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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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길을 잃은 분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좋아요” 하나뿐이었다. “싫어요”도 추가해 달라는 이용자들의 요청에, 오히려 “최고예요” 등의 공감 이모티콘들을 추가했다. 그 가운데에는 “화나요”도 있지만, 이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게시자가 분노하는 내용과 대상에 나도 함께 분노한다는 공감의 표현이다. 분노의 대상이 공적이고 명확할 때 소셜 네트워크 내에서의 확산은 매우 빠르다. 공감을 넘어서 새로운 근거와 논리를 장착한 주장으로 결집되어, 웹서비스 바깥의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정의(正義) 역시 특정한 시야에 제한될 때가 적지 않아서, 의분(義憤)이라고 믿고 휘두르는 칼날이 의도치 않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마저 날카롭게 파고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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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나를 보는 눈 내 몸에 세상의 온갖 곤고함이 다 이르러 흉하게 쇠하였으니, 원통하고 분하여 얼음을 품에 안은 듯하고 근심스럽고 두려워 창자에 바퀴가 구르는 듯하다. 평생 도를 배우고도 죄목은 의리를 어긴 소인이고, 태평성대를 만나고도 신세는 변방에 유배된 외로운 신하다.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걱정하니 머리털 난 중이요, 수염 난 아녀자다. 보름마다 점고 받으니 사로잡힌 죄수요, 열병하는 병사다. 촌구석 훈장 노릇이나 하며 아이들의 우두머리로 불리고 있다. 1802년 10월21일 심노숭이 쓴 일기다. 그는 유배형에 처한 상황에서 20책 분량의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5년4개월 동안 일기를 빠뜨린 날이 열흘도 채 되지 않는다. 다양한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유배 생활의 어려움 가운데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 때로는 적나라한 욕정의 고백까지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심노숭은 이 외에도 여러 편의 일록과 실기, 심지어 편년체 연보로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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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유세가와 유튜버 바람난 아내가 여종을 시켜 남편에게 독이 든 술을 권하게 했다. 여종은 진실을 말하자니 파탄에 이를 것이 걱정되었고 그렇다고 남편을 죽일 수도 없어서, 거짓으로 쓰러지면서 술을 엎질러 버렸다. 여종은 화가 난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해야 했지만, 자신의 거짓으로 부부를 지킬 수 있었다. 전국시대 유세가 소진(蘇秦)은 연합하여 진나라에 맞서는 합종책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약육강식의 이해관계가 얽힌 각국의 왕을 설득하기 위해 소진이 구사한 논리와 언변은 다양하고 화려했다. 그러나 불과 15년 만에 진나라의 이간질로 합종의 맹약은 깨지고 만다. 궁지에 몰린 소진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 왕을 속여 빼앗겼던 성 10개를 돌려받게 해준다. 그러나 연나라 왕은 소진을 냉대하였다. 그의 거짓됨을 비방하는 이들 때문이었다. 소진은 자신이야말로 충신이라고 하면서 위의 여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설복된 연나라 왕은 그를 다시 예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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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곧음과 굽음을 분별하는 법 당나라 때 문장가 유종원은 <참곡궤문(斬曲궤文)>이라는 글을 남겼다. 궤(궤)는 앉아 있을 때 몸을 기대는 가구인데, 굽은 나무로 만든 궤를 보고 칼로 베어버렸다는 내용이다. 굽은 것을 늘 곁에 두다 보면 간교한 마음이 생길 수 있으니 과감하게 없애버림으로써 곧음을 지향하는 뜻을 표한 것이다. 곧음을 군자에, 굽음을 소인에 빗대 온 오랜 전통 위에서, 늘 왕 곁에 붙어 아첨을 일삼는 환관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비유로 쓴 글이다. 19세기 조선의 사상가 심대윤은 유종원의 이 글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자연 만물에는 생김새가 곧은 것도 굽은 것도 있기 마련이고, 활이나 바퀴, 갈고리처럼 굽어야 유용한 도구들도 있다. 곧아야 할 것을 왜곡해서는 물론 안 될 일이지만, 곧은 것과 굽은 것은 각각의 용처가 있으니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심대윤의 기준은 공리에 비추어 이로운지 해로운지에 있다. 곧더라도 해로우면 버려야 하고 굽었더라도 이로우면 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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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멈춰 서서 다시 묻기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글씨를 볼펜으로 쓰는 것도 선망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연필로 써야 좋은 글씨체를 갖출 수 있다며 볼펜을 못 쓰게 했지만, 어린이는 잘못 쓰는 일이 많으므로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써야 한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한 것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라는 이유가 사랑의 실패를 경험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잘못 써서 지워야 할 일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연필을 어린이의 전유물로 여기곤 한다. 