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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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다감함과 다정함의 차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고 하면 그건 아마도 ‘동정’일 것이다. 다른 존재와 같은 정이 된다, 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오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타인을 돕는 이유도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내가, 나의 아이가, 저런 상황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데서 나온다. 그만큼 누군가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다정하다거나 다감하다고 말한다. 다정함, 다감함, 동정,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고 그러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름의 기준으로 이 단어들을 정리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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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자녀의 인생을 설계하는 방법 고등학교에 강의하러 갔다가 학부모에게 들은 질문이다. 그는 아이에게 문과를 가라고 해야 할지 이과를 가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그의 삶을 설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과에 가야 입시에도 유리하고 취업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민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그의 딸이 함께 와 있었다. 사실 나는 입시나 취업 설명회가 아니라 인문학 강의로 그들과 만났다. 내가 하는 말이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나도 문·이과 선택으로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를 풀거나 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나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했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PC통신(천리안)을 하는 데 보냈다. 나는 그때 게시판에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은 대개 판타지소설 게시판에 가 있었으나 나는 나의 고등학생 생활을 각색해서 올리는 게 즐거워서 유머게시판에 있었다. 그러던 중 문과와 이과 진학을 선택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이과로 가야 먹고살 수 있다는 말들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20년 전인 2000년대 초반에도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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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다정함, 무정도 유정도 아닌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을 쓴 이후 북토크에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고 항상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선함은 유약함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힘이 약한 아이들은 무언가를 잘 빼앗긴다. 싫다고 할 때마다 듣게 되는 말이 “너는 착하니까 괜찮잖아”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것 좀 해줘요’ 하는 부당한 요구를 하고는 실망하는 누군가들이 있다. 그러나 선한 사람만큼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만큼 치열하게 분투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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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다정한 경쟁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경쟁하며 살아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생존을 위해서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시부터 취업, 그리고 이후 부의 축적과 그에 따른 지식 계급과 노동 계급으로서의 신분 상승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 안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부의 세습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어린아이에게 미리 상속해야 할 만큼 부유한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중·고등학교의 일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드러난다. 매일 아침 다려진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학교에 갈 수 있는 것 역시 그렇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부장으로 일하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교복은 보살핌의 상징이다. 교복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데도 누군가의 대리노동이 필요하고 거기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겨진 교복을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와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들은 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공부만 할 수 있는 학생과 공부도 해야 하는 학생이 내는 결과야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경쟁을 보조할 수 있는 그 환경이 한 개인과 가문의 위계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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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정보라 작가를 응원하며 정보라 작가가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퇴직금 및 수당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2010년부터 2021년까지 11년 동안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다고 한다. 매 학기 9학점의 강의를 했고 6년 동안 우수 강사로 선정되어 총장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성실하게 근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나도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시간강사로 일했다. 매 학기 6~8학점의 강의를 했고 3년 동안 강의평점 상위 10%에게 주는 우수 강사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나도 정보라 작가처럼 무엇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쓰고 대학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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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그게 어때서요”라고 말하는 마음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던 때, 건강보험을 보장받기 위해 1년 남짓한 시간 맥도날드에서 물류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냉동감자 박스를 나르던 것도, 그리즈트랩의 음식물 쓰레기를 걷어내던 것도, 한겨울에 냉동창고에 들어가야 했던 것도 아니다. 나를 아는 누군가와 매장에서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이 올 수도 있고 시간강사 동료들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자신이 없었다. 대학원 후배가 햄버거를 먹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가 갈 때까지 건자재실에 숨어 있었다. 한번은 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햄버거를 먹고 있기도 했다. 나는 다음 수업을 위해 퇴근해야 했고 그러려면 그들을 지나쳐야만 했다. 고민하던 나는 다른 크루에게 부탁해 물류를 실어나르는 작은 승강기에 웅크리고 앉았다. 몇 초 후면 나는 1층에 도착하고 그가 열림 버튼을 눌러줄 것이다. 그러나 어둠은 깊고 그 시간은 길었다. 승강기는 곧 흔들리며 멈추었지만 나는 계속 하강하는, 아니 추락하고 있는 듯했다. 나의 인생은 언젠가부터 추락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 왜 그렇게 두려웠느냐고 하면, 그들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추락의 심정이 되지 않을까. 그들이 그러한 마음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더불어 나도 그들에게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교수로서만 남을 수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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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작가가 되고픈 청소년들에게 요즘 중·고등학교에서는 ‘작가와의 만남’을 많이 한다. 