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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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충고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올여름에 나온 그의 새 저작 <대변동>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이아몬드는 지식과 지식인의 사회학을 공부해온 내게 매우 이채로운 학자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그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공적 지식인’이다. 전문적 지식인이 지식사회 안에서 학술 연구로 주목받는 이들이라면, 공적 지식인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지적 담론을 펼쳐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말한다. 다이아몬드는 2005년 미국 ‘포린 폴리시’와 영국 ‘프로스펙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공적 지식인 가운데 아홉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둘째, 그는 생리학·지리학·인류학·역사학 등을 포괄하는 이른바 ‘빅 히스토리’의 문명학자다. 학문의 전문성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지식사회에서 그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고, 그의 저작들은 대학생과 시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누려 왔다. 예를 들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총, 균, 쇠>는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는 필독서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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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세계화 담론’에 결정적 영향, 월러스틴을 기억하며 지난 몇 해 동안 서구의 ‘공적 지식인’을 대표해온 사회사상가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2015년에는 울리히 벡이, 2017년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리고 2019년 올여름 끝자락에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유명을 달리했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앤서니 기든스가 살아 있지만, ‘68혁명’으로 시작된 서구 비판 사회사상의 한 시대가 마감하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소회가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벡, 바우만, 월러스틴이 모두 주목한 현상이 세계화였다는 점이다. 벡은 ‘위험사회’ 이론가답게 위험의 세계화를 날카롭게 분석했고, 바우만은 ‘액체현대’ 이론가답게 지구적 차원에서 관찰되는 자유와 불안, 애착과 공포의 공존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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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기후위기의 생태학적 계몽 생태학은 오랜 관심사의 하나였다. 사회학이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그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삶과 사회를 모색한다. 생태학 저작들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적인 책은 미국 산림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가 쓴 <모래 군(郡)의 열두 달, 그리고 이곳저곳의 스케치>(1949)다. 이 책 제2부에는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에세이가 나온다. 레오폴드가 산림감독관으로 일했을 때 겪었던 늑대 사냥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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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40대를 생각한다 지난주 한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40대의 사회학에 대해 발표했다. 40대를 어떻게 부를까를 놓고 내가 선택한 이름은 ‘낀낀세대’다. ‘낀낀’에는 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인, 앞과 뒤가 다 막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낀낀세대는 20대였을 때 ‘X세대’라 불렸다. X세대는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의 소설 <X세대>에서 유래했다. ‘X’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앞선 냉전세대나 히피세대와는 다른,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탈권위적 의식을 갖고 있었고, 소비문화에 익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세대를 ‘자유의 아이들’이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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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광복절 74돌을 맞이하며 세계화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다. 당시 정부는 세계화를 국정 과제로 적극 추진했다. 세계화는 국가 간 교류가 증대함으로써 국가 간 관계가 새로운 변화를 겪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간 교류의 양적 증대가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였다면, 그 관계의 질적 변형은 세계화(globalization)로 명명됐다. 세계화 현상을 ‘인터내셔널리제이션’이 아니라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계화를 지탱해온 양 축은 정보혁명과 신자유주의였다. 정보혁명이 24시간 투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금융자본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게 했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유화·탈규제·민영화를 내세워 ‘미국식 자본주의’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강제하게 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말한 ‘보수의 시대’란 1980년대부터 열린 이 신자유주의 시대 또는 세계화 시대를 함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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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최인훈을 기억하며 얼마 전 뜻밖의 모임에 초대 받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최인훈 선생의 1주기 모임에 와서 추모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최인훈 전집>을 펴낸 문학과지성사의 부탁이었다. 청소년 때부터 존경해온 선생을 추모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뜻깊은 일이었지만 문학을 잘 모르는 사회학 연구자이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선생의 가족이 추모사를 요청했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게 됐다. “아내가 물컵을 찾아 내게 주면서 말했다. / ‘저더러 애들 데리고 왔다 가라시는군요.’ /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다. / ‘응 그러시는군. 일부러 내가 올 건 없고, 오겠거든 애들 데리고 당신을 보내라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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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절반의 모더니티’로서의 한국 사회 최근 흥미로운 사회의식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아니 안타깝고 서늘한 자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V)’가 그것이다. 