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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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최상급 추천의 언어 책의 뒤표지에는 대개 300자 내외의 추천사가 한두 개씩 수록되어 있다. 유명한 사람이거나 그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할 것이다. 추천사의 분량이나 비용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한 줄에 100만원을 받는 사람도 있고 수백 자를 쓰고서도 10만원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한 글자에 매겨지는 가격을 감안하면 추천사는 가장 비싼 집필 활동임에 분명하다. 그다지 유명한 작가가 아닌 나에게도 종종 추천사를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한 달에 두세 건은 꼭 오는 듯하다. 우선은 내가 이 추천사를 쓰기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되지만, 그렇게 판단했으니 연락이 왔겠지 싶다. 원고를 살펴보고 쓰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그 분량과는 별개로 부담이 찾아온다. 이만큼 쓰기 어려운 글도 없는 듯하다. 그 어떤 글보다 잘 써야 하는 글인 것이다. 이 책이 잘되기를 바라는 편집자의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나. 내가 받는 추천사만큼 출판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책을 적어도 수십 권은 더 팔아야 할 텐데 내가 그만큼을 보전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벌써 미안한 마음이 되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적어 나가고, 그러다가 혹시 오·탈자를 발견하면 표시해 둔다. 추천사가 부족하더라도 “저어, 교정하며 이미 찾으셨겠지만 몇 쪽에 오·탈자가 있으니 확인해 주십시오” 하고 말해 두면, 정상을 참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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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 3월 초, 개학 주간이다. 주변의 학부모들은 겨울방학이 길었다고, 교사들은 그런 게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간이란 저마다의 처지에서 지극히 상대적으로 흐르는 듯하다. 이제 2학년이 된 나의 아이도 자신의 초등학교로 간다. 그가 아침마다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나, 학교 가기 싫어”였다. 개학 첫날에도 그는 적당히 우울한 표정을 하고는 등교했다. 아이의 엄마는 아무래도 전생에 우산장수와 짚신장수 형제의 어머니였던 게 분명하다. 날이 좋으면 우산 파는 첫째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비가 오면 짚신 파는 둘째를 걱정하는 것처럼 아이를 보며 늘 불안해한다. 아이가 왜 학교를 즐겁게 다니지 못하느냐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린 시절에 학교에 가고 싶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자신도 그랬던 것을 왜 아이는 다르길 바라느냐고 되물었다. 나도 아이만큼 어렸던 시절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5분 거리의 그 등굣길도 싫어서 일부러 벽에 붙어 땅만 보면서 걸었고 교실에서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왜 그랬느냐면, 재미가 없었다. 나에 비하면 아이는 몹시 즐겁게 학교에 가는 편이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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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원주여고 학생들을 응원하며 얼마 전 원주여고의 신문 동아리 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교훈을 개정하고픈데 동문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훈의 시대>라는 책을 쓰면서 공립고등학교의 교훈과 교가를 전수조사했고 ‘훈’이라는 언어가 얼마나 낡고 보수적인 형태로 그 구성원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있는가를 살폈다. 남학교의 ‘충성, 용기, 의리’, 여학교의 ‘순결, 고결, 정숙’과 같은 언어들. 산업화와 군부독재 시기에 만들어진 50년이 넘은 그 훈들은 그 시기의 욕망을 담고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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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그들의 명복을 빈다 나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모 지역에서 의무소방원으로 군복무했다. 소방에 대한 꿈과 로망이 있었다기보다는, 휴가가 많고 근무가 그다지 힘들지 않다는 말에 응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방학교에서의 훈련은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만큼 힘들었다. 체력단련 시간에 수없이 들었던 “너희가 힘이 없으면 구조하러 가서 구조당한다”라는 말이 아직도 선명하다. 지역 소방서의 본서에 배치받고 난 첫날 새벽에는 세 번의 사이렌이 울렸다. 스피커에서 마이크를 톡톡 치는 소리가 나자마자, 선임들은 모두가 4층에서 1층까지 뛰어내려갔고, 몇 시간 후 돌아온 그들의 몸에서는 불냄새 비슷한 것이 났다. 물론 그날이 좀 과한 날이었다. 화재가 없는 날들이 조금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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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일과 삶이 조금 더 즐겁길 바라며 <대리사회>라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대리운전은 나에게 온전히 생계를 위한 노동이었다. 