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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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있을 수 없는 일, 있을 수 있는 일 어떻게든 다른 주제를 잡아 보려 했다. 수천 년 쌓인 고전에는 지혜로운 말, 마음 비추는 글이 무한정 있으니, 마감 시간이 닥치면 뭐라도 잡아서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뉴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며 며칠째 눈과 귀를 온통 메우고 있는 저 참혹한 시공간의 이야기들에 나까지 무언가 더 얹을 만한 이유도, 자신도 없었다. 이 짤막한 글만이라도 그 일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칼럼을 백지로 남겨 둘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결국 그렇게 회피하고 싶었던 그 슬픔으로 메울 수밖에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어린 자식 넷을 연달아 잃은 서른 살의 아버지 장유의 애도시를 가져다가, 도무지 쓸 수 없는 글을 힘겹게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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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숙살의 계절 “별과 달이 환하고 깨끗하며 은하수가 하늘에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방에 사람 소리 하나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날 뿐입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밤을 연상하게 하는 고즈넉한 풍경이다. 중국 송나라 때 문장가 구양수가 한밤중에 책을 읽다가 갑자기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어떤 소리에 오싹해져서 아이에게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나가서 본 풍경은 이처럼 인적 없는 맑고 푸른 가을 달밤이었고, 소리라고는 그저 나무 사이에 이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고요한 밤, 구양수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이렇게 놀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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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섬기기 쉬운 사람 드라마에 나오는 권력자들은 날선 호통 한마디로 아랫사람을 어찌할 줄 모르게 만드는 능력을 보인다. 극적 설정을 위한 것이겠지만, 격한 감정이 실린 지적을 수시로 내리꽂는 사람을 섬기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주변 사람이 모두 리더의 기분이 어떤지, 어떻게 해야 지적받지 않을지 살피기만 하는 조직이 있다면 그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결정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제시했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며,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쉽다.” 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소인의 경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욕망만 채워주면 되니 기쁘게 하기 쉽다. 하지만 작은 이익에도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따지는 군자를 기쁘게 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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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이 원래 이렇게 푸르렀는지 자꾸 쳐다보게 만드는 가을이다. 늦여름 태풍이 지나가고 찬 대륙풍이 불어오면서 지상의 먼지와 수증기가 줄어들어 생기는 자연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테지만, 유독 더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코로나 팬데믹의 고통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도 든다. 아무튼 누군가 그리워해야 할 것 같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이다. 하늘을 뜻하는 한자는 천(天) 이외에도 여럿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이 있고, 땅을 덮은 지붕이라는 뜻에서 우(宇), 개(蓋) 등의 글자도 하늘의 의미로 사용된다. 둥글게 보여서 궁(穹), 원(圜)을 쓰기도 했고, 텅 비어 있어서 공(空), 허(虛), 신비하게 검고 어두워서 현(玄), 명(冥)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말 ‘하늘’의 음을 빌려 하날(漢捺), 한을(汗兒) 등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그리고 여름하늘을 호(昊), 가을하늘은 민(旻)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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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수학자의 축사 한 수학자의 졸업식 축사가 회자되고 있다. 필즈상 수상자의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축사의 구절을 인용하며 폭넓게 호응하는 모습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겪는 고민과 좌절의 어딘가를 만지고 위로하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졸업식 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경계를 넘나드는 면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축사만큼 상투적인 말, 혹은 글이 있을까. 그래서인지 우리는 축사나 주례사를 문학에 넣지 않는다. 전통시대 한문학의 중심 장르였던 묘지문, 상소문 등의 대부분을 오늘날 문학으로 인정하기 힘든 것도 그 목적성과 상투성 때문이다. 특히 장수를 축원하는 수서(壽序)의 경우 워낙 목적이 규정하는 내용이 정해진 장르여서 당시에도 진정성을 의심받곤 했다. 하지만 그런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투성을 벗어난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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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보호와 자립 보육원 출신의 18세 청년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고인은 정착지원금 대부분을 대학 기숙사비 등으로 지출하고 월 30만원의 자립수당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다른 학생은 모두 집에 간 방학에 혼자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일어난 일이어서, 인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힌 지 60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만 18세에 복지시설의 보호가 종료되는 제도에 대해서는 오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작년 7월 국무회의에서 만 24세까지 보호받을 수 있고 자립수당 지급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는 방안이 발표되었고, 12월 법안 개정을 거쳐 올해 시행령이 의결됨으로써 6월22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고인은 개정 시행 이전에 종료 시점이 도래한 경우지만 기존 제도하에서도 대학 입학을 사유로 보호기간 연장은 가능했다. 