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의 서점을 찾은 사람이 말했다. 챗GPT를 잘 활용하면 삶이 편해질 테니 당신도 써 보라고. 요즘 그걸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웬만해선 유행을 역행하려 하는 내 주변의 작가들도 한 번쯤 써 본 듯하다. 누군가는 내게 챗GPT에게 단편소설을 쓰게 해 봤더니 꽤 그럴듯하게 써서, 사실은 자신보다 잘 쓴 것도 같아서, 그걸 그냥 제출할까 고민했다고도 했다.
내가 아아 그렇군요, 하고 그다지 열없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제가 쓰는 걸 한 번 보여드리지요, 하고는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다. 그 이후엔 뭔가 신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그때 글쓰기 8주차 수업의 커리큘럼을 작성해야 했는데 그가 프롬프트에 “성인을 대상으로 한 8주차의 글쓰기 강의 계획서를 작성해 줘”라고 입력하자 10초 만에 내가 상상했던 모범적인 커리큘럼이 작성되었다. 그가 여러 조건을 넣을 때마다 그것은 정교해져 갔다. 장르는 에세이이고, 피드백을 몇회차 할 것이고, 계획서 내용을 조금 더 흥미롭게 해 달라.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GPT4라는 것의 월구독을 하고 말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제 당신의 삶도 달라질 것이라고, 써 보다가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달라고 말했다.
그 이후 나는 챗GPT의 도움을 종종 받고 있다.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몇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몇분 만에 그 초안을 잡아준다. 예를 들면 어느 기준에 맞추어 맞춤법을 봐 주거나, 기관에 제출해야 할 형식적인 문서를 70% 이상 새롭게 바꾸어 주거나, 글쓰기에 필요한 사례를 찾아 주거나, 하는 것이다. 무언가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물으면 제법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답을 해 주기도 한다. 이만하면 내가 지불하는 월 비용으로는 충분한 듯하여 세 달째 구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종종 이러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과연 괜찮은가, 라는. AI가 이렇게 사람을 대체할 만한 물건이 되어 간다면 사람의 쓸모는 무엇이고 내가 공부해 온 인문학의 쓸모는 무엇인가.
그러나 더욱 상위 버전의 GPT라든가 어떤 프로그램이 개발된다고 해도 괜찮다. 기술을 활용하고 제어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 역설적으로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그만 아닐까. AI를 활용해 소모적인 일의 시간을 아끼게 된 나는 조금 더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막연하지만 생각하게 됐다. 어차피 사람이 기계보다 계산을 빨리하거나 정교한 작업을 하는 건 이전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사람으로서의 선택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다정함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며 이 사회를 지탱시켜 온 힘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아무 관계가 없는 완벽한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를 돕기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 합리와 효율뿐 아니라 감정과 관계를 고려해, 사람은 다양한 선택에 이른다. 기계는 문 바깥의 배고픈 형제를 알아보고 음식을 내어준다든지 하는, 누군가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만으로 전혀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만의 정답을 도출한다.
언젠가는 기계가 사람의 글을 대신 써 나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물을 보며 계속 수정을 요구할 듯하다. 다정함이라는 조건을 넣어 다시 쓰기를. 타인을 상상하는 일상의 다양한 선택들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를 조금 더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 나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누군가를 인간성을 상실할 극한 상황으로 내몰지 않는 것, 모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정한 기술사회의 도래는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