이 연구보고서는 계층갈등, 젠더갈등, 세대갈등, 공공갈등을 중심으로 사회갈등과 사회통합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보고서에서 나의 시선을 특히 끈 내용은 두 가지다. 먼저 타인 신뢰에 관한 것이다. 조사 문항은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에 대한 ‘동의’와 ‘반대’로 이뤄져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동의(‘매우 동의’와 ‘약간 동의’)는 63.15%이고, 반대(‘매우 반대’와 ‘약간 반대’)는 13.25%다. 이어 나를 이용할 가능성에 대한 인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조사 문항은 ‘만일 조심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에 대한 동의와 반대로 구성돼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동의는 54.24%이고, 반대는 16.2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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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1984’ 출간 70년, 조지 오웰을 기억해야 할 이유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인문학 가운데 철학과 역사학은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 사회과학의 기초를 이뤄왔다. 그러면 문학은 사회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문학 가운데 사회과학에 영감과 통찰을 안겨준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84>를 들고 싶다. 특히 <1984>는 사회학·정치학·신문방송학 등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오웰은 이 소설에서 당대 현실을 해부한다. 그가 겨냥한 것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비판이다. 둘째, 오웰은 미래 사회를 전망한다. 그가 우려한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감시사회로서의 미래다. 오웰이 예견한 것은 디스토피아 세계다.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라는 우울하고 섬뜩한 오웰의 경고는 정보사회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을 이뤄왔다. 널리 알려졌듯 <1984>는 초고가 쓰인 1948년의 ‘48’을 ‘84’로 바꾼 것이다. 이 초고가 1949년 6월8일 세상에 나왔으니 지난 토요일은 <1984> 출간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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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가족을 생각한다 지난해 2월 말부터 올해 5월 초까지 한국일보에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라는 기획을 매주 연재했다.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서부터 현재까지 우리 지성사를 돌아보려는 게 그 의도였다. 60명의 지식인들이 그 대상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다룬 이들은 시인·소설가·평론가를 포함한 문학가들이었다. 문학가들이 다룬 주제들은 그렇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 민족과 역사와 사회가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그런데 이 못지않게 우리 문학가들의 시선을 끈 주제는 가족이었다. 60명 중 한 사람인 박완서의 소설 <엄마의 말뚝>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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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우리 시대를 생각한다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은 ‘제3의 사회과학’이라 불린다. 근대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정치학, 경제학에 이어 세 번째로 체계화됐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정치·경제를 제외한 계급·조직·세대·문화 등을 연구 영역으로 삼는다. 동시에 사회학이 다른 사회과학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정치, 경제, 문화를 포괄하는 전체사회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정치학, 경제학과 비교해 사회학이 때때로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사회학의 이런 태생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사회 전체의 변화를 조망하는 게 사회학의 과제라면, 사회학의 시각에서는 2010년대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몇 달 남아 있지 않은 이 2010년대를 후대의 역사가들은 예상하건대 대침체 이후 암중모색기였다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대침체란 2008년 금융위기를 지칭한다. 금융위기가 1980년대 이후 공고화된 신자유주의 질서를 해체시키기 시작한 이래, 특히 서구사회에서 지난 10년은 새로운 질서로 가는 변화와 혁신, 그리고 그 이면을 이루는 불안과 분노가 혼돈스럽게 뒤엉켜 있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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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임시의정원 100주년을 기념하며 4월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조직이 ‘임시의정원’이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의장에는 이동녕이, 부의장에는 손정도가 선출됐다. 임시의정원은 다음날인 11일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임시헌장 제1조는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임시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이를 통치함”으로 돼 있다. 이 규정은 임시의정원이 오늘날 국회가 맡은 역할인 입법 기능과 행정부의 견제 및 균형 기능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임시헌장 제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으로 규정돼 있다. 독립을 이루면 정식으로 국회가 될 것이기에 임시의정원에 ‘임시’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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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한 시민 사상가에 대한 기억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유신체제가 종막을 향해 가던 시절이었다. 사회학과가 지금은 사회과학대학에 있지만 그때는 문과대학에 속해 있었다. 당시 널리 알려진 문과대학 교수는 세 사람이었다. 국문학과 박두진 교수, 사학과 김동길 교수, 철학과 김형석 교수였다. 세 교수 가운데 내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이는 김형석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인 <고독이라는 병>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의 저자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대개 그러하듯, 대학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배우기 전에는 제도와 구조보단 개인과 실존을 중시한다. 유신독재의 그늘이 짙었던 1970년대 중·후반, 그 그늘을 만들었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등장과 작동 방식에 대한 사회과학 지식이 부족했던 10대 후반인 내게 고독, 사랑, 영원과 같은 어휘들은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 위안을 안겨줬다. 그땐 몰랐지만 구조적 강압이 클수록 자아는 추상의 개념들로 쌓아올린 실존적 성채 안에 홀로 거주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