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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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하늘이 만든 영상 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 <괴물>은 독특한 서사 구조와 사회비판적 메시지로 장르를 넘어서는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모로 당시 한국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명작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몰입을 방해한 요인은 괴물의 움직임이 보이는 약간의 어색함이었다. 한국 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제작비와 공력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눈을 속일 만큼 박진감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기술과 자본이 집약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픈AI가 며칠 전 공개한 영상이 또 한 번 세계를 흔들고 있다. 촬영이나 편집에 인간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고도 텍스트를 영상으로 뚝딱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 모델이다. 이전보다 훨씬 섬세해진 영상을 보며 많은 이들, 특히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이 모델의 이름은 하늘(空)을 뜻하는 일본어 ‘소라(Sora)’다. 개발팀은 무한한 창의성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이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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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삶을 얻는다는 말 18세기 문인 김양근은 서재 이름을 ‘득생헌(得生軒)’이라고 붙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뜻으로도 쓰일 법하지만, 이 득생이라는 말에는 출처가 있다. 도연명은 세상을 버린 자신의 심정을 망우물(忘憂物) 즉 술에 띄워 멀리 보내며 이렇게 노래했다. “해 지고 만물의 움직임이 잦아드니/ 새들 지저귀며 숲으로 돌아오네./ 동헌 아래서 내 멋대로 휘파람 부니/ 이제야 다시 이 삶을 얻었구나.” 세속을 훌쩍 벗어난 곳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얻었다는 뜻을 가져온 것이다. 옛 문인들은 현실에 발을 붙인 채 분주하게 살아가면서도 언젠가는 유유자적한 나만의 삶을 찾아 자연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을 입에 늘 달고 살았다.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모델이 바로 도연명이다. 이익과 지위를 위해 구차한 일에 휘둘리느니 궁핍하더라도 내 뜻대로 살겠다는 염원을 과감하게 실천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떠나 아무런 일도 없이 한적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넋두리에 그치기 쉽다.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더 나아 보이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만나고 만드는 게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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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대설주의보와 서설 눈이 많은 겨울이다. 요 며칠은 한파와 함께 대설주의보, 대설경보까지 내려진 곳도 적지 않다. 눈이 온다고 마냥 즐거워하는 건 아이들과 강아지뿐이라고 했던가. 실외에서 종일 일해야 하는 분들께 눈과 추위는 맞서 견뎌야 할 악조건이다. 내리는 눈을 보며 낭만을 즐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대를 사는 생활인에게 눈은 출퇴근길을 힘들게 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조선시대 역시 눈은 발을 묶는 장애물이었지만, 서설(瑞雪)이라는 말처럼 희망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육출화(六出花), 육각의 결정을 지닌 눈을 꽃에 비유한 표현이다. 눈을 반겼던 까닭이 티끌 가득한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어 버리는 순수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납전삼백(臘前三白)이라고 해서 동지(冬至) 후 세 번째 술일(戌日)에 행하는 납제(臘祭) 이전에 눈이 세 번 내리면 풍년이 들 조짐으로 여겨 기뻐했다. 눈이 한 자 이상 내리면 해충이 땅속에 낳아 놓은 알들이 깊숙이 파묻혀 버려 농사에 피해가 적어진다는 그럴듯한 이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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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자율의 요건 한문 문장에서 ‘자율(自律)’은 대개 스스로 세운 기준, 예컨대 ‘청렴’이라든가 ‘올바름’ 등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용례로 사용된다. 요즘 쓰는 한자 어휘인 자율에도 ‘스스로의 원칙에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 선택권’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로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로 오용되기도 한다. 지난해 10월 교육부 장관이 “대학 정원의 30%는 아이들에게 전공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언급을 했고, 최근 정책 연구를 통해 ‘무전공 입학’ 확대 방안이 구체화되고 있다. “학생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하고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대학 내 학과 간 벽을 허물고 자율전공선택제를 확대하겠다.” 1월2일 교육부가 내놓은 공식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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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겨울날, 봄 한 잔 선조 때 문인 최립은 중국 사행길에 오르는 이민각을 전송하는 시를 이렇게 맺었다. “듣자니 떠나며 늙음을 한탄했다던데, 강 건널 때 흔쾌히 황금을 던지시려나?”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를 가져와 멋을 부린 구절이다. “술 실은 배마다 연이어 좋은 술 사는 일 아까워 마시게. 천금을 한번 던지면 꽃다운 청춘을 살 수 있으니.” 젊은 날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술에 흠뻑 취하는 것뿐. 늙음을 한탄할 게 아니라 술값이나 호방하게 쓰라는 뜻으로 건네는 농담이다. 술이 잠시나마 인생의 봄날 같은 청춘을 회복시켜 주는 힘을 지녀서일까, 술은 예로부터 봄으로 불려 왔다. “춘주(春酒)를 빚어 장수를 기원한다”는 <시경> 구절에서 이미 술에 봄이 붙기 시작했고, 사공도는 24가지 시품 중 ‘전아(典雅)’를 표현한 시에서 “옥 호리병에 봄을 사다가 초가집에서 비를 즐긴다”고 하여 아예 술을 봄이라고 불렀다. 