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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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자전거와 자동차 자전거 탄 풍경은 아름답다.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멈춘 듯해서 조금 지루하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보는 풍경은 휙휙 빨리 지나갈뿐더러 그걸 보자고 멈춰 서기도 여의치 않다. 하지만 자전거는 적당하게 흐르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붙잡고 싶은 순간엔 멈춰 서서 땀 닦으며 한참 바라볼 수도 있다. 자전거에서 자유를 느끼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내 발로 움직이는데 걷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고, 언제든 부담 없이 멈출 수도 있으니까. -
송혁기의 책상물림 과정이 주는 즐거움 영미권의 고전학자들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출장 중이다. 빡빡하게 이어지는 일정이지만, 와 본 적 없는 곳에 처음 올 때면 바삐 걷는 와중에도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게 된다. 옥스퍼드처럼 건물 하나하나에 수백년의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풍스러운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눈은 끊임없이 그림이 될 만한 장면을 찾아내고 손은 신중하게 앵글에 담을 사물들을 선택한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애일(愛日)의 마음 우리말의 동음이의어는 한자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같은 한자로 이루어진 어휘인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도 제법 된다. 가령 애일(愛日)은 ‘사랑스러운 해’라고 새겨서 ‘겨울의 낮’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날을 아끼다’로 풀이하면 ‘부모님이 살아계실 날이 적음을 안타까워하며 하루라도 더 정성껏 모시려고 노력하는 효심’을 뜻한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싸우는 모두를 위한 추앙 “성인지미(成人之美)”라는 공자의 말을 주희는 “이끌고 장려함으로써 선한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정약용은 선악의 측면이 아니라 미명의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면서, “찬양하여 훌륭한 이름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장점을 높이 인정해줌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도청도설의 시대 “어리석은 자들은 처방서를 3년 읽고서 대뜸 천하에 고치지 못할 병이 없다고 떠벌리지만, 막상 3년 동안 직접 병을 치료해 보고 나면 천하에 마음 놓고 그대로 쓰면 되는 처방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의학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의학의 근원을 넓고 깊게 파고들어 쉼 없이 정밀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야 한다. 도청도설(道聽塗說)을 가지고 의학의 도를 다 깨우친 양 말해서는 안 되니, 이는 자신을 깊이 망치는 짓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 지난주, 스페인 말라가대학에 가서 한국어학과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문학을 소개하는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청중이 여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 조선 여인의 삶과 죽음을 인상적으로 담은 작품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한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지역과 언어, 시대를 뛰어넘어 지구 반대쪽 나라에서 한문으로 쓴 전근대의 문학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이 높지 못해 스페인어 통역을 거쳐 진행됐기에, 강연의 집중도마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세상 만물이 모두 봄이 되려면 교외는 물론 도심 거리도 온통 봄꽃으로 환하다. ‘아재 감성’이라는 핀잔을 감수하며 SNS에 꽃 사진을 올리곤 하지만, 고적 답사를 함께 다녀보면 학생들도 꽃 사진 찍기를 나 못지않게 즐긴다.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이다. 그러나 봄날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마음껏 누리고 편하게 나눠도 될까, 마음 한편이 쓰려오기도 한다.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 피해가 속출한다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봄을 즐기는 것마저 죄스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당연한 일상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는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위험에 노출되어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생동하는 봄날의 참담한 심정을 노래한 ‘황무지’의 첫 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나무에 올라 물고기 잡기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게 국어사전의 풀이다. 일반적인 용례를 반영했겠지만, 원래 사용된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물고기를 잡겠다는 목적은 나쁜 게 아니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단지 그 목적을 위한 방법으로 나무에 올라가는 게 문제이고, 잘못되었음을 일러주어도 ‘굳이 하려’ 하는 태도는 더 문제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인공지능과 대결하는 시대 “인공지능과 인간이 한글 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대결을 펼쳤다”는 기사가 화제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비로 진행하는 사업을 대상으로 한 전문가 테스트라서 관심이 더 컸다. 결과는 인공지능의 압승. 국가 예산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번역 사업 전반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만하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내 마음 문득 온갖 잡념이 몰려들 때가 있다. 불길한 걱정이 꼬리를 물거나 미움과 분노가 차올라 판단력이 마비되기도 하고, 욕심이나 유혹에 휩싸여 절제력을 잃는 일도 있다. 시간을 두고 한발 물러나 보면 달리 보일 사안이 대부분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마음을 다스린다는 게 쉽지 않다.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
송혁기의 책상물림 춘삼월 자규루에는 “원통한 새 한 마리 왕궁을 나와, 푸른 산중에 그림자뿐인 외로운 신세. 밤이면 밤마다 잠들 수 없어, 한 해 또 한 해 서글픈 한 끝이 없어라. 새벽 산 남은 달에 애끓는 너의 울음, 봄 골짝에 토한 피가 붉은 꽃 되어 떨어지네. 그 슬픈 하소연을 귀먹은 하늘은 못 듣는데, 시름겨운 이 사람 귀만 어찌 이리도 밝은지.” 단종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자규(子規) 노래’다. 자규는 두견새로, 폐위되어 쫓겨난 촉나라 망제의 혼이 깃들어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인근의 매죽루에 올라 읊었다는 작품이다. -
송혁기의 책상물림 새옹지마와 전화위복 불과 며칠 전 마이애미로 짧은 출장을 떠날 때만 해도, 미국 동부 지역의 눈 폭풍으로 발이 묶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플로리다 대학에서 바쁜 일정을 겨우 마친 뒤 잠시 짬을 내어 따사로운 풍경을 거닐던 오후 갑자기 휴대폰 문자가 날아왔다. 경유지인 애틀랜타 사정으로 항공권이 취소, 연기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일방적으로 통보된 돌발 상황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