그럴수록 모르는 것, 잘못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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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규범이 보이는 자리 “일반인은 해오던 대로 안주하려 하고 지식인은 자신이 아는 것에만 빠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존의 규범을 지킬 줄만 알 뿐, 그 규범을 벗어나서 논의할 줄은 모릅니다. 하(夏)·은(殷)·주(周) 삼대는 예가 서로 달랐지만 각기 왕업을 성취했고, 다섯 제후는 법이 서로 달랐지만 각기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예를 만들지만 어리석은 자는 예에 얽매이며, 훌륭한 자는 법을 바꾸지만 모자란 자는 법에 붙들립니다.” 기존 규범의 고수를 주장하는 대신들과 논쟁하며 공손앙이 한 말이다. 통용되는 규범을 바꾸기 어려운 것은 지금이나 2400년 전이나 다르지 않다. 익숙한 규범에 따라서 잘 운영하는 편이 안전하지 혁신은 혼란을 자초할 뿐이라는 것이, 당시 진나라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감룡, 두지 등의 반대 논리였다. 오늘날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규범을 바꾸려 할 때도 비슷한 반대에 부딪히곤 한다. 일상으로 굳어진 규범의 내부에 갇히면 그 규범을 바라볼 수도 없고, 그것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도 없다. 규범을 보려면 규범 바깥의 자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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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어쩔 수 없는 멈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1박2일 일정으로 백령도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도착한 날 오후 2시에 다음날 배가 뜨지 못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화창하고 바람도 없는 날이었기에 의아했는데, 문제는 해상의 안개였다. 배에는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에 장애물을 만났을 때 시계(視界)가 방향을 틀 수 있을 만큼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3박을 하고서야 백령도를 떠나면서 깨달았다. 멈출 수 없으면 출발할 수도 없다는 것을. “해는 길고 새 소리 즐거운데/ 비 온 뒤 산 기운 아름다워라./ 깨끗이 치우고 책을 마주하니/ 이제야 옛사람의 마음이 보이네.” 선비라면 으레 이렇게 살았으리라 여기기 쉽지만, 이행이 이 시를 지은 것은 모진 국문 끝에 겨우 목숨을 건져 유배 생활을 하던 때이다. 18세에 문과 급제, 요직을 두루 거치던 이행에게 27세 젊은 나이에 닥친 시련이었다. 이후로도 여러 번 이어진 유배가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멈춤은 유능한 엘리트 이행을 깊은 성찰과 독특한 음색을 지닌 시인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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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쑥국을 먹으며 아침상에 쑥국이 올라왔다. 향긋한 쑥 내음이 입맛을 돋운다. 쑥국은 예전부터 가족, 친지와 함께하는 봄나들이 음식으로 사랑받아 왔다. 이항복은 형제들과 어울리며 즐거웠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 밑에서 묵은 쑥 뿌리 싹트려 할 때면/ 향긋한 쑥국 작은 모임에 봄기운 가득했지”라고 노래했다. 조경은 “부엌 사람 쑥을 캐어 쑥국 끓이니/ 수저 가는 반찬마다 향기롭구나”라며 그 옛날 태평성대의 백성처럼 흥에 겨워 배를 두드린다고 하였다. 화창한 봄날의 행복한 정경이다. 그런데 정희득은 쑥국 끓이는 것을 보며 탄식한다. “여러 어르신들 물가에 모이셨고/ 지는 해는 저녁밥 지어라 재촉했지/ 작년 이맘때 즐기던 일 기억에 또렷한데/ 하늘 끝 먼 땅에서 눈물 쏟으며 쑥을 캐네.” 그는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땅까지 끌려갔다. 겨울에 시작된 억류 생활이 해를 넘겨 음력 3월1일이 되던 날, 하인이 쑥을 뜯어온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포로가 될 때 모친과 아내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부친과 아이들은 조선에 남겨졌다. 낯선 땅에도 봄은 오고 쑥이 돋는다. 