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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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뾰족 저 멀리 뾰족한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뾰족하게 보여도 건물 꼭대기는 가로세로 1m보다 넓어 보인다. 서툰 바느질로 뾰족한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따끔한 통증을 느낀 적도 있다. 바늘 끝은 크게 잡아도 가로세로 1㎜ 안에 들어간다. 가로세로 1m보다 넓은 고층빌딩 꼭대기에는 단면이 가로세로 1㎜보다 작은 바늘을 무려 100만개 이상 꽉 채워 세울 수 있다. 끝부분 단면적이 100만배 이상 차이 나는데, 우리는 왜 둘 모두 뾰족하다고 할까? 물리학자의 고민이 이어진다. 과연, 뾰족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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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온도’가 높은 쪽에서 양보하는 게 맞다 한여름이 다가온다. 날씨가 더워지니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찬 손을 내 러닝셔츠 안에 쏙 넣는 것을 좋아한다. 매번 이를 악물고 참지만, 정말 차다. 우리 몸의 피부에는 온도와 압력, 그리고 통증을 감지해내는 냉점, 온점, 압점, 통점 등 외부의 정보를 감각하는 감각점이 분포한다. 내 피부의 온도와 다른 무언가가 닿으면 감각점에 분포한 감각 신경세포의 발화가 시작된다. 이렇게 발생한 신경세포 안팎의 전위차는 길게 이어진 축삭을 따라 전달되어 결국 뇌에 모여 차갑고 뜨거운 생생한 감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온도계로 잴 수 있는 객관적인 수치를 냉점과 온점이 알아내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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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틈새’가 일깨워준, 있는데 잊은 것들 늦잠에서 눈을 떠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눈부신 햇살이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면,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작은 먼지들의 경이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헤엄치듯 부유하며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들의 멋진 운동을 넋 놓고 바라본다. 빛이 만들어낸 길의 밖으로 나간 먼지 입자는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거꾸로 밖에서 들어온 입자는 이제 눈에 띄기 시작한다. 있던 먼지가 갑자기 소멸한 것도, 없던 먼지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틈새와 균열을 통해 들어온 빛은 있지만 몰랐던 작은 존재들을 비춘다. 구름 잔뜩 낀 날 비가 그치면,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름 사이의 틈을 뚫고 땅을 비추는 햇빛의 기둥이 갑자기 등장할 때가 있다.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본 이 장면은 정말 장관이다. 척박한 일상을 살아가는 힘든 지상에서 고개를 들면, 때 묻지 않은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보인다. 많은 종교에서, 죽으면 간다는 장소인 천당의 지정학적 위치로 ‘하늘’을 지목한 이유다. 비가 그쳐 맑아진 대기를 뚫고 저 멀리 보이는 햇빛의 기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현실의 세상과 사후의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처럼 말이다. 여러 종교화에 표현된 승천의 이미지, 빛의 기둥을 따라 외계인의 우주선이 위로 올라가는 SF영화의 장면도, 비슷한 광경을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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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사이와 거리 우리는 친한 사람을 가까운 사이라 한다. 친한 친구였다가 오래 보지 못해 관계가 예전만 못해지면, 사이가 멀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이와의 심리적 거리를 물리적 거리로 표현한다. 단지 비유만은 아니다. 마음이 가까운 사람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함께해도 불편하지 않다.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으로도 둘이 얼마나 깊게 사랑에 빠져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직장 회식자리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둘 사이의 직장 내 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다. 마음의 거리는 공간에 투영되어 물리적 거리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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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증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해주신 재밌는 얘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 일꾼이 하루 품삯을 묻는 만석꾼 고용인에게 첫날 딱 쌀알 한 톨을 달라고 했다. 이튿날에는 하루 전 품삯의 두 배인 쌀알 두 톨, 다음날은 마찬가지로 전날 품삯의 두 배인 네 톨. 몇 번 손가락을 꼽아보던 만석꾼은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동의한다. 일주일 지나도 하루 품삯으로 채 한 숟가락에도 못 미치는 쌀알을 달라고 하니, 아주 멍청한 일꾼이라고 생각하면서. 쌀 한 톨의 무게와 쌀 한 되의 무게를 비교해 계산하면, 16~17일이 지나면 하루 품삯이 쌀 한 되쯤 된다. 그리고 22일째가 되는 날 일꾼은 하루 품삯으로 쌀 한 가마니를 받는다. 다음날은 쌀 두 가마니, 그 다음날은 하루에 무려 쌀 네 가마니를 받는다. 만석꾼 부자 고용인이 한 해 수확인 만석 전체를 일꾼의 하루 품삯으로 지급해야 하는 날은 한 달하고 일주일쯤이 지난 뒤다. 멍청한 것은 일꾼이 아니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덥석 계약을 수락한 만석꾼이 멍청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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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예측 가만히 손에서 놓은 돌멩이는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닿는다. 정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수백만 번 돌멩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관찰했다고 해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바로 이 돌멩이도 잠시 뒤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돌멩이는 아래로 떨어진다. 위로 거꾸로 솟는 것을 본다면 정말 내일 아침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아래로 떨어지는 돌멩이는, 동쪽에서 뜨는 아침 해와 마찬가지의 확실성을 가진다. 이러한 확신의 근거는 무얼까? 뉴턴의 고전역학은 계의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기술한다. 고전역학으로 기술되는 자연법칙 자체가 갑자기 변하지 않는 한, 돌멩이는 아래로 떨어지고, 내일 아침 해는 동쪽에서 뜬다. 물리학이 찾아낸 자연법칙이 우리가 가진 확신의 근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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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법칙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은 국가의 정체성을 밝혀 나아갈 방향을 큰 틀에서 제시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당위의 가치가 담긴, 사람이 만든 법칙이 바로 우리가 얘기하는 ‘법’이다. 약하고 강한 징벌을 받을 수 있지만, 어쨌든 어기는 것이 가능은 하다. 어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면 우리는 법을 만들지 않는다. 