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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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잘 돌아가는 집구석 세상에 믿을 게 하나 없다는 불평을 듣다보니 나도 지친다. 그래서 철지난 이야기를 꺼내 본다. 지난 대선에서 지상파 출구조사 팀이 0.6% 차이로 당선자를 예측한 이야기다. 당선자가 아닌 후보들에게 투표한 나머지 51%에게는 섭섭한 결과였지만, 출구조사와 개표결과를 맞춰본 시민은 그래도 뭔가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가 하나는 있다는 걸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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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국회는 시청각매체법을 논의하라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정말 늦은 것이다. 그러니 변명하지 말고 서둘러야 한다. 마음만은 진정했다는 말이 가장 진정하지 않게 들린다. 그러므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국회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포함한 시청각매체 규제개혁을 위한 입법에 나서라. 공영방송을 떠올리면 매체정책 전문가는 물론 일반 시민도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한다. 임박한 정권교체를 계기로 공영방송의 성과를 놓고 또 한바탕 정치적 논란이 벌어질까봐 그런 것만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근본적인 변화 없이 지속할 듯 보이는 공영방송 제도와 실천이 한심하다. 어느덧 공영방송은 누가 집권해도 달라질 게 없고, 누가 경영해도 기대할 게 없고, 결국 시민의 관점에서 보면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제도로 쇠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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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여론조사, 누구를 대상으로 삼나 여론조사를 보며 울고 웃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지금 여론조사 결과로는 도저히 누가 대통령이 될지 예단하기 어려우니 힘 빼지 마시라. 여론조사를 인용하며 선거결과를 예측하겠다는 전문가의 면모를 봐두라. 대신 아껴둔 힘으로 이번 선거가 끝난 뒤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조사기관이, 누구의 의뢰를 받아, 어떤 방법론을 적용해서, 어떻게 분석한 여론조사 결과가 편향이 적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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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주문’이 논변을 대체하는 정치 야당 대통령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것은 구호인가, 암호인가. 아니면 어떤 주문인가. 여성가족부의 구조개혁은 야당은 물론 여당도 오랫동안 검토해 온 사안이기에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대체로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유도 대안도 없고, 연관된 사안을 검토한 흔적도 없이 냅다 두 마디를 던지는 대통령 후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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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언론, 교과서도 문제다 코바치와 로젠스틸이 네 번째 판본을 찍었다는 소문을 듣고 내심 기다렸다. 존경하는 언론학자 이재경이 번역하고 언론진흥재단이 발행한 번역본이 곧 나오리라고. 과연 ‘기자들의 교과서’로 불리는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개정 4판이 도착했다. 다른 일도 이렇게 바란 대로 착착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노래하며 표지를 넘겼다. 쉽지 않은 책이다. 내용이 지시하는 현실부터 그렇다. 뉴스같이 보이는 선전들, 사실이면서 편파적인 주류 언론, 공정성 논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공영방송, 폐쇄적이고 공모적인 기자단 운영 등 우리 언론 현실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미국 언론이라면 뭔가 다를까 싶어서 이 책을 읽는 자는 누구나 실망할 것이다. 사례의 특성과 심각성에 차이가 있을 뿐, 세계의 언론 전문가들은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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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사회를 설명하는 언론 애초에 젊은 남자를 묶어서 ‘이대남’이라 부른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다. 이런 식으로 인구의 일부를 성별과 연령대로 잘라서 명찰을 달아주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그랬다. 세대론이란 대체로 정신이 가난한 자의 사회학이고, 잘해야 그저 그런 마케팅 도구로 남용될 뿐이라고 배웠던 나로서는 ‘이대남’이 마치 우리 사회의 어떤 병리현상을 설명하는 변수처럼 활용되는 꼴을 보고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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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누구를 못 믿어 문제란 말인가 “언론계 친구들 이야기로는 기자들이 다 기레기는 절대 아니라고 하면서, 또한 기자가 모두 기레기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이 함께 있다고 해요.” 지난 16일 춘천 한림대에서 열린 ‘저널리즘 신뢰위원회’ 세미나 자료에 인용된 한 젊은이의 말이다. 시민의 언론에 대한 신뢰가 바닥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언론이 정작 그런 불신의 이유가 되는 시민의 평가를 인정해야 할지 말지 동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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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사화의 정치와 언론의 도구화 이것은 사화의 정치다. 정적은 물론 가족과 지인의 신상까지 꼬투리를 잡아 정적 집단 전체를 제거하겠다는 싸움 말이다. 이념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당파란 어느 시대나 있으며, 정치란 정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를 다시는 정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찍어내자는 싸움은 정쟁을 넘어선다. 제6공화국에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나 했더니, 지난 10여년간 일어난 정파 간 복수혈전은 조선시대 사화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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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개혁이라는 이름의 퇴행 이 주장은 기묘하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등장하는 지박령 같다. 인터넷 포털 뉴스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 말이다. 이 주장은 20년 넘게 울리는 보수적인 주류 신문사의 외침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로서는 다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전면적으로 감행하지 못했던 다짐이기도 했다. 이제 개혁적이라는 정당이 같은 지박령을 불러내 분칠하고 새 옷을 입혀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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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시민을 응석받이로 만드는 일 마음의 역병일지도 모른다. 혐오와 증오, 모욕과 비하에 민감한 상태를 넘어 스스로 증오의 화신이 되는 징후를 보면 그렇다. 초기 증상은 타인의 발언으로 상처받은 마음의 상태를 과시적으로 드러내면서 시작한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모여 타인의 혐오에 자동으로 반응하게 된다. 혐오를 격렬하게 미워하다 보니 관찰과 성찰도 필요 없다는 듯 행동한다. 이것도 모욕이고, 저것도 멸시라는 게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에 비춰 자명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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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만들어진 전통, 트로트 트로트야말로 만들어진 전통이다. 트로트라 쓰고 ‘도롯또’라고 발음하든, 그저 뽕짝이라고 하든 우리가 들으면 바로 구별할 수 있는 대중가요들이 있다. 케이블 채널을 넘어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을 장악한 이 음악을 두고 왜색이니 저질이니 상스럽니 하며 비판하는 일조차 무색하다. 유래가 의심스럽고 발전에도 굴곡이 많았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 대중가요에 속한 고유 양식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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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개혁을 가로막는 훈육적 처벌주의 ‘조지다’가 ‘후리다’처럼 표준말이라니 써본다. 우리는 조지는 걸 참 좋아한다. 심지어 제도를 개혁할 때도 그렇다. 개혁에 저항하는 악당을 지목해서 호되게 때리면 개혁이 된다고 생각한다. 해로운 관행을 살펴 이로운 순환을 만드는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상 나타난 문제들을 고쳐나가는 데 미숙하다. 언론 개혁을 하자면서 언론에 대한 징벌을 더하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일단 조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진다고 윽박질러야 개혁이고 뭐고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현장의 기자가 무엇을 잘못하고, 일선 편집자가 왜 무력하며, 언론경영진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살펴서 개선의 유인책을 만드는 데 관심 없다. 언론과 표현의 영역이라도 형사처벌로도 안 되니 민사적 징벌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