하지만 쑥국을 나눌 가족은 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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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용서가 허용되지 않는 이유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말하자 증삼(曾參)은 그것이 충(忠)과 서(恕)를 가리키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서(恕)는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준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상에서 활용되는 어휘가 ‘용서(容恕)’밖에 없을 정도로 서(恕)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서(恕)는 남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점을 헤아려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상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덮어 준다는 ‘용서’의 현대적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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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매화를 만나다 햇볕 받으며 걷다 보니 땀이 차오른다. 얼굴을 덮은 마스크 때문인가 싶었는데, 여전히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신경이 온통 코로나19에 가 있어서일까. 3월이 벌써 중순으로 넘어간 것도 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가득 차서 시끌벅적했을 대학 교정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매화나무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거무튀튀하고 딱딱해 보이는 나무둥치 여기저기에 거짓말처럼 화사하게 꽃잎이 맺혀 있다. 봄이다. 퇴계 이황은 임종하던 날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매화시만 해도 100여 수를 남긴 퇴계에게, 매화는 그리움을 멈출 수 없어 아침저녁으로 찾아가곤 하는 벗이었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정신적 가치를 함께하는 동지이기도 했다.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르는데/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바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앉은 채로 일어나길 잊었더니/ 매화 향기 옷에 가득, 달빛이 몸에 가득.” 매화와 한 몸이 된 퇴계는 “매화 너는 고고하여 고산이 어울리건만/ 어쩌다가 이 번화한 도성에 옮겨왔나”라며 자신을 매화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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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포용과 돌봄이 필요한 때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질병이 보건을 넘어 인권, 정치, 경제의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개인의 두려움은 집단적인 미움과 절망으로 이어진다. 바이러스의 은밀한 공격이 연일 생중계되고, 거기에 더해지는 온갖 말들이 범람한다.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일까. 이 상황의 원인은 특정 국가도, 종교도, 정권도 아닌 바이러스다. 우리의 의학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 외에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전문적 협의는 지속해야 하겠지만, 그 길의 어디에도 배제와 비난이 필요한 대목은 없다. 은폐를 전략으로 포교하는 종교집단이 확산의 온상이 된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도 병세를 밝히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확진자 증가에 연연하지 말고 감염자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해야 할 때다. 지금 포용과 돌봄은 휴머니티일 뿐 아니라 가장 효율적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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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누가누가 못하나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다. 1954년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하여 TV로 옮겨 1982년까지 이어졌고, 2005년부터 다시 방송되고 있다.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관객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무리 뽐내도 사랑스럽다.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잘하는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제목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다. 정조가 어느 날 역정이 묻어나는 비답을 내렸다. 심낙수가 홍국영, 구윤옥, 송환억 등을 비난하면서 이들이 있어서 치세라고 할 수 없지만 정조가 있으므로 난세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결단을 요구한 상소문에 대해서였다. 정조는 심낙수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렇게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어 어지럽게 다투는 행위 때문에 치세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온몸에 퍼진 열병을 잡으려면 정수리에 침을 놓듯이 송환억을 처벌해야 한다는 심낙수의 주장에 대해, 장년의 환자와 달리 노년의 환자의 경우 정수리에 침을 놓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반박하면서 마지막에 일갈했다. “네 몸을 사랑하듯이 나라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