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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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나에게 건네는 덕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올해 사업이 잘되었다지?” “건강이 더 좋아졌다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축하하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말하는 데에 돈 드는 것 아니니 부담 없이 하게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더욱 간편하게 전할 수 있다. 주는 것 없이 받으라 하고, 받은 것 없어도 기분 좋은 것이 덕담이다. 사실 복은 사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복(祝福)과 신(神)의 한자에 제단(祭壇)의 모양을 본뜬 기(示)가 공통으로 들어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은 본디 초자연적 존재와 연관된다. 한 해 내내 반복되어 온 일상의 고리를 잠시나마 끊고, 새해에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잘 안되던 일들까지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건네는 말이 덕담이다. 그러기에 내가 주지 못하면서도 상대가 받기를 바랄 수 있고, 이미 받은 것처럼 선언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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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작심삼일 새해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마다 많이 들리는 성어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새해의 시작을 맞아 운동, 금연, 외국어 공부 등 모처럼 작심한 일들이 며칠 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만 데 대한 후회와 자괴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이다. 작심삼일은 고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사흘 고기 잡고 이틀 그물 말린다는 뜻의 ‘삼천타어(三天打魚) 양천쇄망(兩天쇄網)’이라는 중국어 표현, 머리 깎고 승려가 된 지 사흘 만에 못 견디고 환속한다는 뜻의 ‘삼일방주(三日坊主)’라는 일본어 표현 등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작심삼일은 17세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우리 고유의 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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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몰라도 되는 세상 불확실한 시대다. 어제 의심할 나위 없이 진리 혹은 최선이었던 것이 오늘 낡고 틀린 것으로 치부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늘을 기준으로 내일을 기획하기가 점점 더 난감해진다. 이미 우리의 생활이 된 주변만 둘러봐도 모르는 것 천지다. 스위치만 올리면 환하게 밝혀주는 전기가 어떻게 발생해 여기까지 전달되는지, 손에 달고 사는 스마트폰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 간다. 작동 원리를 몰라도 사용법만 알면 아무런 불편이 없다. 누군가는 새롭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머릿속의 생각을 현실로 구현해서 우리 손에까지 올 수 있도록 기획하여 성사시켰을 테지만, 그것을 아는 건 우리에게 중요치 않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음을 당연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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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송구영신의 마음 이맘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그믐날 뜨는 해와 설날 뜨는 해가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구획을 지어 떠들썩하게 의미를 부여해온 데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구태를 훌훌 떨쳐버리고 새 희망을 맞이하고 싶은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6세기 시인 노수신은 연말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지은 시에서 “어지러운 잡념들이 꼬리 물고 일어나니, 가볍게 다스려 조장도 망각도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더 번잡해지는 마음을 무겁게 억제하려 하면 오히려 안정을 이룰 수 없는 법, 조바심에 일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되 그렇다고 손 놓고 방기해서도 안된다는 맹자의 말을 송구영신의 마음가짐으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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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너무 작은 뜨락 “군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맞추어 행할 뿐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사서삼경에 빠져 살았던 옛사람들은 과연 <중용>의 이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서 욕심 없는 삶을 살았을까? 부귀든 빈천이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군자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여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늘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채 남 탓, 하늘 탓을 일삼는 것이, 예나 이제나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18세기 문인 조귀명은 평생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종일 서재에서 책만 읽곤 하던 그에게, 가끔 방문을 열면 내려다보이는 뜨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세계였다. 작은 뜨락이지만 쏟아지는 달빛을 듬뿍 받아 안기에는 충분하다. 그 빛에 어른거리는 꽃과 나무의 그림자들은 맑은 물속에 마름풀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듯 마음까지 일렁일렁 춤을 추게 한다. 고즈넉한 즐거움을 누리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 “그대의 뜨락은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조귀명은 크고 작음이란 마음에 달린 일일 뿐이라고 답하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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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장점이 없는 사람 당 고조는 스물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둘째 아들인 이세민이 피비린내 나는 냉혹한 권력 다툼 끝에 고조를 무력화시키고 왕위에 오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이세민도 열네 번째 아우인 이원궤만큼은 유독 총애하였다. 이원궤는 깊은 학식과 바른 행실로 당대에 높이 인정받았다. 자신의 형제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지를 묻는 태종 이세민의 질문에 재상 위징은 “오왕(이원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늘 저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라고 답했다. 이원궤는 선비 유현평과 격의 없이 지냈다. 어떤 이가 유현평에게 이원궤의 장점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장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하는 상대에게 유현평은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에게 단점이 있어야 장점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분은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 제가 무엇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모든 면이 완벽해서 특정한 장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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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11월의 방정환 ‘어린이’는 1920년 방정환 선생이 외국 동시를 번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래 어린이날 선포, 월간 ‘어린이’ 발간 등을 통해 점차 일반화된 어휘이다. 