그 책이 나온 지도 5년이 지났지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요즘도 나에게 묻는다. 요즘도 대리운전을 하고 계신가요, 하고.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하기는 하는데, 이걸 노동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스타트업의 대표로 일하면서 평일에는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대리운전 콜을 켠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처음 밤 10시의 강남에서 콜을 켰을 때, 나는 알았다. 아아, 여기가 그래서 강남이구나. 반경 1㎞ 이내에 나를 기다리는 수십명의 사람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나는 집이 있는 지역으로 가는 콜을, 아니면 내일 강의가 있는 지역의 콜을 본다. 내가 가고 싶은 어디든 갈 수 있는 듯하다. 그렇게, 원래는 교통비를 지불하고 1시간은 걸려야 갈 거리를, 몇만원의 대리운전비를 받고, 더욱 빠르고 편하게 도착한다. 마치 덤처럼 느껴지는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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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아파트란 무엇인가 대리운전을 할 때, 신도시의 아파트가 목적지가 되면 걱정이 찾아왔다. ‘나가는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요즘의 대단지 아파트는 마치 미로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 어렵다. 내가 심각한 길치인 것을 감안해야겠으나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아이의 한글 선생님도 30분 정도 수업에 늦고서 했던 말이 “새로 생긴 아파트에 갔다가 나오는 길을 못 찾아서 한참 헤맸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 복잡해진 길들은 외부와의 단절, 그리고 폐쇄를 선언한 요즘의 아파트를 그대로 보여준다. 기본 브랜드에 서브 브랜드를 덧붙이고, 거대한 정문을 세우고, 입주민이 아닌 사람이 오가는 것을 통제하고, 입주민만 이용 가능한 커뮤니티 시설을 확장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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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메타버스 in 추석 2019년은 내가 글을 쓰는 삶을 시작한 지 4년차가 되던 해였다. 아니, 글을 쓰는 삶이라고만 하면 안 되겠다. 말을 하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더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의 책을 읽고 나를 작가로서 초청해 주는 분들이 많았다. 주로 독서모임, 학교, 도서관, 기관 등이었고, 나는 그것이 고마워서 대개 거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시간을 맞추었다. 그해에 내가 독자들에게 받은 초청은 230건 정도였다.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만큼 돈을 벌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제대로 집에서 자 본 일이 별로 없을 만큼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다. 몇 년 전만 해도 집과 대학의 연구실을 오가는 게 전부였고 대학교 MT가 아니면 1박 이상의 여행을 가 본 일도 없었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 서른일곱 살, 선배들이 왜 KTX만 타고 특실을 고집하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몸이 힘든 데 더해 기차에서도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를 직접 운전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새벽 5시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오전 10시에 부산의 연수원에서 강연을 하고, 오후 1시에는 경남 김해의 도서관에서 강연하고, 오후 7시에는 전남 순천의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한다. 그러고 나면 축 늘어져서 숙박앱으로 근처의 숙소를 찾아 들어가서는 배달음식을 먹고 글을 쓰다가 잠드는, 그런 나날들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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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는 공정성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젊은 세대가 경쟁에 매몰되었고 그래서 불평등의 구조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MZ세대로 명명된 젊은 세대는 공정이라는 단어에 민감하다. 모두가 알고 있듯,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시대에 적어도 공정성이라도 담보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그들의 결을 잘 파악한, 자신도 MZ세대인 젊은 정치인이 최근에 당의 대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앞으로의 행보는 여러 의미로 흥미로울 것이다. MZ세대는 코인과 주식에 빠져들었다. 공정을 부르짖으면서 자녀에게는 특혜를 주는 고위공직자를 보면서, 갑자기 평생의 기대소득보다 더 올라버린 집값을 보면서, 그들은 많이 절망했을 것이다. 노력도 노동도 덧없다는 마음이 되고 나면 그처럼 자신의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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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두 개의 글쓰기와 말하기 작은 스타트업 대표로 살아온 지도 2년이 거의 다 되었다.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서비스를 만들고, 코로나19 파고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전업작가로 살아가던 때와는 달리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되는 삶이 아니다. 