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우리 몸을 구성성분으로 나누고 또 나누면 결국 원자에 닿는다. 살아 있지 않은 원자들이 모여 살아 있음을 이룬다. 이처럼 구성요소가 갖고 있지 않은 속성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전체가 새롭게 보여줄 때, 이를 ‘창발’이라고 한다. 마치 지평선 아래에 있던 해가 떠올라 어느 순간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미시적인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이 거시적 규모에서 새로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떠오름’이라고도 한다. 생명은 생명 없는 원자로부터 떠오른다. 생명뿐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부분은 창발의 결과다. 액체인 물이나 고체인 얼음이나 같은 물 분자로 이루어지지만, 수많은 분자가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면 흐르는 물이 되고 딱딱한 얼음이 된다. 물은 창발로 흐르고 삶은 창발로 이어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나의 뇌는 1000억개의 신경세포가 수백조개의 시냅스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놀라운 물질이다. 이 글을 쓸 때 일어나는 나의 생각을 현미경 속 신경세포에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물질 없이 창발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창발은 물론 신비로운 현상이지만 기본적인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 분자가 없다면 물의 흐름도 없고, 뇌가 없다면 생각도 없다.

다양한 거대언어모형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최근의 눈부신 발전도 창발의 결과다. 인간 뇌의 시냅스 숫자인 수백조개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이미 OpenAI가 만든 챗GPT는 수천억개의 조절변수를 가지고 있다. 조절변수의 수가 늘어나면서 어느덧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놀라운 창의적인 결과물을 생성하는 인공지능이 창발했다.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도약을 이룬 셈이다. 뇌의 신경세포는 1초에 기껏 1000번 상태를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의 뇌가 모여 함께 만든 컴퓨터 CPU는 1초에 무려 수십억번 정보를 처리한다. 또, 컴퓨터 소자 사이의 정보 전달 속도와 비교하면 신경세포 사이의 정보 전달은 시속 160㎞ 정도에 불과해 거북이걸음처럼 느리다.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구현은 수백조개보다 훨씬 적은 수의 조절변수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절변수의 수를 무작정 늘린다고 인간과 동등한 결과물을 인공지능이 생성해낼 수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우리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는 독특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수염 석 자’가 어떤 문화적·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는 도도한 양반이라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다면, 양반이 살아남으려면 석 자 길이의 수염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뜻으로 엉뚱하게 오해할 수도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문화적·역사적·사회적 상식을 인공지능이 습득하려면 지금과는 다른 작동방식이 필요하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다. 우리 인간은 습득한 지식에 기반해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이에 대한 외부 세상의 반응을 다시 또 지식의 습득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예측과 학습을 재귀적으로 이어간다. 외부와의 상호작용과 경험을 통해 스스로 학습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스스로 예측을 생성하고 외부 세계와 직접 연결해 재귀적으로 학습을 이어가며 스스로 발전하는 방식의 인공지능도 우리 곁에 올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어렴풋한 여명이지만, 인류가 한 번도 못 보던 새로운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고 있다. 거대인공지능이 떠올라 새롭게 보여줄 그 빛이, 우리를 비출 고맙고 따스한 햇볕이 될지, 우리를 고통에 몰아넣을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보여줄지,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지고 여명을 바라본다. 인공지능 개발은 과학자와 공학자의 몫이더라도, 인공지능으로 도래할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지는 게 과학자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허락하는 것은 우리를 재앙으로 이끌 수도 있다. 어떤 미래를 우리가 원하는지 지금 묻고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갑자기 떠오를 세상은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모습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창발할 세상에 대비하려면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지성의 창발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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