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최신기사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우리 몸을 구성성분으로 나누고 또 나누면 결국 원자에 닿는다. 살아 있지 않은 원자들이 모여 살아 있음을 이룬다. 이처럼 구성요소가 갖고 있지 않은 속성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전체가 새롭게 보여줄 때, 이를 ‘창발’이라고 한다. 마치 지평선 아래에 있던 해가 떠올라 어느 순간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미시적인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이 거시적 규모에서 새로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떠오름’이라고도 한다. 생명은 생명 없는 원자로부터 떠오른다. 생명뿐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부분은 창발의 결과다. 액체인 물이나 고체인 얼음이나 같은 물 분자로 이루어지지만, 수많은 분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면 흐르는 물이 되고 딱딱한 얼음이 된다. 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생명의 장엄함을 보며 떠올린, ‘변이’의 힘 진화론을 ‘유전적 변이의 차별적 선택’으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변이를 가져 부모와 다른 자식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생존하여 같은 변이를 가진 손자손녀들을 만들어낸다. 살아남은 개체만 다음 세대의 후손을 남기니 무척 당연한 얘기다. 유전되지 않는 변이는 진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변이’ 앞 ‘유전적’도 중요하다. 다윈 진화론의 얼개를 이해하고 나면 이처럼 자명한 진실이 발견될 때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진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려면 변이는 필수다. 변이가 전혀 없어 똑같은 후손들만이 태어나는 생물종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멸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변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물종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하지만 변이의 확률이 너무 커도 문제다. 우연적 변이 대부분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낳아도 어차피 생존하기 어려운 자손을 소중한 생물학적 자원을 동원해 과도하게 만들어내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유전적 변이의 확률이 너무 작으면 멸종으로 이어지고, 확률이 너무 크면 낭비가 발생한다. 변이는 진화의 분명한 원인이자 자명한 결과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리학의 다음과 ‘다음 소희’는 지금이 정한다 길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자니 아쉬워 친구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말한다. ‘다음’이 정확히 언제냐고 묻지는 말자. 갑자기 말 더듬으며 당황하는 친구 얼굴을 보게 될 테니. 그냥 “그래, 다음에 보자”가 적당하다. 우리는 시간의 순서로 일어나는 사건 중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의 정해지지 않은 시점을 ‘다음’이라 할 때가 많다. 다음은 언제가 아니다. 다음은 시간의 화살을 따라 늘 미래를 향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먼저(pre-) 말하는(dict) 것이 예측(predict)이어서, 물리학은 다음을 지금 말하는 예측에 관심이 많다. 고전역학에서 지금 이 순간의 물체 위치와 속도를 알면 다음 순간의 물체 위치와 속도는 딱 하나로 정해진다. 지금의 상태가 다음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상태는 결정론적으로 지금 정해지지만 주어진 양자 상태에 대한 측정과 관찰의 결과가 확률로 주어질 뿐이다. 물리학의 다음은 지금이 정한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우리 모두의 본성이 다르지 않다 나를 나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심(心)과 생(生)이 함께 있어 한자 성(性)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나무뿌리처럼 바탕(本)이 되는 본성(本性), 사람 위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천성(天性)으로 적기도 한다. 대비되는 한자로 습(習)이 있다. 고대 갑골문에는 날 일(日)이 대신 적혀 있다 하니, 해 위로 높이 나는 새의 깃(羽) 모습에서 온 한자다. 나면서부터 나는 새는 없으니 어린 새가 날갯짓을 배워 익히는 것과 같은 것이 습(習)이다. 유교무류(有敎無類)는 <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어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열려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가르치면 누구나 같아진다”로 해석하면 사람은 모두 달라도 제대로 가르치면(有敎) 누구나 차이 없이(無類) 착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새길 수도 있어, 공자가 습(習)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재난, 예측은 못해도 대비할 수는 있다 코로나19, 산불과 지진, 그리고 전쟁. 