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종복배’를 헌법 전문에 넣자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동료들과 여수·순천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답사의 묘미 중 하나는 역시 이동 중 나누는 대화(수다?)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내가 농담조로 말했다. “한국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난 우리 헌법 전문에 임기응변, 면종복배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들 역사학도인지라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고 깔깔댔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의아하실 것이다. 흔히들 우리 역사는 ‘고난에 찬 저항의 역사’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으로 그 엄청난 도전에 저항했는지가 중요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건 양만춘(안시성 전투), 을지문덕(살수대첩), 강감찬(귀주대첩), 이순신(임진왜란) 등 전쟁영웅들이다. 을지로, 충무로, 이순신동상, 낙성대 등으로 이들을 기리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무력저항에 대한 찬양만으로는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조공국으로 지내온 한국사를 쉽사리 설명해내지 못한다. 수많은 침략과 외세의 간섭을 겪으면서도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문명사회를 꾸준히 유지해왔다는 것, 여기에 한국사의 매력과 비밀, 그리고 한국인의 힘이 숨어 있다. 나는 그것을 임기응변과 면종복배라는 다소 과격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첫째 임기응변(臨機應變). 한국에 온 내 일본인 친구들은 ‘아무 계획 없이 행동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처음에는 “도대체 이런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 달 정도 머물며 한국인들의 임기응변 신공을 접하고는 “나루호도(그렇구나)!”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이 임기응변(臨機應變, 린키오헨)의 일본어 발음을 자꾸 ‘인키오헨’이라고 하는 것을 일본인이 지적하자, “그게 그거잖나. 자네는 인기오헨(因機應變)도 모르나!”라며 응수한 적이 있다(2021년 4월15일자 본 칼럼). 매뉴얼에 집착하는 일본인들에게 아마도 김옥균은 ‘임기응변’이라는 말을 자주 했을 것이고, 그 말을 하다 실수하자 ‘임기응변’을 발휘한 것이다. 제조업이나 장인(匠人) 문화에는 임기응변이 어울리지 않지만, 엔터테인먼트나 IT 산업에는 딱이지 않을까?

다음으로 면종복배(面從腹背). 나는 이 말을 꼭 부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국사에서 중국에 대한 대응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사대주의의 역사는 곧 면종복배의 역사다. 삼전도에서 삼궤구고의 예를 했건만 조선인들은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다. 겉으로는 청나라에 순종하는 척했지만, 청의 적국이었던 명나라를 추앙하는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서양과 일본의 위협 앞에서는 ‘속국’을 자처하며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1880년대 청이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진짜 속국으로 만들려 하자, 개화파뿐 아니라 고종도 가만있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도 마찬가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한국 대신들이 자기 앞에서 하는 말과 실제 행동이 너무 다른 것에 ‘분개’했다. 그의 ‘매뉴얼’에는 없는 행동들 앞에 이토는 크게 당황했다. 병합 후에도 일제에 저항한 게 만주 독립군만은 아니었다. 일제에 협조하는 척하던 많은 한국인들 역시 속으로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었다. 일본이 보기에 한국인 대부분은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었다.

‘비타협적인 저항과 투쟁’이라는 민족주의적 서사로 우리 역사를 얘기할 수도 있다. 혹은 ‘불변의 정의를 추구하는 고결한 지조’라는 성리학적 서사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걸어온 길은 그런 게 아니다. 한국사의 특성과 강점은 다른 데 있다. 거기에서 한국 고유의 힘과 매력이 나온다. 면종복배라는 어감 때문에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럴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혹은 힘만 믿고 까부는 강자를 ‘엿 먹이는’ 고도의 정치적 태도다. 임기응변, 면종복배 이런 말들이 점잖은 우리 헌법에 들어갈 리 없다는 것쯤, 나도 안다. 너무 더워 해본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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