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씨, 내 땅의 말로는 부를 수 없는 그대

김택근 시인·작가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가을에 모여 있다. 여름은 빗물에 떠다니다가 겨우 넝쿨장미에 수상한 문신 하나 남기고 사라졌다. 올가을은 유별나다. 노을은 차갑고 바람은 우리를 자꾸 외딴곳으로 끌고 간다. 행동반경이 좁아진 만큼 사색의 영역은 넓어졌는가. 가을이 들어찬 밤하늘에서 윤동주의 별을 헤아리다 문득 그의 다른 시를 떠올린다.

김택근 시인·작가

김택근 시인·작가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윤동주 ‘또 다른 고향’) 갑자기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온다. 별 속에서 죽은 자들이 내려와 잠자리를 헤집고 들어온다.

코로나19가 침공한 이후 자주 죽음이 떠오른다. 천재지변이나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의 최후는 어땠을까.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만 그 끝은 평화로워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키우며 늘 품고 다닌다. 죽음과 화해하지 못한 죽음은 얼마나 외롭고 두렵겠는가.

풀벌레 소리를 돋워서 죽은 자들이 차지한 시간을 쓸어내면 이내 산 자들이 다가온다. 그들과 함께 살아 있음에 안도한다. 아무 말 없이 한나절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은 사람, 연락을 하지 않아도 생각만으로 듬직한 사람, 떨어져 있어도 같은 시간에 밥을 먹는 사람, 결국 사람이어서 그냥 좋은 사람.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말세의 풍파에 맞선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럼에도 다시 두렵다. 세상의 종말은 어디쯤에 있는가. 따져보면 인류는 오래전부터 종말을 부르고 그 종말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인간은 자신들만은 운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만큼은 무탈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후는 변했고, 자연은 이제 인간 편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지난여름 하늘과 땅과 바람은 인간의 세계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어느 날 세상은 바늘에 찔린 비눗방울처럼 그렇게 꺼져버릴 것인가.

과거에도 기후변화는 민족의 이동을 촉발시켰고 기존의 문명사회를 붕괴시켰다. 그때마다 새로운 종교와 사상이 탄생했다. 기원전 1000년쯤에는 기후 한랭화가 세계 곳곳을 뒤흔들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그런 궁핍한 시대에 예수, 석가, 공자 등이 출현했다. 이들 성인이 설파한 것은 바로 이타(利他)의 정신이었다. 남을 위한 삶이 개인은 물론 인류를 구했다.

인류세의 기후변화는 민족의 이동 정도의 재앙이 아니다. 모든 지구인이 이동할 신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유한의 지구에 무한의 욕망이 출렁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음식도 정보도 욕망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섭취한다. 육체도 정신도 살이 올라 뒤뚱거리고 있다. 이타의 정신을 외면한 종교는 그 심장이 식어가고 있다. 고삐가 풀린 욕망만이 이리저리 날뛰며 호모사피엔스의 정체성까지 흔들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내릴 곳은 인간의 마을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위로받을 수 없고 자신을 쓰다듬어 줄 수 없다. 함께 있어서 내일이 있다. 지하철을 타면 나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만 보인다. 눈이 눈을 본다. 그러면 눈이 말을 한다. 눈 속에 감정이 들어 있다. 자세히 보면 마음까지 담겨 있다. 간밤 가을이 찾아왔느냐고 인사를 한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생각할수록 당신은 귀한 존재라며, 당신이 건강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을 건넨다. 세상은 이름 없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 끌고 간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속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습니다. 흘러 들어온 하늘 일부는 맑아져 사람이 없는 산속으로 빨려 듭니다. 사람이 없는 산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무명씨(無名氏),/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신대철 ‘사람이 그리운 날 1’)

오늘 아침 햇살이 유난히 곱다. 가을 햇살에는 많은 것들이 묻어 있다. 낡고 못생긴 손을 햇살에 담가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다.

이름을 몰라 부르기 좋은 당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기를. 부디 강건하기를. 제발 자연도 돌아오시기를. 당신이 있어 오늘 살아 있다. 내 땅의 말로는 부를 수 없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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