여러 재난이 인류를 줄곧 찾아왔고 아무도 원치 않아도 또 다른 재난이 다시 닥칠 것이 분명하다. 거의 확실한 재난도, 규모와 시기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재난도 있다. 큰 지진과 미래 감염병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도, 기후 변화와 인구 감소는 예측이라 할 수도 없다. 이미 우리 곁에 온 겪기 시작한 미래다. 예측이 어려운 재난을 연구하는 통계물리학자가 많다. 그런데 연구 방법이 대부분 무척이나 단순하다. 두 평면 사이에 여러 물체를 두고 스프링으로 연결한 단순한 역학 모형으로 지진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다. 심지어 생물의 대량 멸종을 이해하고자 하는 단순하지만 유명한 모형에서는 길이가 서로 다른 막대 사이의 경쟁의 꼴로 멸종 현상을 재현한다. 이처럼 극도로 단순한 물리학의 모형이 현실의 재난을 과연 설명할 수 있을까?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삶의 상수, 각자 다를 수 있지만 보편성은 있죠 종이에 연필과 컴퍼스로 원을 그리자. 원의 크기는 사람마다 제각각 달라도 원의 둘레를 재서 지름으로 나누면 누구나 똑같은 원주율 파이(π) 값을 얻는다. 길이를 재는 단위로 ㎝를 쓰든 우리나라의 전통 단위인 자를 쓰든 마찬가지다. 원의 지름이 변수라면 원주율 파이는 상수다. 박경미의 <수학 비타민>에 초코파이에 들어있는 초코의 함량을 구하는 재밌는 계산이 나온다. 초코의 함량비를 ‘초코/초코파이’의 분수로 적고 ‘초코’를 약분하면 1/파이가 된다. 원주율 파이의 값 3.141592...를 넣어 계산하면, 초코파이 안 초코의 함량비율이 약 32%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같은 계산을 확장해 애플파이에 들어있는 애플의 함량을 구하면 이것도 32%다. 전 세계 어디서나 A파이에 들어있는 A의 함량이 약 32%로 같은 이유는 지구 어디서나 파이(π)의 값이 똑같기 때문이다. 외계인도 파이를 먹는다면 외계인의 X파이에 들어있는 X의 함량도 32%다. 우주 어디서나 π 값이 같기 때문이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전파라 좋은 것도, 전자파라 나쁜 것도 아니다 방송국 전파로 라디오를 들으며 전자파 유해성 기사를 읽는다. 음악을 듣게 해주는 전파는 고맙지만, 전자파는 왠지 피하고 싶다. 전파는 좋은 것이고, 전자파는 나쁜 것일까? 전자파는 표준 용어가 아니어서 전자기파로 부르는 것이 맞다. 전파도 좀 이상하다. 자연에는 전파(電波)와 자파(磁波)가 따로 없어, 둘은 서로를 만들어내며 전자기파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radio wave인 전파를 직역해 라디오파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전기만의 파동으로 오해하는 이는 없고, 이미 널리 쓰여 이제 와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물리학은 자연을 객관적인 실체로 기술하고자 하지만. 어쨌든 인간은 인간의 언어로 자연을 기술한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때로는 막고 때로는 돕는, 물리학의 간섭 내 일에 간섭하지 마! 무언가를 하려는데 다른 이가 막아설 때 우리가 하는 말이다. 우리 삶에서 간섭은 이처럼 방해나 훼방의 뜻을 가질 때가 많다. 하지만 물리학의 간섭은 이와 달라, 서로 만나 줄어드는 소멸(destructive)간섭도, 만나서 커지는 보강(constructive)간섭도 있다. 물리학의 간섭은 때로는 막고 때로는 돕는다. 빛과 소리를 포함한 모든 파동은 진행하며 서로 간섭한다. 긴 줄의 양 끝을 두 사람이 나눠 잡고 시간을 맞춰 동시에 위아래로 휙 움직이자. 양 끝에서 만들어진 두 파동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 한가운데에서 만나고, 그곳에서 줄은 위아래로 큰 폭으로 떨린다. 이처럼 결이 맞은 두 파동이 더해져 진폭이 늘어나는 것이 보강간섭이다. 두 파동이 만나 이루는 합성 파동의 진폭이 0이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줄 끝을 위아래로 휙 움직여 파동을 만드는 바로 그 순간, 다른 쪽 끝을 잡고 있는 사람은 거꾸로 줄을 아래위로 휙 움직여 파동을 만들 때 그렇다. 위아래가 뒤집힌 모습의 두 파동이 진행해 가운데에서 만나면 덧셈이 아닌 뺄셈이 되어 그곳에서 진폭이 0이 되는 소멸간섭이 일어난다. 결이 딱 맞는 둘이 만나면 늘어나지만, 결 맞지 않아 많이 다른 둘이 만나면 거꾸로 줄어든다.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 가운데서 만난 두 파동은 잠깐의 만남과 간섭 후에 제 갈 길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처럼 파동은 만남을 쉬이 잊어, 시간이 지난 둘의 만남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빛의 여행엔 시간 낭비가 없다 빛은 출발한 곳에서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직선을 따라 직진한다. 평평한 거울에 닿은 빛은 입사한 각도와 같은 각도로 반사하고, 맑은 연못 바닥은 실제보다 얕아 보인다. 기하광학의 여러 성질을 고전 물리학은 딱 하나의 원리, 가장 시간이 짧은 경로를 따라 빛이 움직인다는 페르마(Fermat)의 최소 시간의 원리로 설명한다. 우주에서 가장 급히 움직이는 빛은, 어떤 경로로 움직일지 정할 때도 시간이 기준이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가장 빠른 속도로 간다. 