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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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코로나 애프터 3년의 희망에 대하여 사회학을 공부하며 발견한 사실이 있다. 움직이는 역사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역사의 움직임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아오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지난 20일 코로나 3년을 맞이하며 떠오른 경구다. 우리나라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것은 2020년 1월20일이었다. 미국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역사가 이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눠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프리드먼 어법을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는 ‘AC 3년’의 현재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2년 이 코너를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의 사회학에 관한 글들을 더러 써왔다. 오늘 칼럼이 마지막 글이기에 이 팬데믹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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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시대교체의 정치적 리더십을 기다리며 2022년 새해를 맞이한 마음, 복잡하다. 코로나19 폭풍이 3년째다. 올해는 팬데믹이 끝날 건가. 두 달 후 대선은 어떨까. 정권교체냐 아니냐의 구도만 변화 없을 뿐, 리더십과 전략 등 다른 것들은 낯설게 느껴진다. 정치사회학자인 내가 발견한 20대 대선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유력 대통령 후보들의 개인적 특성이다. 현재 당선이 유력한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는 국회의원 경력이 없다. 이런 두 사람이 주요 정당의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당내 경선 과정에서 이재명 후보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낙연 후보를 이겼고, 윤석열 후보 역시 정치 경력이 풍부한 홍준표 후보에게 승리했다. 이 사실은 국회에 대한 다수 국민의 불신을 증거한다. 정치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거부가 국회 밖에서 새로운 리더를 찾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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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아듀, 2021년! 2021년이 저물어간다. 정치사회학 연구자인 내가 보기에 지난 1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두 가지 이슈는 계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본격화된 20대 대통령 선거였다. 지난 19대 대선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국면 속에서 ‘조기 대선’으로 치러졌다면, 2022년 대선은 팬데믹 국면 아래서 ‘특이 대선’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특이’란 팬데믹이라는 비상한 국면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지난해 봄부터 시작된 이 팬데믹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최근 오미크론 변이의 지구적 확산과 단계적 일상회복의 어려움은 팬데믹이 처한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그 딜레마란 방역과 경제가 마주한 제로섬 관계를 의미한다. 방역과 경제는 양자택일의 이슈가 아니다. 둘 다 중요하다. 문제의 핵심은 그 나라의 상황에 걸맞은 방역과 일상회복의 균형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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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2022년 대선의 시대정신 (3) 지난 3월 이 칼럼에서 같은 제목의 글을 두 번 썼다. 내년 3월9일 대선을 1년 앞두고서였다. 그동안 후보들이 선출됐다. 이제 대선이 10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경쟁 국면이 열렸다. 변화된 정치지형 아래서 2022년 대선의 시대정신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고자 한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대선 열기가 옛날 같지 않다는 점이다. 정치사회는 뜨거운 반면 시민사회는 미지근한 것처럼 보인다. 나만 그럴까. 까닭을 찾는다면 세 가지다. 첫째, 후보들에 대한 호감보다 비호감이 두드러진다. 비호감도가 높은 후보들로 치러지는 특이한 대선이다. 둘째, 팬덤도 과거만 못하다. ‘빠’든, ‘파’든 특정 후보에 대한 절대적 혹은 맹목적 지지가 두텁지 않다. 셋째, 정권교체 프레임의 영향력이 거세다. 프레임이 압도적인 만큼 리더십·비전·정책의 차이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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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포퓰리즘과 탈진실 시대의 대선 선거는 시대를 반영한다. 정치사회학을 오랫동안 공부하며 내가 발견한 경험적 진리다. 어떤 선거라도 그 선거가 놓인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사회에서 치러진 대선들도 그렇다. 2002년 대선은 당시 절정을 구가했던 민주화 시대로부터, 2007년 대선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던 신자유주의 시대로부터, 2012년 대선은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로부터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2017년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상징하는 앙시앵레짐의 붕괴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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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다시 코로나 시대를 생각한다 9월 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올해 연구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지체됐다가 가을 학기를 맞이해 출국하게 됐다. 뒤늦은 미국행은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게 코로나 시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출국하기 직전 코로나 검사를 받아 음성인 결과를 제출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곧바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대학은 5일간의 출입 금지와 코로나 검사를 요청했다. 가을 학기부터 전면적 대면 강의를 시작했기에 캠퍼스 내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 벌써 2년이 다가온다. 지난해 초 코로나 시대가 시작됐을 때, 나는 이 시대의 성격을 세 개의 키워드, ‘이중적 뉴노멀’, ‘글로벌 위험사회’, ‘국면사’로 규정한 바 있다. 이중적 뉴노멀이 ‘경제적 뉴노멀’에 ‘의학적 뉴노멀’이 결합된 것을 뜻한다면,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주조한 글로벌 위험사회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테러리즘, 금융위기, 기후위기와 함께 민족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은 지구화된 위험의 또 하나의 사례임을 함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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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메르켈의 리더십을 생각한다 1980년대 중반 공부하기 위해 독일에 도착했을 때 헬무트 콜 총리가 이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콜은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 출신의 정치가였다. 