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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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원격강연, 모니터 너머의 얼굴들 몇 년 전 맥도날드에서 물류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세 번, 정해진 요일 아침마다 큰 탑차가 들어왔다. 거기에 이 도시가 이틀 동안 소비할 햄버거 재료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을 내리고, 검수하고, 건자재실로 옮기고, 유통기한별로 정리하고, 그날 사용할 물건들을 옮기고,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렸다. 모두 하는 데 아침 7시부터 점심까지 꼬박 5시간이 걸렸다. 집에 가서 씻고 대학의 강의실로 가거나 연구실로 가거나 했다. 어느 날 일을 하던 중 메일이 와서 확인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잘 읽고 있고 내게 강연을 부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강연비로 2시간 기준 40만원 정도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맥도날드에서 월 60시간을 일하고 받는 돈이 대략 그만큼이었다. 함께 일하던 대학생 크루에게 “누가 너한테 2시간만 일하면 40만원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하고 물었다. 그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답을 했다. “형, 그건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 일이 어디에 있어요.” 나도 그에게 “응 맞아” 하고는, 다시 감자박스를 냉동고에 넣기 위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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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나는 시민이다 얼마 전부터 하루에 몇㎞씩 뛰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원래는 체중감량을 위해서였다. 실제로 최근 100일 동안 18㎏ 정도를 감량했으니까 그럭저럭 성공한 셈이다. 처음에는 1㎞를 간신히 뛰었지만 5㎞를 웃으면서 뛸 수 있게 되었고, 얼마 전에는 쉬지 않고 10㎞를 뛰었다. 이제는 그렇게 뛸 수 있게 된 나의 몸이 예쁘고 대견해서 계속 뛴다. 같이 뛰는 분들이 생겼다. 매일 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됐다. 그래서 목요일 저녁마다 한강의 모 공원에서 뛰겠다고 했고, 그때 나온 분들과는 인사를 하고 함께 뛴다. 언젠가는 20명이나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시행되었다. 코로나가 잦아들 때까지는 모이지 않기로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뛰고 서로 뛰었다는 해시태그를 붙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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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몰래 함께 뛰어요 몇 년 만에 이 지면의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100일 동안 대략 18㎏(82㎏→64㎏)을 감량했으니까, 이만하면 사진을 바꾸는 것이 맞다. 어디가 아팠다든가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한 것은 아니다. 살이 너무 찐 것 같아 건강이 걱정되어 헬스장을 찾았고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안내를 보았다. ‘100일 동안 가장 많이 체중을 감량한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상품을 줍니다.’ 정확히는 지방을 0.1㎏ 감량하면 +1점, 근육을 0.1㎏ 증량하면 +1.5점, 하는 식이었다. 동기부여가 되겠지 싶어서 그 챌린지에 참가했고, 얼마 전 내가 1등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근육은 1㎏쯤 늘었고 지방은 15㎏쯤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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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야구를 좋아하는 그냥 아저씨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주말이면 동네 뒷산인 성미산 약수터에서 친구들과 야구를 했다. 작가도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기는 했으나 사실은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리틀야구를 배우는 친구들보다 야구도 그럭저럭 잘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야구를 TV로만 보고 가끔 야구장에 가서 치맥을 하는, ‘야구를 좋아하는 그냥 아저씨’가 되었다. 아홉 살 즈음에 어머니께 진지하게 물었다.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며. 어머니는 그때 “한 달에 100만원은 들 텐데 우리는 그런 돈이 없어”라며 역시나 진지하게 답했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90년대 초반의 100만원은 정말로 큰돈이었다. 나는 그 즉시 야구부 입단을 포기했다. 그에 더해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는데, 야구부에 들어가면 야구방망이로 참 많이 맞는다는 이야기를 친구들끼리 많이 나누었던 것이다. 하키부가 있는 인근 고등학교는 하키채로 맞고, 검도부는 죽도로 맞고, 이래저래 운동은 맞아가며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당연히 감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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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서로 외롭지 않은 출판의 방식 작가는 글을 쓰고 독자는 그의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오기를 기다린다.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데 있어 작가의 역할은 적극적, 독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출판사와 인쇄소와 도매상과 서점과 물류사의 손길이 더해져 한 권의 책이 전해지면, 독자는 그때부터 리뷰를 쓴다든가 작가를 만나 독서모임을 한다든가 하고, 그 이전까지는 그저 ‘이 작가의 다음 책은 어떤 것이고 언제쯤 나올까’ 궁금해할 뿐이다. 몇 개월 전 모 작가에게 “저, 우리가 독자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보면 어떨까요. 메일링 서비스 같은 것을요” 하는 제안을 받았다. 구독자를 모으고 그들에게 직접 글을 보내주는 구독서비스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어, 음,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하고는 왠지 둘이서만 하기엔 민망해서 주변 몇몇 작가들에게 “저…” 하고 연락을 했다. 그렇게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그리고 나까지 일곱 명의 작가가 모였고, 3개월간 매일 한 편씩 매주의 주제에 따라 쓴 에세이를 구독자들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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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재난 긴급생활비 신청서에서 찾은 ‘일상의 재난’ 얼마 전 서울시 재난 긴급생활비를 신청하러 갔던 A가 나에게 카톡을 보내왔다. 신청하면서 몹시 화가 났다고 했다. 담당자와 직접 대면하는 방식이니까 공인인증서나 액티브X에 고통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평소 예민한 성격인 그가 무엇에 불편을 느꼈나, 우선 들어나 보기로 했다. A는 자신이 찍었다는 신청서 양식의 사진을 보내면서 나에게 잘못된 부분을 찾아보라고 했다. 신청서에는 ‘서울시 재난 긴급생활비 신청서’라는 제목이 있고, 그 밑에 세대주 정보와 가족사항을 적는 난이 있고, 신청사유 ‘코로나19로 인한 생계 위기’라고 적혀 있고, 타 제도의 지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표시하는 난이 있었다. 