‘26일 천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뒤 미군정 지배를 받다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다음날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다. 국권 회복과 동시에 미국의 ‘기지국가’가 된 일본이 외교안보에서 미국이 그어둔 선을 넘는 일은 드물었다. 그 선을 넘다 몰락한 대표적 인물이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다. 1970년대 초 미·중 데탕트가 무르익자 다나카 총리는 미국보다 7년 앞선 1972년 중국과 깜짝 수교를 단행했다. 미국은 일본의 ‘추월’이 괘씸했다. 다나카는 내친걸음으로 시베리아 유전 개발을 목적으로 소련에 접근했다. 다나카의 ‘자원외교’는 동서 대립이라는 냉전질서를 훼손하는 것이어서 또 다시 미국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결국 미국 록히드 항공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기세가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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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통일은 평화의 반대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나기 무섭게 38선으로 분단된 뒤 남북은 각자의 근대 국민국가를 세웠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국민’이 될 기회도, 유일한 통치기구가 일정한 영토를 통제하며 물질적 복리를 제공하는 단일 ‘국가’의 경험도 남북 주민들은 갖지 못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언어와 출판문화를 공유함으로써 국민의 집단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봤지만, 분단 이후 남북 주민들은 같은 신문·잡지와 방송을 접할 수 없었다. 같은 한글을 쓰되, 그에 담긴 사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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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한·일 ‘아베 유훈 체제’의 등장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지난주 서울 방문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강제동원 배상 제3자 변제를 시작으로 ‘아낌없이’ 내줬지만 기시다는 물컵의 ‘나머지 반’을 채우지 않은 채 돌아갔다. 이는 2019년 7월 아베 신조 총리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한·일 역사전쟁이 한국의 굴복으로 일단락된 것이자, 다시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아베 독트린’이 관철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승패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과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사 문제에선 ‘제로섬’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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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동 칼럼 사도광산, ‘위생처리’되는 역사 지난달 20일 독일 베를린 국방부 청사에서는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총통 암살을 기도했다가 희생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에 대한 독일 정부 추모식이 열렸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숄츠 총리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의인들을 기렸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2008)로도 알려진 사건은 프로이센 귀족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크라이사우 서클’이 주도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20일 히틀러가 작전을 주재하던 회의실에 폭탄이 든 가방을 두고 나온다. 폭발을 확인한 뒤 공모자들과 쿠데타 계획(발키리 작전)을 실행했지만, 부상에 그친 히틀러 측 반격으로 그날 밤 붙잡혀 즉결 처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