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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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아름다운 풍경 많은 현인들이 세상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말해왔다. 적절한 근거와 치밀한 논리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때로 시적인 몇 마디 말에서 더 깊고 길게 마음을 울리는 깨달음을 만나기도 한다. “솔개는 하늘에 닿도록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마음껏 뛰노네.” <시경>을 인용한 이 <중용> 대목도 그렇다. 세상의 이치는 누구나 볼 수 있게 어디에나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알아볼 눈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각득기소(各得其所)’, 각자 제 살 곳을 얻어 즐거움을 누리는 솔개와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 내 앞에 놓인 사소한 일상에서 그 무엇보다 크고 심원한 사람의 도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시적 언어만이 담을 수 있는 순간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레거시의 추억, 혹은 쓸모 사회의 흐름에 따라 언어가 변화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새 어휘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기존 어휘의 뜻이 분화 혹은 확대되기도 한다. 어느 날 급격하게 추락하는 운명을 맞는 어휘도 있다. 우리말은 아니지만 요사이 부쩍 많이 쓰이는 ‘레거시(legacy)’가 그런 예다. 원래 레거시는 법적으로 인정받은 유산을 뜻한다. 고인은 가고 없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듯이 도움을 주는 것이 유산이다. 점차 과거의 일이 현재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상징하는 말로 의미 영역을 넓혀 갔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레거시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의 일부를 규정하는 요소로 사용됐다. 어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오늘이 없듯이 내일 역시 오늘의 집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선한 가치를 지닌 레거시야말로 우리가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선물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뉴스 안 봐도 되는 세상 설이 지나고 입춘도 지났으니 영락없는 새해, 새봄이다. 요즘은 누구나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설 인사를 건네고는 하지만, 가족과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 손아랫사람이 세배하면 어르신이 덕담을 건네는 오랜 풍속이 있다. “새해에는 승진했다지.” “새해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며?” 축하하는 과거형의 말에 더욱 강한 소원을 담아 복을 빌어주고는 했다. 입춘에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춘첩 역시 복을 비는 덕담이 주를 이룬다. 잘 알려진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외에도 부귀와 장수, 풍년을 기원하는 다양한 글귀들이 내걸리곤 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참을 수 없는 언어의 구차함 구차하다는 말에 사용되는 ‘구(苟)’는 풀이름이었는데 음을 빌려 ‘진실로’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글자의 더 이른 자형인 갑골문을 보면 머리 장식을 한 사람이 꿇어앉은 모양이다. 양을 토템으로 섬기던 종족이 상나라에 ‘진정으로’ 굴복하는 것을 뜻하는 데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구차해진 모습을 담은 글자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슬픔과 분노의 연하장 지독한 분노와 슬픔 가운데 새해 인사를 띄웁니다. 최고 권력자가 저지른 난동이 국민의 일상을 앗아가고 나라 살림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참기 어려운데, 다툴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사태를 지지부진한 정쟁으로 끌고 가는 추악한 모습들을 연일 목도하면서, 분노의 게이지는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그 위에 벌어진 비극적인 참사 소식에 온몸과 마음이 슬픔으로 떨려 옵니다. 집단 우울증에라도 걸릴 것 같은, 가혹한 겨울입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탄핵에서 협상의 정치로 조선은 탄핵의 나라였다. 조선왕조실록에 탄핵(彈劾)이 463번 언급되고, 유의어인 대론(臺論), 거핵(擧劾), 탄론(彈論), 대탄(臺彈) 등을 합치면 1852건에 이른다.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신진 관료들을 대간(臺諫)으로 임명하고 면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거침없는 직언의 길을 보장해 주었다. 이마저도 당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면이 있지만, 적어도 왕이나 권세가의 폭주를 막는 제도적 기능은 이어졌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묵은 술, 오랜 지혜 중국의 명주 가운데 하나로 ‘루저우라오쟈오(瀘州老)’가 있다. 루저우는 예로부터 술로 유명해서 주성(酒城)이라고 불려온 고장이고, 라오쟈오는 이곳에 있는 오래된 교(), 즉 술을 발효시켜 저장하는 ‘지하 광’을 말한다. 1573년에 만들었다는 궈쟈오(國)가 남아 있어 더욱 유명하다. 수백 년 묵은 발효로만 낼 수 있는 깊은 향을 지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왔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성명의 의미 기원전 710년의 이야기다. 노나라 군주 환공이 송나라 대부 화보독이 보내온 대정(大鼎·진귀한 솥)을 받았다. 사욕으로 난을 일으켜 자기 군주를 갈아엎고 주변 국가를 무마하려는 뇌물이었다. 이를 본 노나라 대부 장손달이 환공에게 간언했다. “군주란 도덕을 밝히고 사악함을 막아서 백관을 감독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백관이 잘못을 범할 우려가 있으므로, 성명으로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금 자신이 덕을 버리고 옳지 못한 자를 비호해서야 장차 백관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
송혁기의 책상물림 농단에 오른다는 말 “누군들 부귀를 원치 않겠습니까? 농단에 올라 독점하려는 게 문제지요.” 맹자는 편안한 거처와 풍족한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왕에게 이런 대답을 전하고 제나라를 떠났다. 그에 따르면 본래 시장은 필요에 따른 물물교환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곳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농단(龍/壟斷)’ 즉 시야가 확보되는 언덕에 올라 시장의 흐름을 두루 관찰함으로써 모든 이익을 독차지했다. 그러자 모두 그 사람을 천박하게 여겼고, 이것이 시장에 세금을 징수하는 사유가 되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문해력 붕괴시대 한글날마다 ‘요즘 아이들’의 우리말 실력이 문제라는 성토가 이어진다. ‘혼숙’, ‘두발’, ‘시발점’, ‘우천시’…. 자극적인 사례들을 거론하며 문해력 저하를 질타하는 글들이 올해도 지면을 채웠다. 기초학력 미달을 우려하고 독서 교육 강화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한자 교육이 부실해서 그렇다는 지적도 다시 제기되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정인지를 기억하며 “늙은이에게 술은 아기의 젖과 같다오.” 노년에 밥은 잘 먹지 못하고 술만 마시는 까닭을 묻는 이에게 정인지가 답한 말이다. 막걸리는 빛깔이 젖과 비슷할 뿐 아니라 이가 빠져 씹기 어려운 노인도 술술 넘길 수 있으니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아기가 마시는 젖이나 다름없다며 너스레를 떤 것이다. 정인지는 병조정랑을 지내던 20대에도 금주령을 어겨 처벌받은 적이 있고, 노년에 조정 연회에서 만취하여 세조에게 말실수를 크게 하는 등 여러 번 물의를 빚을 정도로 애주가였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완연한 가을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순식간에 물러나고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다. 원래 ‘완연(宛然)’은 지금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이 떠오를 때 쓰는 말이었다. 사라져버린 옛날 모습 그대로라든가, 존경하는 어떤 이의 풍모와 매우 비슷하다거나, 꿈에 그리던 신선세계가 펼쳐진 듯할 때, 그런 실감 나는 상상을 두고 완연하다고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뚜렷하다’는 사전적 풀이도 그런 전통을 반영한다. 하지만 요즘은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증세나 분위기가 뚜렷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는 듯하다. 그렇다. ‘완연한 가을’은 상상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피부에 실제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