그럼에도 본인이 퇴소를 선택한 데에는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보육원에서 지내기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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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창부타령, 난봉가, 유람가 등에서 차차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래에서 인상적인 도입부나 강력한 마무리에 즐겨 쓰이는 말이 있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눈앞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모처럼 만난 친구가 참으로 소중해서, 마침 익은 술맛이 기가 막혀서 던지는 탄성이며,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역설적으로 내뱉는 탄식이다. 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탄성과 탄식의 바닥에는, 유한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붉은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며 고목에는 새가 날아들지 않는다. 길어봐야 백년도 안 되는 인생은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막상 즐길 수 있는 날은 의외로 많지 않다. 참 상투적인 레퍼토리지만 누구도 부인하거나 벗어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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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하찮고 소중한 무명지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차가운 연해주에서 동지들과 함께 무명지 첫 마디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쓰며 투쟁을 맹세했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묵에 찍힌 손바닥 도장이 바로 이 ‘단지혈맹’의 기개를 그대로 보여주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런데 왜 무명지였을까? 무명지를 자르거나 피를 내서 위독한 부모님의 입에 흘려 넣음으로써 생명을 연장시켰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효자열전에 자주 나오는 대목이다. 참으로 훌륭한 효심이긴 하지만, 이 역시 왜 무명지였을까? 무명지가 심장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음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엄지는 거벽(巨擘)이라는 표현처럼 첫째로 추대되고, 검지는 식지(食指), 두지(頭指)로, 중지는 장지(長指), 장지(將指)로, 새끼손가락도 소지(小指), 계지(季指) 등으로 불린 데 비해, 무명지(無名指)는 ‘이름도 없는 손가락’이다. 마디 하나 없어도 생활에 별로 어려움이 없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치부돼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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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그것도 옳을 수 있다 황희 정승은 청빈함과 엄정함, 너그러움 등의 모습으로 여러 미담에 등장한다. 그중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어린 종 둘이 다투었는데 한 종이 와서 상대의 잘못을 호소하자 황희는 “그렇지, 네 말이 옳구나”라고 다독거렸다. 잠시 후 온 다른 종에게도 황희는 “그렇구나, 네 말이 옳지”라고 동의했다. 이를 본 조카가 이의를 제기하자 황희는 “네 말도 옳구나” 하고는 읽던 글을 계속 읽었다. 이 일화를 어떤 의견이든 인정하고 받아주는 포용력으로 읽거나, 시비를 따지기보다 마음에 공감해주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는 건성건성 대답하고 자기 할 일만 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태도로 세상에 부합하는 기회주의자, 혹은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는 신중한 정치가의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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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화수분을 꿈꾸며 어휘에도 운명이 있다. 한때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어휘가 어느새 까마득하게 잊히는가 하면, 잘 쓰이지 않을 것 같은 어휘가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기도 한다. ‘화수분’이라는 어휘는 후자에 속한다. 교과서에 실려 많이 읽힌 단편 소설 ‘화수분’이 여전히 대학 입시를 위한 필독서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프로야구에서 몇몇 팀을 두고 ‘화수분 야구’라고 부르는 용례의 힘도 의외로 크다. 오랫동안 다양하게 이어진 화수분 설화는 써도 써도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향한 욕망의 반영이다. 이 단지가 도깨비방망이와 다른 점은, 무언가 넣어야 나온다는 것이다. 쌀을 넣으면 쌀이, 돈을 넣으면 돈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애초에 무언가 넣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땅이 화수분”이라는 말도 있다. 불로소득의 달콤한 꿈과는 거리가 멀지만,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끊임없이 소득을 안겨주는 땅, 즉 자연이야말로 화수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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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공공의 교육, 공동의 교육 유네스코는 시대의 변곡점마다 미래교육을 위한 보고서를 발간해 왔다. 작년 11월에 세 번째 보고서를 발간했고, 올해 3월에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번역서가 공개되었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 앞에서 미래에 대한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보고서는 더 늦기 전에 교육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공공재로서의 교육일 뿐 아니라 공동재로서의 교육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했다. 공공이라는 말의 출처는 <사기>이다. 왕이 행차하는데 한 사람이 다리 밑에서 갑자기 뛰어가는 바람에 왕을 태운 마차의 말이 크게 놀랐다. 그를 겨우 벌금형에 처했다는 것을 듣고 화가 난 왕에게 장석지가 말했다. “법은 천자가 모든 사람들과 공공(公共)하는 것입니다. 법조문보다 더 무겁게 처벌한다면 법이 백성들에게 신뢰받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제공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공의 오래된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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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해방의 방향 천화판(天花板)은 지붕 밑을 편평하게 해서 치장한 반자를 말한다. 실내에서 보면 천장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외모나 능력 등이 최고치임을 인정할 때 최고봉, 혹은 이른바 ‘끝판왕’의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그 앞에 ‘돌파’를 붙이면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한계를 돌파하여 뛰어넘는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최근 “하향돌파천화판(下向突破天花板)”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천장은 가장 높이 있는 것인데 그 천장을 아래로 돌파한다고 했으니 말부터가 모순이다. 이는 인터넷 유행어인 ‘탕핑(平)’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탕핑은 평평하게 눕는다는 뜻인데, 아무런 의욕이나 열정도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지향을 가리킨다. 어차피 집과 차를 사고 결혼하여 아기 낳으며 소비를 즐기는 삶이 보장되지 않을 바에야, 최소한으로 벌어서 돈 적게 드는 즐거움만 추구하며 속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그 일부는, 일어날 여건이 안 되고 무릎 꿇기도 싫으니 드러누울 뿐이라는 소극적 저항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