당시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았던 내게 보수적인 기민당은 독특한 존재였다. 대서양 저편 보수적인 미국 공화당이 자유시장주의를 내건 것과 달리, 독일 기민당은 시장의 한계와 정부의 적절한 개입을 주장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경제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또 정치 국면의 변화에 따라 과감하게 대연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전통 보수와 기민당식 중도 보수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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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대통령 선거와 문화 전쟁 최근 발표된 한 자료로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을 생각해보고 싶다. 지난 6월 국제여론조사기관 입소스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정책연구소는 미국·독일·중국·일본 등 세계 28개국의 ‘문화 전쟁(culture war)’에 대한 조사를 공개했다. 그 나라들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이 느끼는 문화 전쟁의 강도는 12개 항목 중 7개에서 1위를 기록했다. 빈부·정당·이념·종교·남녀·세대·학력 간 긴장이 그것들이었다. 이민과 인종 항목에서만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문화 전쟁이란 1991년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헌터의 <문화 전쟁: 미국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이란 책으로 알려진 말이다. 헌터는 이른바 ‘결정적 이슈들(hot buttons)’, 예컨대 낙태·정교 분리·프라이버시·동성애·총기 소지 등을 쟁점으로 미국 사회가 둘로 나뉘어져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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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직업으로서의 대통령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내놓은 이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원래의 텍스트는 1919년 뮌헨대학에서 이뤄진 강연이었다. 짧은 저작임에도 지난 100년 동안 정치학과 사회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버가 말한 직업은 ‘소명’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일인 만큼 헌신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직업으로서의 대통령’은 어떨까.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일까. 에이브러햄 링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미국이 만들어졌을까.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산업화와 민주화는 어떻게 됐을까. 정치 현상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 제도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을 일방적으로 중시할 순 없다. 그러나 정치 현상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리더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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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코로나의 시간, 대선의 시간, 미래의 시간 최근 우리 사회에 흐르는 두 개의 시간을 생각한다. 첫 번째는 ‘코로나19의 시간’이다. 지난해 벽두부터 코로나19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사회를 뒤흔들어 왔다. 우리 사회의 경우 지난주부터 4차 대유행이 시작됐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지 않는 한, 이번 유행은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을 듯하다. 무엇보다 국민 다수가 지쳐 있다. 코로나19 감수성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국민 전체의 긴장도를 상승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4차 대유행에 대해선 오락가락한 정부 방역 대처의 책임이 작지 않다. 정부는 의학적 방역 못지않게 자영업자 등을 위한 경제회복이 중요한 만큼 이 둘의 균형을 잡으려 해왔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린아이 감염을 염려하는 부모의 입장과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영업자의 입장은 다르다. 방역과 경제는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는 두 마리 토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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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나의 시대’를 생각한다 칼럼에서 주어를 ‘우리’가 아닌 ‘나’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이다. 당시 서구 개인주의 물결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모호하다. 나는 분명하다. 나의 욕망·이익·가치를 선행하는 건 없다. ‘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 논리가 철학에서는 자명한 이치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그 대표 담론이다. 그런데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에서 ‘나’, 다시 말해 ‘개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1980년대였다. 선구자는 울리히 벡이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개인으로서의 나’를 주목했다. 개인적 차원에서 위험사회론의 핵심은 ‘인지적 주권’의 위협이다. 위험사회의 도래는 이제 개인에게 자기 삶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가야 하는 과제를 안겼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일까. 개인으로서의 내가 자유롭지, 행복하지 않은데, 사회라는 공동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벡이 말하는 ‘자유의 아이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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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칼럼 한국 보수를 생각한다 나는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가 진보와 생산적으로 경쟁할 때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보수는 두 차례의 혁신을 모색했다. 첫 번째, 1970년대 후반 보수는 하이에크 등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신보수로 거듭났다. 미국 레이거노믹스와 영국 대처리즘은 대표 사례였다. 앤서니 기든스는 이 신보수를 ‘모순적 혼합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경제적으론 시장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중시한 반면 정치적으론 가족 등 공동체의 보존을 중시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모순적 성격에도 보수는 권력을 획득했고, 신보수주의 시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