빛의 여행에는 시간 낭비가 없다. 두 점을 연결하는 무한히 많은 경로 중 길이가 가장 짧아 특별한 경로가 바로 직선이다. 빛의 속도는 어디에서나 같아서 직선은 또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경로이기도 하다. 페르마의 최소 시간의 원리를 생각하면 빛은 당연히 직진할 수밖에 없다. 빛이 평평한 거울에서 반사해 진행하는 경로를 거울 면 반대쪽으로 대칭적으로 뒤집으면 거울에 닿기 전 직선 경로의 연장선 위에 놓인다. 빛이 반사한 각도가 입사한 각도와 똑같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되어야 전체 경로가 최소 시간 경로가 되기 때문이다. 공기 중에서 물로 입사한 빛의 방향이 꺾이는 것을 굴절이라고 한다. 공기와 물에서의 빛의 속도가 각각 주어지면 최소 시간의 원리를 이용해 빛이 꺾이는 각도도 구할 수 있다. 빛이 직진하는 이유, 거울 면에서 입사한 각도와 같은 각도로 빛이 반사하는 이유, 그리고 빛이 다른 매질로 입사할 때 방향을 꺾어 굴절하는 이유, 이 모두를 고전 물리학은 페르마의 최소 시간의 원리로 한칼에 설명한다. 물리학이 자주 추구하는, 하나로 여럿을 설명하는 멋진 방식이다. 훌쩍 빠르게 갈 수 있는 더 나은 길이 있다면 빛은 굳이 에둘러 빙 돌아가지 않는다. 자연에는 이처럼 낭비가 드물어,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인 길을 찾을 때가 많다. 물리학의 설명에도 낭비 없는 검약이 미덕이다. 물리학은 복잡한 여럿을 단순한 하나로 낭비 없이 설명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자연은 움직임을 아끼고 과학은 설명을 아껴, 둘 다 낭비를 꺼린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절대성을 반영하는 시공간의 상대성 앞에서 본 내 모습은 뒤에서 본 모습과 다르다. 나는 나라서 변하지 않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내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누가 어디서 보는지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이 상대(相對)라면, 절대(絶對)는 보이는 겉모습은 달라도 늘 변함없이 유지되는 동일성이다.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은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시공간의 상대성을 알려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찰 결과의 상대성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절대성이다. 움직이는 시계가 더 느리게 간다는 시간의 상대성은, 등속으로 움직이는 누구에게나 빛의 속도가 같다는 더 근본적인 절대성의 결과다.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 근간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이해할 수 있든 없든 복잡계는 복잡계다 우리 사는 세상은 정말 복잡해 보인다. 사전에는 ‘복잡하다’의 풀이가 ‘일이나 감정 따위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로 적혀 있다. 서로 다른 두 측면이 ‘복잡함’의 의미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는 것은 대상의 속성인 한편, ‘갈피를 잡기 어렵다”는 것은 인식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다. 복잡함의 의미를 대상과 인식의 속성으로 나눠 생각해보면 네 조합이 가능하다. 대상이 단순해서 이해도 단순한 경우, 대상은 단순한데 보여주는 현상은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우, 대상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어 복잡한데 그래도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대상도 인식도 모두 복잡한 경우다.
-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우리는 ‘원자들의 모임’만은 아니다 재앙이 닥쳐 대부분의 인간이 사라지기 바로 직전, 후손을 위해 딱 하나의 과학 이론을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일까?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 리처드 파인만은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론을 후손에 남길 딱 하나의 이론으로 꼽았다. 물리학은 일석이조를 훌쩍 넘어 일석백조를 꿈꾼다. 하나로 여럿을 설명할 수 있을 때, 자연의 다양한 현상을 적은 수의 단순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 물리학자는 등골이 오싹한 경이감을 느낀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고, 원자론의 과학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떠올리면, 파인만의 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해지는 인력이 두 원자 사이에 작용하지만, 거리가 아주 짧아지면 서로를 미는 반발력이 작용한다는 것도 파인만의 책에 담겨 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 사이에는 거리에 따라 변하는 밀고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만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