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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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 후대는 엉망진창 우당탕쿵탕 흘러가는 이 사태를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일단 ‘민희진 기자회견’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내용과 형식 간 모순이 압도적이다. 요컨대 기자회견이라면서 기자들이 한 일이 별로 없다. 있었다면 민희진 대표의 비상하고도 비장한 말하기에 추임새를 넣어 준 일이다. 돌이켜 보면 기자가 아닌 다른 누가 말을 거들었어도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이라니, 이런 당착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실은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역대급 드라마가 펼쳐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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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다음 국회는 방통심의위를 개혁해야 애쓰모글루의 <권력과 진보>를 읽다보면 ‘전망 과두체’란 개념을 만난다.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유사한 배경과 세계관, 그리고 열정을 지녔지만, 비슷한 맹점을 공유하는 기술 지도자 집단을 뜻한다. 이 책의 요점이 기술이란 곧 제도요, 따라서 제도적 설계를 뒷받침하는 전망과 경쟁 담론들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니 전망 과두체를 ‘제도의 전망을 공유하는 지도자들’로 확장해서 이해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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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세기의 판결이 될까, 그저 혼란일까 지금 미국 연방대법원에 수정헌법 제1조 관련 재판이 하나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인터넷 담론 지형을 뒤흔드는 세기의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가 자기 사이트에서 ‘내용중재(content moderation)’하는 행위를 헌법적 권리로 보아 과도한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플랫폼 사업자가 자기 사이트에서 특정 내용물을 삭제하거나 재배열하는 행위는 일종의 ‘사적 검열’이기에 규제해야 마땅하다는 텍사스와 플로리다의 새 법을 합헌이라고 판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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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언론에 대한 고민에 초대한다 옌푸는 1896년 <천연론(Evolution and Ethics)>을 번역하며 영어의 ‘롸잇스(rights)’를 권리로 옮겼지만 불만이었다. 권리의 한자 權과 利 어디에도 ‘정당하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정당함은 直이니 권리를 민직이나 천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현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모른 채 권리를 말한다. 진관타오와 류칭펑이 지적했듯이, 그래서 동아시아에 개인의 자율성에 근거한 정당성이 취약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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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명예훼손 형사처벌 조항을 개혁하자 새해를 맞아 그래도 이것 한 가지만이라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싶어 다시 말을 꺼낸다. 2022년 4월 유엔 인권위가 채택한 ‘디지털시대 매체자유와 언론인 안전강화’ 보고서의 권고사항이기도 하다. 제발 공직자 비리에 대한 언론의 의혹제기를 명예훼손을 이유로 형사처벌하는 우리 법제도를 개혁하자. 요점을 분명히 하려니, 뉴스타파 2022년 3월6일자 ‘김만배 음성파일’ 보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보도와 뉴스타파가 사후 공개한 신학림 원본 녹음파일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어째서 이 보도가 논란인지 알 수 있다. 애초에 믿을 만한지 알 수 없는 김만배의 주장을 ‘그 주장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나 ‘사안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갖춘 제3자’의 확인도 없이 이리저리 잘라서 공개한 게 문제다. 뉴스타파는 윤석열 캠프, 박영수, 조우형, 박모 검사 등에게 확인을 구했지만, 박영수 측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문자 이외에 어떤 응답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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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이 황량한 방송정책은 장차 무엇이 될까 폭풍전야 텅 빈 거리에 선 느낌이다. 지난 10년간 두 차례 정권변화를 겪으면서도 뭐 하나 잘된 것 없던 이 나라 방송정책이 갑자기 권력공백의 교차로에 팽개쳐진 모습이다. 대통령은 야당이 추진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국회로 돌려보냈고, 임박한 탄핵소추를 앞두고 방송통신위원장은 민활히 사퇴했다. 이 황량하고 적막한 오늘의 방송정책은 장차 무엇이 될까. 지금까지 누구도 겪지 못했던 새로운 수준의 나락을 예고하는 적막함인가, 아니면 어떤 극적인 반전을 앞둔 황량함인가. 흥해도 좋고 망해도 좋으니 (망해야 그나마 새롭게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구나), 다음 이 길만 피하면 좋겠다. 대통령은 더도 덜도 아닌 제2의 이동관을 찾아서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지명하고, 야권은 정부·여당이 수용하지 않을 게 자명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공들여 제시하고, 여야 모두 내년 총선을 계기로 새롭게 기회를 보자고 다짐하며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길 말이다. 