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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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익숙함을 경계하다 조선 후기 문인 홍길주가 오랜 지인인 상득용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축하하는 이유가 이상하다. 상득용이 말에서 떨어진 일을 축하한다는 것이다. 뼈가 어긋나고 인대가 늘어나서 꼼짝 못하고 드러누운 채 종일 신음만 내뱉고 있는 이에게 축하 편지라니. 찰과상으로 흉측해진 상득용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지지 않았을까? 사리에 어긋난 일임을 잘 알면서도 홍길주는 자신이 축하하는 이유를 써내려갔다. 상득용은 무인이다. 말을 자기 몸처럼 다루며 능수능란하게 타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본인도 말 타는 능력만큼은 자부하곤 했다. 홍길주는 바로 이 익숙함이야말로 낭패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말 타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고삐를 부여잡고 안장에 바짝 앉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갔을 테니 크게 떨어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워낙 익숙했기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한밤중에 험한 길을 내달리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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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융합이라는 화두 융합교육이 화두다. 대학에서도 이제 하나의 학과만을 전공하여 졸업하는 학생보다 제2전공이나 융합전공을 택하는 학생이 더 많아졌다. 최근 포항공과대학교가 인문사회계 학부 출신만 대상으로 하는 데이터사이언스 전공 석사과정을 신설한 것은 융합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학과와 전공의 장벽이 여전히 견고한 것은, 근대의 학문이 분과학문과 함께 출발했다는 연원과 관련이 깊다. 근대의 개념어 가운데에는 19세기 일본이 서양서를 번역하는 과정에 한자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처음부터 단일한 번역어가 사용된 것은 아니다. 각축을 벌이던 학(學), 이학(理學), 학문(學問) 등의 어휘를 물리치고 새로운 조어인 과학(科學)이 사이언스(science)의 번역어로 채택된 데에는, 이 실증적이고 분과적인 학문을 기존 용어에 담기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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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발을 동동거리며 여러 사람을 만나서 일을 도모하는데 남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 최신의 정보로 탁월한 전략을 세워 추진해 보아도 일의 진행이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삐거덕거린다. 마음이 통해야 감동이 있고 그럴 때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 텐데, 어디에서 막힌 것일까. 감동이란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감(感)의 윗부분인 함(咸)은 무기인 술(戌)로 사람을 내리쳐서 죽인다는 뜻이다. 비명을 지르는 입, 혹은 잘려진 머리를 그려놓은 것이 가운데의 구(口)이다. 공개 처형을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느낌’을 주어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고대의 문화에서 비롯되어 ‘느끼다’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함(咸)이 후대에 ‘모두’라는 뜻을 겸하게 되면서 본래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심(心)을 붙인 감(感)을 새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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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조율이 필요한 시대 일상 어휘를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특정한 분야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는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띠고 바꿀 수 있다. 2011년 대한의사협회에서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으로 개칭하기로 확정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리스어 ‘skhizo(깨짐)’와 ‘phren(마음)’을 합성한 어휘가 ‘schizophrenia’이니, ‘정신분열’로 번역한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의미 영역이 너무 넓고 부정적이어서 사회적 편견을 야기할 수 있다. 환자 및 가족들의 염원에 부응하여 유관 학회를 중심으로 병명개정위원회를 결성, 3년여의 연구와 설문 끝에 결정된 명칭이 조현병이다. ‘조현(調絃)’은 악기의 현을 조율한다는 뜻으로, 마음의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기능에 문제가 생긴 질환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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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뒤집지 못한 말 중국 고대 주나라의 성왕이 어린 동생 숙우와의 사적인 자리에서 오동나무 잎으로 홀 모양을 만들어 주면서 “이것으로 너를 봉분하노라”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홀은 왕이 제후를 세워 일정한 영토를 맡아 다스리게 할 때 주는 신표다. 숙우는 기뻐하며 국정을 총괄하던 숙부 주공에게 가서 말했다. 주공이 성왕에게 이 일을 묻자 성왕은 그냥 장난삼아 해본 말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주공은 정색을 하고 “왕은 장난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왕이 말을 하면 사관은 기록하고 악공은 노래하고 사대부는 찬미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숙우를 제후로 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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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봄나물과 막걸리 “내 일생 백 년 동안/ 쉰아홉 번째 만나는 봄/ 해와 달은 날아가는 두 마리 새/ 하늘과 땅 사이엔 병든 이 한 몸/ 소반의 보드라운 나물은 푸른 빛 돌아왔고/ 동이의 진한 막걸리 하얗게 발효됐네/ 철 따라 변하는 만물 참으로 놀라워라/ 사람의 마음도 새로워짐을 기뻐하네.” 조선 문인 서거정은 봄나물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새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흐르는데, 매년 돌아오는 봄은 놀랍도록 새롭기만 하다. 송나라 학자 주희는 인의예지의 덕목을 술 빚는 일에 비유하였다. 발효가 미세하게 시작되어 온기가 도는 순간이 인(仁)이고, 왕성한 발효작용으로 매우 뜨거워지는 때가 예(禮)이며, 술이 완전히 익으면 의(義), 물처럼 안정을 찾으면 지(智)와 같게 된다. 하루로 비유하자면 청명한 새벽이 인, 뜨거운 정오가 예, 점차 서늘해지는 저녁이 의, 어둠에 덮인 고요한 밤의 시간이 지에 해당한다. 사계절의 운행도 마찬가지다. 