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을 꿈꾸며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 화수분을 꿈꾸며

어휘에도 운명이 있다. 한때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어휘가 어느새 까마득하게 잊히는가 하면, 잘 쓰이지 않을 것 같은 어휘가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기도 한다. ‘화수분’이라는 어휘는 후자에 속한다. 교과서에 실려 많이 읽힌 단편 소설 ‘화수분’이 여전히 대학 입시를 위한 필독서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프로야구에서 몇몇 팀을 두고 ‘화수분 야구’라고 부르는 용례의 힘도 의외로 크다.

오랫동안 다양하게 이어진 화수분 설화는 써도 써도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향한 욕망의 반영이다. 이 단지가 도깨비방망이와 다른 점은, 무언가 넣어야 나온다는 것이다. 쌀을 넣으면 쌀이, 돈을 넣으면 돈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애초에 무언가 넣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땅이 화수분”이라는 말도 있다. 불로소득의 달콤한 꿈과는 거리가 멀지만,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끊임없이 소득을 안겨주는 땅, 즉 자연이야말로 화수분인 셈이다.

자연은 늘 그대로라서 자연이다. 아무리 가져다 써도 시간만 지나면 원래대로 채워진다. 일부가 망가지면 스스로 치유하여 회복되는 것이 자연이다. 인류가 선을 넘기 전까지는 그랬다.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균형으로 돌아갈 시간을 주지 않는 게 문제다. 세계가 탄소중립을 화두로 삼고 국가와 대학들이 실천 목표와 전략을 발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양을 조절해서 배출량과 흡수량의 균형을 이루자는 것이다. 2500년 전 맹자가 촘촘한 그물을 금지해야 지속적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 것과 맥락이 다르지 않은, 참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처방이다.

베어스가 화수분 야구의 원조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형 선수가 옮겨가도 새로운 선수가 끊임없이 나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원년 우승의 축배를 든 이듬해(1983년) 가장 먼저 자체 2군 연습장을 만들어 다음 세대를 육성해온 저력 덕분이다. 풍요로울 때 탄소중립을 위한 정책과 규제를 강화하고 불편한 실천을 감행해야 한다. 지금 자연에게 시간을 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 역시 화수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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