이 길은 그냥 망하는 쪽보다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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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훌륭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마음 김민재가 거인들 사이에서 몸싸움하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그가 공을 처리할 때마다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며 탄성이 나온다. 음바페와 연결을 주고받는 이강인의 볼 간수 능력에 감탄하다 보면 매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강인이 국내에서 계속 공을 찼어도 저렇게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세계 수준의 훌륭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냉정히 우리 현실을 돌아보자. 왜 우리는 어떤 분야에선 세계적인데 다른 분야에선 세계 중간에도 못 미칠까. 이 질문에 대한 참된 답변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한국사회 불균등발전 테제’라 부르자. 내가 일단 답답한 까닭은 누군가 이미 그 테제를 제시했음에도 우리가 못 알아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진짜 속 터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가 테제를 얻더라도 어쩐지 그 답변을 거부한 채 그저 살던 대로 살겠다고 우기는 자들이 많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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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명예훼손 소송의 나라 이 나라 사람들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정치를 한다. 담론 정치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온전히 말을 통해 정당한 권력을 형성할 만한 능력이 없는 자들이 정치를 하다 보니, 명예훼손 형사처벌 제도를 이용해서 상대방 입을 틀어막는 일을 능사로 안다. 명예롭지 못한 국회의원들은 서로 명예를 지키겠다며 동료를 고발한다.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언론을 고발하는 자도 있다. 제 일이 아니어도 고발을 일삼는다. 진실이라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발언이어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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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홍범도, 이것은 역사논쟁이 아니다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은 결국 역사논쟁이 아니라 역사를 재료로 삼은 정치투쟁이다. 논쟁 와중에 어디에도 새로 발견한 사료를 보니 이렇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이가 없다. 과거 자료를 다시 검토해보니 이런저런 해석이 가능하다거나, 아니면 대립하는 해석적 관점들 중에서 한쪽이 이런저런 이유로 타당하다는 주장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홍범도가 누구를 왜 만났고, 무슨 당적을 지녔냐는 이야기 끝에 흉상 이전을 말하는데, 시민은 어린 육사 생도들과 함께 갑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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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서로 싸우지 좀 말자 여름휴가 어디 다녀오셨냐고 묻는 분들께 이렇게 답한다. “아세모글루의 신작 <권력과 진보>요. 어떤 번역에는 애쓰모글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든 <권력과 진보>라니 무슨 진보정당 집권플랜처럼 들리지만, 실은 기술의 발전 경로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책이랍니다.” 그렇다. 휴가는 짧고, 각자 읽다만 책들도 있겠지만, 지금 <권력과 진보>를 함께 읽고 싶다. 휴가철을 맞아 관행적으로 대통령실이 내놓았던 독서목록조차 기대할 수 없게 돼버린 마당에, 우리라도 읽고 또 읽어서 이 어지러운 세상에 혼란을 덜어보자는 심정으로 권유한다. 특히 챗GPT가 어쨌고, 인공지능(AI)이 저쨌다고 외치는 선무당 같은 책들은 버리고, 테크주냐 소재주냐 떠들어대는 약장수 책들도 치우고 일단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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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바다 건너서 벌어지는 일들 학생 시절 ‘어퍼머티브 액션’을 우리말로 뭐라 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소수집단을 위한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 정도로 옮기면 뜻이야 통하겠지만, 이는 정치적 함축과 정책적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해석적 개념을 나열한 번역이기에 낙제점을 면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의미의 밀도와 외연성에 있어서 어퍼메이션과 유사한 울림을 갖는 우리말을 찾으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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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수신료 제도를 놓고 공론조사를 하자 한국방송공사(KBS)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는 정부가 추진하는 수신료 분리 징수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져 당장 방송사 수입이 격감하리란 전망에 한정되지 않는다. 공영방송 제도가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게 ‘공중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태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진정한 위기가 있다. 이 땅에서 공영방송은 사소해지는 수준을 넘어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존재로 전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