어디 오타라도 있나, 띄어쓰기라도 잘못되었나 하고 살펴보다가 도무지 찾기 어려워서 “아니, 선생님, 그래서 뭐가 문제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가족사항란(사진)을 자세히 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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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가 몇년 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쓰고 대학에서 나왔을 때가, 마침 20대 총선을 4개월쯤 앞둔 시점이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정당에서 연락 안 왔어요?” 하고 많이 물었다. 나의 이야기가 그럭저럭 화제가 된 시점이었다. 그러면 “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정치는 잘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답했다. 나와는 멀다고, 정확히는 나와는 멀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투표도 때마다 하고 남들만큼의 정치적 입장도 가지고 있지만, 의결권을 가진 당사자가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사실 국회가 아니라 구의회에 앉아 있는 나를 떠올리는 일조차도 민망했다. 나보다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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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나는 당신이 적당히만 궁금하다 내가 대학원생이던 2010년 즈음에, 학과의 남자 후배 몇이 도움을 얻으러 온 일이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무언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들에게 “괜찮으면 언제 술 한잔 같이해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네 선배, 같이 커피 한 잔 마셔요”하고 답했다. 단호하고도 세련된 방식의 거절이었다. 나는 그들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대학원생이 학부생을 괜히 부담스럽게 했나’하고 몹시 외로워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나에게 “우리 커피 언제 마실까요?”하고 찾아왔다. 나중에 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 역시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다만 1980년대생인 나와 1990년대생인 그들의 언어가 달랐던 것이다. 술과 커피, 이 알코올과 카페인 음료가 가진 서로의 거리만큼 그들과 나 사이는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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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마음이 감염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 친하게 지내는 S 작가님이 3월에 한 달 동안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그의 설레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 지난가을이니까, 코로나19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때였다. 얼마 전 그에게 여행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묻자 그는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라면서, 여행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에도 수는 적지만 확진자들이 있고 공항을 오가는 동안 잠복기에 있는 누군가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보다도 동양인으로서 받을 차별이 두렵다고 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동양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에 낙서테러가 일어났다고 하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욕설과 조롱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고도 한다. 프랑스의 숙소에서 예약 취소를 통보해 올 것 같다고도 하는 그는, 더 이상 가을의 설레던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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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장 가까운 타인의 행복을 바란다 나는 나의 아이를 글에서 호칭해야 할 때 ‘김○○씨’라고 한다. 예를 들면 “김○○씨는 오늘도 나의 핸드폰을 세면대에서 열심히 씻고 있었다”와 같은 것이다. 그가 나를 ‘부글부글’하게 만든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종종 쓰기도 한다. 이것을 육아일기 단행본으로 출간하자는 제안도 몇 번 받았는데, 주양육자가 아닌 사람이 육아에 대해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것도 민망하고 무엇보다도 전쟁처럼 아이를 돌보고 있을 내 또래의 여성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기에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페이스북의 글을 본 사람들이 “왜 아이를 ‘-씨’라고 부르시나요, 남처럼 느껴지지 않나요?”하고 묻기도 한다. 아내도 나에게 “아이가 남이야?”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을 전한 일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이를 ‘-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말로 그를 남처럼 여기고 싶어서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만큼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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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출판사의 통장과 크리스마스 며칠 전,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날, 나는 아이의 첫 재롱잔치를 보기 위해 유치원에 있었다. 아이도 나도 적당한 설렘과 긴장이 일던 그때 S출판사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그 내용을 읽고 통장을 확인하곤 옆의 아내에게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돈이 갑자기 많이 들어와서…”라고 답했다. 이 출판사와의 계약조건은 아마도 인세 후지급이었을 것이다. 2쇄가 모두 판매되고 3쇄를 찍으면 그때 2쇄에 대한 인세를 지급하는 방식이거나, 아니면 1년에 두어 번 책이 팔린 만큼 인세를 지급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걸 세세하게 살피고 계약하는 건 아니어서 인세가 들어오면 오나 보다, 안 들어오면 책이 안 팔리나 보다, 하고 짐작하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다. 그런데 갑자기 ‘많이’라고 할 만한 돈이 입금된 것은 새롭게 찍을 N쇄에 대한 인세까지 함께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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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지하철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가방을 잃어버렸다. 지하철 선반 위에 둔 것을 잊고는 그냥 내렸다. 10분쯤 걷다가 무언가 허전해서 돌아보니 항상 메고 다니던 가방이 없었다. 그러나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상수역에서 나의 가방을 싣고 응암역 방면으로 출발한 6호선 지하철은 은평구를 순환하고 다시 상수역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하철에 이것저것을 많이 두고 내렸지만 순환선인 2호선을 주로 탄 덕분에 한 바퀴를 돌아온 지하철을 다시 타고 분실물을 찾곤 했다. 이게 뭐가 자랑이라고 적고 있는지 민망하지만, 순환선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열차가 돌아나오는 시점만 잘 맞춘다면 대개 찾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