그 무게는 짊어지고도 여전히 잘 가늠이 안 된다. 다만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러 경험을 하면서 여전히 배워나가고 있다. 스타트업은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어떤 회사인지, 무엇을 팔고 있는지, 그래서 이 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을 주는지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 지원서를 쓰는 일은 괴롭다. “작가 출신이어서 이런 것도 금방 쓰시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도 이런 글쓰기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모 스타트업 대표가 “탈모약 원천기술을 개발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면 아마 안 될 거예요”라고 한 말을 종종 떠올리면서 계속 지원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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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너의 입학식과 나의 졸업식 며칠 전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지방의 작은 초등학교는 1학년 전체 인원이 13명이라고 했다. 내가 초등학생이 된, 정확히는 국민학생이 되었던 1990년대 초만 해도 서울 마포의 모 초등학교에는 수백명이 입학했다. 한 반에 40명이 넘게 배정하고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오전 반과 오후 반을 나눴다. 그런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2021년의 이 작은 입학식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교장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코로나19만 아니면 모두 안아주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곤 <틀려도 괜찮아>라는 그림책을 펴고 아이들 앞에서 낭독을 시작했다. “틀린 답도 괜찮아. 하늘의 신령님도 틀릴 때가 있단다”라며 몇 페이지를 읽던 그는, “남은 부분은 여러분이 글을 잘 읽을 수 있게 되면 그때 꼭 읽어보세요” 하곤 모두에게 그 책을 선물해줬다. 나에게 교장이란 조회 시간에 높은 구령대에 올라 훈화를 하고,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그런 모습으로만 주로 기억된다. 그래야 할 그가 틀린 답도 괜찮다고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말해 주었다. 그래서 초등학생처럼 작아졌던 나의 마음 크기도 그때부터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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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유튜브 안 하세요? 작년부터 주변의 작가들을 만나면 인사치레처럼 나누던 말이 있다. “유튜브 안 하세요?” 하는 것이다. 독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유튜브 방송을 해 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해야 할 사람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누구나 하고 있는 것 같으니 하지 않으면 괜히 뒤처지는 마음이 되거나 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우리 대리운전이나 할까…” 하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그 ‘~이나’의 계보를 유튜브가 이어받은 듯하다. 물론 두 노동이 가진 무게감은 다르지만. 작가들 중 자신있게 “네, 저 유튜브합니다”라거나 “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주변에서는 그랬고, 실제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에서도 작가들은 거의 검색되지 않았다. 저마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대개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라는 반응이었다. 여기에서 ‘그런 걸’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유튜브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다. 그 앞에 ‘감히’라는 부사를 붙이면 적절하겠다. 유튜브를 하려면 우선 호감형의 외모가 필수적이고, 말을 잘해야 하고, 매력적인 콘텐츠가 있어야 하고, 화질이 좋은 카메라 여러 대와, 요즘의 감성을 가진 편집자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돈도 많이 들 것이고, 도무지 쉽게 할 수 있는 일로 판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유튜브의 필수조건 중 그 무엇도 제대로 충족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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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나의 장인에게 나의 장인은 평생 농사를 지어온 사람이다. 강원도에서도 시골이라고 할 만한 면소재지에서 약간의 논과 밭을 일구며 산다.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에는 마침 나무를 하러 간 참이라고 했다. 직접 장작을 패서 난방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올 때까지 농가 특유의 그 툇마루 같은 데 앉아서 나를 향해 짖는 두 마리의 누렁이를 바라보았다. 장인이, 정확히는 장인이 될 사람이 경운기에 나무를 싣고 돌아왔다. 그의 첫마디는 “우리 사우가 술을 못하게 생겼구먼. 난 술을 못하면 싫은데 말야” 하는 것이었다. 술을 잘하든 못하든 그런 자리에서는 평소에 없던 능력이 발휘되는 법이다. 오기가 생긴 나는 “아닙니다, 저 술 좋아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럼 어디 한 번 같이 마셔보세” 하는 그의 말에 술자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