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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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AI라는 호랑이의 등 위에서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전이 눈부시다. 불과 3년 남짓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조차 숨 가쁠 정도다. 돈 안 되는 한문 번역과 인문학 연구 영역은 비교적 안전할 줄 알았고, 이전의 기계 번역이나 초창기 생성형 AI는 남은 시간이 많음을 입증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꽤 높은 수준의 번역이 제공되며, 방대한 고전 자료를 정리하는 능력은 기대를 한참 넘어섰다. -
정희진의 낯선 사이 교제 폭력, 남성 개인의 변화가 관건 올해 출간된 책 중에서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가장 조용한 참사, 교제 폭력을 말하다>(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 지음, 동녘)는 저자들의 문제의식과 간절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다. 여성 기자들이 쓴 이 집단 창작물은 여성으로서 정체성과 기자로서의 정체성이 잘 융합된, 글쓰기의 모델이다. ‘교제 폭력’은 그간 “데이트 폭력”으로 낭만화, 사소화되었던 폭력과 살인 사건을 재명명한 것이다. 교제 폭력은 일상화된 폭력이지만 분석이 쉽지 않다. 성폭력(rape)이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해석과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남성의 권리 구조에서 발생한다면, 그리고 아내 폭력이 가정 내 성역할에 대한 성차별적 해석에서 발생한다면(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손봄으로써’ 가정을 유지한다는 이데올로기), 교제 폭력은 성폭력과 아내 폭력의 특징이 교차하는 경우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병오년을 맞으며 “내년이면 나 어릴 적 글 배우러 간 병오년/ 생애 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초가 살림/ 화답하는 벗이라곤 어부와 나뭇꾼이지만 늘 만족한다 말하고/ 집안에 있는 거라곤 푸성귀에 거친 밥이지만 더 바랄 것 하나 없네/ 어렵고 험한 오늘을 탄식할 것 없어라/ 내 돌아갈 곳 옛사람의 글이 있으니/ 가련토다 명예와 이익을 좇는 사람들/ 종신토록 허덕여도 끝내 공허뿐인 것을.” -
송혁기의 책상물림 대통령과 한자 교육 대통령의 업무보고 생중계가 연일 화제다. 이재명 대통령의 실무 장악력을 보여줄 뿐 아니라 국민 중심의 국정운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호평이 있는 반면에, 최고 결정권자의 말이 남발되는 가운데 일부 현안의 기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기도 했고 특정인을 겨냥한 의도적 망신 주기가 아니냐는 지적도 이어진다. 한국고전번역원장이 한자 교육에 대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달라고 말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이 엉터리 국어 사용의 문제를 언급한 것을 받아 그 원인이 한자 교육의 문제에 있다면서 제기한 요청이었다. 대통령은 단어의 깊은 의미를 알고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한자 교육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면서도, 한자 병용이나 강제 교육을 제도로 도입하려면 엄청난 벽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다시 한 해를 보내며 12월의 첫날, 올해 첫 송년회에 참석했다. 날짜는 숫자에 불과할 뿐, 해가 넘어간다 해도 반복되는 하루가 새로울 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주어지는 것에 감사하며 또 한 해가 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더 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한 달 지나 또 한 해가 가니 천 날 백 날 먼 앞날을 어찌 기약하리오. 서산에 지는 해는 도주공도 살 수 없고 동해에 빠지는 썰물은 맹분도 못 돌리네. 그대는 어디에 기력을 다 썼기에 손바닥에 꽉 움켜쥔 자국 지워지지 않는가?” -
송혁기의 책상물림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여전히, 질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가 중요함은 물론이지만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중요하다. 같은 질문에 대해 그 사람에 알맞은 답변을 각기 다르게 줄 수 있는 지혜를 지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를 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 공자(孔子)다. 숭덕(崇德)과 변혹(辨惑)의 방법을 물었을 때도 공자는 제자마다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 훌륭한 인품을 갖춰가는 것이 숭덕이고, 그 길에서 미혹을 분별하는 것이 변혹이다. ‘내가 할 일을 먼저 하고 그로 인해 얻게 될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 ‘충신(忠信)을 주로 삼고 의(義)로 옮겨가기’. 각각 번지와 자장에게 답한 숭덕의 방법이다. 번지에겐 실천적 자세를 강조한 데 비해, 자장에겐 진심과 믿음을 다함으로써 인격을 완성해 가는 수양을 제시했다. 