근대 계몽운동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강조된 ‘소년’과 비교할 때, 어린이라는 말에는 윤리적,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어린이를 뜻하는 한자는 유(幼)이다. 한 가닥 실의 모양을 본뜬 요가 작다, 약하다 등의 뜻이고 여기에 역(力)을 더한 유(幼)는 힘이 약한 아이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2500년 전에 나온 <주례(周禮)>의 백성 양육 정책이 자유(慈幼)와 양로(養老)로 시작된다는 사실에서, 연약한 존재인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幼)가 대개 노(老)와 함께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사용되는 데 반하여, 방정환 선생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어린이’는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인격 존재임을 부각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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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고니와 닭 별로 사용하지 않아 낯설어진 우리말 어휘 중 하나로 새 이름 ‘고니’가 있다. 대신 ‘백조’라는 어휘가 주로 사용되는데 이는 본디 ‘하얀 새’의 통칭이었고, 한자 곡(鵠)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고니다. 백조 혹은 ‘스완(swan)’이라고 부를 때의 우아함이 고니에서는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1980년대 유행한 노래 제목 이후로는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고니는 다른 새에 비해 몸집이 크고 빛깔이 깨끗해서 예로부터 상서로운 새로 여겨졌다. 그런데 한(漢)나라 왕충(王充)은 사람들이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기는 까닭이 단지 고니는 멀리 있고 닭은 가까이 있기 때문일 뿐이라고 했다. 옛날의 공자나 묵자만 귀한 줄 알고 동시대 인물이 아무리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도 하찮게 여기는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끌어온 이야기다. ‘귀이천목(貴耳賤目)’이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멀리서 전해들은 것은 대단하게 여기고 가까이에서 본 것은 함부로 대한다는 뜻이다. 유독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 것은 예수만이 아니다. 공자 역시 동네에서는 함부로 불렸다. 우(虞)나라의 군주는 궁지기라는 인물이 올린 적절한 간언에 대해 그가 자신과 어릴 적 편하게 어울린 사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다가 나라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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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다시, 친구가 필요한 시대 ‘함께 살지는 않지만 아내와도 같은 존재(不室而妻).’ 이덕무가 친구를 정의한 말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匪氣之弟)’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친구관계를 부부에까지 견준 것은 과해 보인다. 18세기 조선에는 전생의 부부로 불린 친구도 있었다. 열 살 터울의 시인 신유한과 최성대는 서로의 시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 남다른 우정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방 안에서 즐겁게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은 주인집 노파가 꽃다운 여인을 숨겨둔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우정’이라는 어휘조차 낡게 느껴지는 오늘, 옛사람들의 우정에 대한 범상치 않은 일화들을 접하면 낡음이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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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참으로 구차한 시대 많이 사용하는 어휘 중에 의외로 의미의 외연과 유래가 간단치 않은 경우들이 적지 않다. ‘구차(苟且)하다’를 한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살림이 몹시 가난하다’가 첫 번째 뜻으로 나온다. 중국어사전에는 ‘그럭저럭 되는 대로 하다’, 일본어사전에는 ‘일시적이다’가 통용되는 의미로 등재되어 있어서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가장 이른 시기의 출전으로 알려진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글에서는 통치자에게 ‘구차한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이익에 좌우되지 말고 굳건해야 함을 강조하는 문맥이다. 한(漢)나라 순열(荀悅)은 진(秦)이 14년 만에 멸망한 이유로 ‘구차한 정치’를 들었는데, 성현이 제시한 보편적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많이 달라 보이던 의미들이 대체로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일시적인 편의에 따라 대충 봉합하며 지나치는 태도’로 수렴된다. 한국어사전의 두 번째 뜻인 ‘말이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과 그 주된 용례인 ‘구차한 변명’ ‘구차한 목숨’ 등의 표현 역시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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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이번 추석에는 한자어의 대다수는 한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지만, 각 나라 내에서만 통용되는 한자어도 적지 않다. 의외의 경우 중 하나가 ‘추석(秋夕)’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추석이라는 말은 쓰이지만 말 그대로 ‘가을 저녁’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오래전부터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해 왔다. 중국도 음력 8월15일을 4대 명절로 치지만 그 명칭은 중추(仲秋 혹은 中秋)이다. 가을 석 달 중 가운데 달,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날을 가리킨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 넉넉한 보름달 아래 풍성한 결실을 즐기는 추석은 농경사회를 살던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 바란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 좋은 날을 시로 읊어 왔다. 친지와 함께 즐기는 명절의 풍성함을 노래한 시들도 다양하지만, 그 기쁨이 클수록 더욱 커지는 향수와 그리움을 담은 시도 못지않게 많다. “중추삼오야(仲秋三五夜)”로 시작하는 백거이의 시는 달빛 걸린 마루에서 술잔 앞에 홀로 앉아 멀리 떨어져 있는 네 명의 벗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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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고단한 일상의 찌꺼기를 없애려면 얼마 전 운전 중에 생소한 경고등이 들어와서 당황한 일이 있다. 찾아보니 ‘D.P.F(Diesel Particulate Filter)’ 가동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디젤 엔진에서는 입자상 물질이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환경보호를 위해 D.P.F가 걸러낸 물질을 차량 내부에서 높은 온도의 열로 태워 처리함으로써 외부로 배출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 이 기능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일정 속도, 일정 시간 이상 달려 줘야 한다. 그런데 장거리 주행을 하지 않고 단거리 이동에만 반복적으로 차량을 이용하다 보니 배출 물질이 처리되지 못하고 쌓여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