만물이 새롭게 생동하는 봄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싹트는 순간인 인(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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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사람인가 시스템인가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관중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후임자를 묻는 환공에게 관중은 군주의 마음을 사기 위해 반인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역아, 개방, 수조를 멀리하라는 경계만 남겼다. 관중이 죽은 뒤 환공은 이들을 가까이 하였고 결국 이들의 전횡으로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공자도 관중 덕분에 중화 문명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관중이 세운 공은 컸다. 하지만 후대의 문장가 소순은 제나라가 혼란에 빠진 것이 관중 탓이라고 하였다. 관중이 훌륭한 후임자를 세워 놓았다면 간신들이 아무 짓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재 추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논의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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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근본에 힘쓴다는 것 조선시대 황해도에 조수(潮水)를 공부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밀물과 썰물만 관찰하기를 60년. 그 결과는 책 두 권이었다.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먹고 입을 것을 장만하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무용한 일에 정신을 다 소모했다며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귀명은 이 사람에게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다. <예기>에 의하면 상고시대의 왕들은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큰 바다보다 작은 하천에 먼저 하였다고 한다. 바다가 어마어마한 크기와 위력을 가지게 된 것은 근원이 되는 작은 샘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당장 눈을 압도하는 바다에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그 물이 어디에서 흘러온 것인지는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공부에 있어서 근본에 힘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비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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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말할 수 없는 것 “말도 안 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성어인 “어불성설(語不成說)”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리식 한문 표현이다. 말의 내용이 이치나 상식에 맞는지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든 보편적일 것이다. 다만 말 자체가 성립되는지를 늘 따지고 그게 납득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경향성이 이런 특정한 언어 표현에 반영되어 왔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삶에는 말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심오한 깨달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도 어떤 이유가 있어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의 논리와 맥락만 따지다가 감정을 읽지 못하는 데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 감정이라고 해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뿐이다. 마음의 눈이 밝아서 말의 이면에 켜켜이 쌓여온 사연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면 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수시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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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기필한다는 말 한문을 번역하거나 번역서를 많이 읽다 보면,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어휘를 일반인이 의외로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전공자라 해도 대부분 한글세대이므로 본인도 처음에는 낯설었을 텐데, 워낙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익숙해져서 다른 어휘로 바꿀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만 되어 있으면 문제없다고 여기기도 하고, 대체할 만한 다른 어휘가 없으니 오히려 낯설더라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어휘의 양이 사고의 범위와 깊이를 좌우한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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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무고하십니까 “무고한 무고자를 무고하게 무고했다.” 억지로 만들어 본 문장이지만, 어휘력이 뛰어난 분들은 대략의 의미를 짐작할 것이다. 우리말에는 수많은 동음이의어가 있으며 그 가운데 한자어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한자어를 가능한 한 덜 쓰고 순우리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명료한 의미를 살려 한자로 배우고 병기하는 것도 쓸모 있다. 어휘는 단순한 의미 전달 수단일 뿐 아니라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어서, 이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고(無辜)의 고(辜)에서 발음기호를 뺀 신(辛)은 양쪽으로 날이 있고 끝이 뾰족하여 자르고 찌를 수 있는 형구(刑具)의 상형이다. 무고(無辜)는 코를 베거나 얼굴에 먹을 새겨 넣는 따위의 형벌을 받을 만한 죄가 없음을 강변하는 어휘다. 무고자(無告者)는 맹자가 홀아비, 과부, 독거노인, 고아를 가리켜서 이들은 ‘하소연할 곳도 없는 사람들’이니 국가가 보살펴야 한다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무고(無故)는 군자삼락의 “부모구존(父母俱存) 형제무고(兄弟無故)”에서처럼 탈이 없는 상태를 이르기도 하고, <예기>의 “임금은 무고하게 소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을 말할 때 많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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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다시 새해가 주어진 이유 “이 몸을 이번 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제도할까(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다음 생을 기약하며 포기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라는 불가의 경구다. 윤회를 믿지 않던 선비들도 나태함을 경계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곤 했다. 김창협은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안정을 취할 시간이 없다고 호소하는 제자에게 스스로 마음의 주재를 확립하지 않으면 상황에 끌려 다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계하면서, 이 구절에 유념하여 그 고리를 끊도록 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