제자들과 오랜 관계를 맺으며 수준과 성향을 깊이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른 대답을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맹상군을 다시 떠올리며 ‘계명구도’는 천한 재주로 남을 속이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하찮아 보이는 재주도 어딘가에는 쓰일 데가 있으니 다양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맹상군은 빈객이 수천명이었다고 전한다. 빈객은 능력을 인정해 의식주를 전적으로 제공하며 수하에 거느리는 인재 집단을 가리킨다.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참모진도 있고 행동대원을 자처하는 협객들도 포함되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스스로 만드는 재앙 맹자는 천하에 바른 도리가 통할 때는 덕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이끌지만 도리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힘이 센 사람이 약자들을 제멋대로 부린다고 했다.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보편적 가치가 약화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시대에 약소국은 강대국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21세기도 중반을 향해가는 시점에 “노 킹스”(No Kings·왕은 없다)를 외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정부 셧다운의 장기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치안 유지에 군대를 동원하고 이민자를 대거 추방하며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는 것은 개별 사안의 옳고 그름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일구어온 민주주의의 근간을 송두리째 말살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두고 1776년에 사라진 왕이 다시 나타났다며 도널드 1세라고 지목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위대한 미국을 재건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부채로 파탄날 지경인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낳은, 비정상적인 극약 처방으로 보일 뿐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추석 단상 추석(秋夕)은 명절 이름치고는 독특하다. 중국도 음력 8월15일을 명절로 지내지만 중추절(仲秋節)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일본의 경우 양력 8월15일을 전후해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오봉(お盆)절 연휴가 있긴 하지만, 이는 음력 7월15일인 백중(百中)을 비슷한 시기의 양력으로 바꾼 것이어서 연원이 다르다. 성호 이익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에 성묘를 8월15일에 하면서 이날을 추석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정조(正朝)와 대비된다”고 했다. 정월 아침에 뜨는 해를 상징해서 설날을 정조라고 부르는 것처럼 가을 저녁의 보름달을 상징하는 날이라서 추석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논평자의 자리와 담당자의 자리 작년 가을 무렵인 것 같다. 국회의 대정부질의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정치 관련 영상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 답답한 마음에 한두 번 찾아보다가 어느새 습관처럼 보게 되었고, 이제 알고리즘이 언제 어디서든 나의 눈과 귀를 그쪽으로 데리고 간다. 뉴스도 별로 보지 않고 살던 때에 비하면 꽤 큰 변화다. 비상식적인 정치 행태에 분개하며 시국을 걱정하던 와중에 느닷없이 벌어진 계엄 사태는,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정치판의 이슈들에서 관심을 거둘 수 없게 만들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달빛과 별빛 퇴계 이황은 진중한 학자이자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평생 2000편이 넘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에게 시 짓기는 생활의 중요한 일부였다. 퇴계 스스로 자신의 시가 건조하고 싱거워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래 두고 읽어보면 맛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자부하기도 했다. 훗날 그의 시는 학문적 깨달음이 시적 수준으로 이어진 사례로 평가됐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비움과 채움의 독서 “산은 비워서 받아들이고 물은 채워서 흘러가니, 독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익히 읽어온 것으로만 계속 채울 뿐 그와 다르거나 새로운 지식은 접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읽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져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에 새로운 지식만 좇아가는 행태도 문제다. 옥석을 가리지 않고 비워둔 채 모든 것을 넉넉히 받아들이는 산, 작은 웅덩이 하나까지 다 채우기 전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물에 견주어서 독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