자동차의 공중 비행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따르는 법칙은 다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어길 수는 없다. 손에서 가만히 놓은 물체가 땅을 향해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연법칙은 당위가 아닌 사실의 법칙이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생각만으로 돌을 위로 띄울 수는 없다. 사람이 만든 당위의 법칙과 달리 ‘스스로 그러함’을 뜻하는 자연(自然)은 금지하지 않는다. 어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니 금지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만든 당위의 법칙이 “이렇게 하는 것도, 저렇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둘 중 요렇게 하기로 약속해요”라고 할 때, 자연은 “네 맘대로 해봐. 그게 되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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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허공 1977년 미국에서 발사한 보이저 1호는 지금도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90년 명왕성 정도의 거리를 지날 때, 보이저 1호는 카메라를 돌려 우리 지구가 담긴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냈다. 사진 속 지구는 정말 작아 보인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이 사진에서 얻은 영감과 통찰을 담아 <창백한 푸른 점>을 출판하기도 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저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때로는 복작복작 싸우고 미워하고, 때로는 서로 돕고 사랑하며, 우리 모두는 짧은 삶을 산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평균거리를 1천문단위(AU)라 한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우주로 보낸 모든 것 중 현재 가장 멀리 있어, 약 150천문단위의 거리에 있다. 지구에서 명왕성까지 거리의 3배가 훌쩍 넘는 거리다. 이 정도로 엄청난 거리도 우주의 막막한 규모와 비교하면 별것 아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별은 당연히 태양이다. 두 번째로 가까운 별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가도 4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다. 보이저 1호가 이만큼의 거리에 도달하려면 수만년이 걸린다. 밤하늘에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별은 우주의 허공 속에서 정말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주의 대부분은 물질이 아니다. 허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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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무한 세상에 100보다 더 큰 수는 없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주변을 둘러봐도 100보다 더 많은 수가 모여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덧셈을 배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100에 100을 더하면 더 큰 수인 200이 된다. 아주 큰 수에 아주 큰 수를 더하면 아주 더 큰 수를 얻는다. 그럼, 세상에 가장 큰 수가 있을까? 가장 큰 수는 없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누가 A가 가장 큰 수라고 주장하면 A+1은 A보다 더 크다고 얘기해주면 된다. A가 얼마여도 우리는 항상 A보다 더 큰 수를 생각해낼 수 있다. 가장 큰 수를 종이에 적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향해 갈 수는 있다. 1에서 시작해 점점 1씩 더해 나가면 우리는 무한(無限)을 향해 나아간다. 무한을 향해 한 발씩 전진할 수는 있어도, 무한에 도착해 깃발을 꽂을 수는 없다. 무한은 아무리 다가서도 늘 한참 저 앞에 보이는 무지개를 닮았다. 저 앞에서 우리에게 손짓해 한 발씩 다가설 수는 있어도, 닿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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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사람과 사람 사이, 작용·반작용의 법칙 사과는 아래로 떨어진다. 지구의 중력이 아래 방향으로 사과를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따른다. 지구가 사과를 아래로 당길 때, 사과도 지구를 잡아당긴다. 그런데 왜 지구가 안 떨어지고 사과가 떨어질까? 이 간단한 물리학 질문에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이 사과가 지구를 당기는 힘보다 더 커서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은 다르다. 뉴턴의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사과가 지구를 당기는 힘은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과 정확히 같다. 물론 방향은 반대다. 지구가 사과를 아래로 당길 때, 사과는 지구를 위로 당긴다. 똑같은 크기의 힘이 사과와 지구, 각각에 작용한다. 그런데 왜 사과는 아래로 떨어지지만, 지구는 위로 움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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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대칭 독자에게 묻는 질문이다. 매일 거울에서 보는 얼굴은 진짜 내 얼굴일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다른 이가 보는 내 모습과 정확히 같은 걸까? 매일 거울을 보면서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모두에게 이 질문은 무척 엉뚱하게 들리리라. 그리고 이 질문에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한 분이 많으리라. ‘삑!’, 정답이 아니다. 매일 거울을 보며 살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울은 늘 좌우가 뒤바뀐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른쪽 눈 밑 작은 점이 거울에서는 왼쪽 눈 밑에 보인다. 왼팔에 시계를 찼는데 거울 속의 나는 오른팔에 시계를 차고 있다. 매일 거울을 보지만, 난 단 한 번도 내 참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익숙하다고 진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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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 권력장을 바꾸는 ‘무거운 존재’ 질량이 있는 모든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지구 중력장에서 질량에 비례하는 크기의 힘을 받는다. 이 힘이 바로 무게다. 질량과 무게는 물리학에서는 명확히 의미를 나눠 쓰지만, 우리 일상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다. 무게는 질량에 중력가속도를 곱한 것이라서, “내 몸무게는 60㎏”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 몸무게는 60㎏중” 또는 “내 몸의 질량은 60㎏”이라 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 계속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무게와 질량 사이의 비례상수인 중력가속도는 어디서나 거의 일정하니, 오해의 소지는 별로 없다. 오류를 교정해 바꿔 불러야 한다고 우길 생각도 없다. 과학의 정량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게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 어떤 이의 입은 무겁다 하고, 팍팍하고 힘든 일상을 삶의 무게라고 말한다. 한 작가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 했고, 요즘 우리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필자는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