불과 20여년 전,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작가라는 사람을 보는 건 대단히 희귀한 일이었다. 작가뿐 아니라 그 누구든 학교에 와서 교사 대신 교탁 앞에 서는 일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나는 한 번도 작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채로 글을 써서 밥을 먹고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로 적성이라든가,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이라든가, 도서관 행사라든가 하는 이유로 거의 모든 학교가 한 학기에 한 번 이상은 작가를 초청한다. 학생들을 만나면, 적게는 30여명, 많게는 100여명 모인 그들에게 종종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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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당신의 도정을 응원하며 가족과 함께 강원 평창에 가서 무언가 자라고 있는 밭을 지나는 길이었다. 저게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아홉 살 아이가 말했다. “아빠, 저거 감자야.” 같이 걷던 아내도 감자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아이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니 얼마 전 학교에서 감자를 심었다고 했다. 그는 강릉의 작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그뿐 아니라 원주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아내도 감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강원도에서 산 지 20여년이 되어가면서도 감자싹과 고추싹을 구분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듯하다. 강릉으로 이주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다. 바다와 가까운 조용한 동네에 산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일곱 살이 된 아이가 바다를 한 번도 못 보았다며 보고 싶다고 했고, 미안한 마음에 그날 강릉을 찾았고,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몇 번이나 바다를 찾다가 아이에게 문득 물었던 것이다. 혹시 바닷가에서 살고 싶으냐고. 그가 좋다고 했고, 아내도 좋다고 했고,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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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네가 꿈을 꾼다면 그 시간을 내가 살게 내가 초등학생이던 1990년대에도 “너는 꿈이 뭐니” 하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어쩌면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모범답안은 대통령, 의사, 변호사, 교사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답하고 나면 그들은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거나 용돈을 주거나 하고 곁에 선 부모님은 흐뭇하게 웃는다. 그 시절의 참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의 꿈은 꽤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되고 싶은 것을 3개(씩이나) 말해보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1) 농부, 2) 어부, 3) 사냥꾼, 이라고 답한 이후로 꾸준히 그랬다. 모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고 어느 교사에게는 호된 꾸중을 들은 일도 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꽤나 진지했다. 지금에 와서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우선 농부가 되어 내가 기른 농작물을 수확하고 싶었고, 어부가 되어 바다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엄청난 것을 잡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사냥꾼에 이르면 그저 설레는 것이었다. 저 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잡을 때까지 산에 있으면 된다. 그게 참된 직장인의 자세다. 그래도 농부-어부-사냥꾼으로 순위가 매겨진 것을 보면 어린 시절에도 조금은 더 안정적이라 생각되는 것을 고른 듯하다. 나중에 한국의 산에는 맹수가 거의 멸종했으며 허가를 받아 꿩이나 멧돼지를 잡는 게 고작이라는 것을 알고 국어 교사라든가 작가라든가 하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꿈을 가지게 되긴 했으나, 사실 지금도 나의 꿈은 어부나 사냥꾼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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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MZ세대라는 용어는 ‘폭력의 합집합’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 나는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1980년대생들을 N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기의 몇 가지 CF 문구가 떠오른다. “N세대는 물을 먹지 않는다”라는 음료 광고, “N세대의 소통법”이라는 통신사의 문자 요금제 광고 등이. 그 이전까지 ‘베이비붐세대’라든가 ‘386세대’ ‘X세대’라고 한 세대가 규정되는 것을 보며 나의 세대 앞에는 어떤 알파벳이 붙을까 괜히 궁금하고 기대되었다. N은 ‘네트워크’, 그러니까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나는 W세대(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젊은 세대), M세대(2000년 이후 청년이 된 밀레니얼, 모바일에 익숙한 세대) 등으로 규정되다가, 이제는 MZ세대로 불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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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최상급 추천의 언어 책의 뒤표지에는 대개 300자 내외의 추천사가 한두 개씩 수록되어 있다. 유명한 사람이거나 그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할 것이다. 추천사의 분량이나 비용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한 줄에 100만원을 받는 사람도 있고 수백 자를 쓰고서도 10만원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한 글자에 매겨지는 가격을 감안하면 추천사는 가장 비싼 집필 활동임에 분명하다. 그다지 유명한 작가가 아닌 나에게도 종종 추천사를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한 달에 두세 건은 꼭 오는 듯하다. 우선은 내가 이 추천사를 쓰기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되지만, 그렇게 판단했으니 연락이 왔겠지 싶다. 원고를 살펴보고 쓰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그 분량과는 별개로 부담이 찾아온다. 이만큼 쓰기 어려운 글도 없는 듯하다. 그 어떤 글보다 잘 써야 하는 글인 것이다. 이 책이 잘되기를 바라는 편집자의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나. 내가 받는 추천사만큼 출판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책을 적어도 수십 권은 더 팔아야 할 텐데 내가 그만큼을 보전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벌써 미안한 마음이 되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적어 나가고, 그러다가 혹시 오·탈자를 발견하면 표시해 둔다. 추천사가 부족하더라도 “저어, 교정하며 이미 찾으셨겠지만 몇 쪽에 오·탈자가 있으니 확인해 주십시오” 하고 말해 두면, 정상을 참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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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 3월 초, 개학 주간이다. 주변의 학부모들은 겨울방학이 길었다고, 교사들은 그런 게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간이란 저마다의 처지에서 지극히 상대적으로 흐르는 듯하다. 이제 2학년이 된 나의 아이도 자신의 초등학교로 간다. 그가 아침마다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 학교 가기 싫어”였다. 개학 첫날에도 그는 적당히 우울한 표정을 하고는 등교했다. 아이의 엄마는 아무래도 전생에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형제의 어머니였던 게 분명하다. 날이 좋으면 우산 파는 첫째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비가 오면 짚신 파는 둘째를 걱정하는 것처럼 아이를 보며 늘 불안해한다. 아이가 왜 학교를 즐겁게 다니지 못하느냐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린 시절에 학교에 가고 싶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자신도 그랬던 것을 왜 아이는 다르길 바라느냐고 되물었다. 나도 아이만큼 어렸던 시절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5분 거리의 그 등굣길도 싫어서 일부러 벽에 붙어 땅만 보면서 걸었고 교실에서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왜 그랬느냐면, 재미가 없었다. 나에 비하면 아이는 몹시 즐겁게 학교에 가는 편이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