소식이 즐겼다는 동정춘(洞庭春)을 비롯해 검남춘, 호산춘 등 봄이 들어간 술 이름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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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감기를 이겨내려면 12월 역대 최고 기온을 찍은 날씨가 곧 다시 긴 한파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계절의 상도가 무너진 가운데에도, 반갑지 않은 손님인 감기는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중국, 일본에서 감기를 뜻하는 한자어는 감모(感冒), 상풍(傷風), 풍사(風邪) 등이다. 우리나라 역시 한문 문헌에서는 감모나 상한(傷寒), 한질(寒疾) 등으로 표기된 예가 많다. 코에 불이 난다는 뜻의 순우리말 고뿔(곳블)도 일찍부터 쓰여왔다. 그런데 특정 시기부터 한문 문헌에 ‘감기(感氣)’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때 와서야 나오지만, <승정원일기>에는 인조 때 1회를 시작으로 숙종 때 10여회, 영조 때는 수백회나 사용되었다. 개인 문집에서도 17세기 서찰과 계문 등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점차 늘어났다. 언젠가부터 입말로 통용된 감기가 한문 문장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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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서울의 밤, 서울의 봄 <서울의 봄>, 참 잘 만든 영화다. 기록영화 느낌에서 어느새 극적으로 고조되고, 캐릭터의 디테일에 빠져드는 순간 실제 인물이 상기되며 아찔해진다. 섬세한 조명과 음향마저 의도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능숙한 편집, 알맞게 친절한 자막과 그래픽에, 주연부터 조연까지 그 많은 배우의 연기가 저마다 빛을 발하며 빈틈없이 맞아들어가, 그날 그 자리로 박진감 있게 끌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참 불편한 영화다. 선과 악의 선명한 대결이라는 판을 펼치고 그 악에 탐욕, 야비, 잔인, 기만, 그리고 징그러운 가벼움까지 온갖 혐오스러운 것을 다 버무려 넣고는, 악이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이 9시간이 이후 어떤 참혹한 역사로 이어졌는지를 보는 내내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영화 안에서만 승리한 게 아니라 그날의 성공을 기념하는 잔치를 벌이며 천수를 누렸음을 알기에, 불편함은 점차 울화로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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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 동아시아의 전근대 학술사는 경전 해석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전의 반열에 오르게 된 몇몇 텍스트에 대한 주석이 시대마다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른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오래된 지향을 따라, 새로운 저술보다는 경전에 대한 풀이와 부연의 방식으로 자신의 학문 견해와 시대 인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경전 해석의 계보에는 다양하고 치열한 이견과 논쟁이 담겨 있다. <논어> 역시 함축된 표현 때문에 여러 이설이 부딪치는 구절이 많다. 공자가 위나라 대부 영유를 평가한 대목도 그렇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군주가 훌륭하여 이상을 실현할 만한 때를 만나면 자신의 지혜를 발휘하여 경륜을 펼치고, 무도한 군주의 치하에서는 어리석은 듯이 행동하며 능력을 감추고 때를 기다렸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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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미래형 도서관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상징하는 건물은 높이 50m에 달하는 거대한 돔으로 덮여 있다. 1994년 난데없이 자동차 한 대가 그 돔 위에 올라앉은 이후, 해커스(hackers)를 자칭하는 학생들의 기발한 장난이 이어졌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모형이 출현하더니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로 변신하기도 했다. 기물 파괴 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대학 본부는 이들을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학생들의 발칙한 상상력을 오히려 권장하는 모양새다. 기발한 장난의 무대가 된 그 거대한 돔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을까? 첨단 기술의 장비나 혁신적인 발명품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은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높직한 천장에서 자연 채광이 환하게 들고 중간 기둥 없이 널찍하게 트인 공간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열람실이었다. 둥근 벽면 안쪽에는 층층이 서가와 세미나실이 이어져 있고, 아담하게 분리된 서가의 구석마다 파묻힐 수 있는 책상이 놓여 있다. 그렇다. 돔의 내부는 전통적인 도서관이었다. 이 사실이 나에게는 돔보다도 더 거대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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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체면이 사라진 사회 시대 변화와 함께 사용 빈도가 줄어든 어휘 가운데 ‘체면(體面)’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하는 도리’라는 사전적인 뜻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등 부정적인 용례가 대부분이다. “체면이 서다”는 말도 겨우 낭패를 면했다는 수세적인 긍정에 불과하다. 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체면치레’ 역시 기분 좋게 쓰는 말은 아니다. 실속도 없이 체면만 차리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악습으로 지목돼 왔다. 나의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므로 체면에 매여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 리 없다. 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속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대개 그렇듯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이름’을 중시하는 삶이 지니는 가치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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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경쟁의 축제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종반을 향해가고 있다. 아시안게임은 금메달 482개를 걸어놓고 누가 많이 따내는지 개인별, 국가별로 ‘경쟁’하는 운동회다. ‘경(競)’은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며 쫓는 모양으로 각축(角逐)의 의미를 표현했다. 각 사람이 머리에 이고 있는 무언가가 후대에는 입으로 부는 악기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여겨지기도 했다. 몸싸움이 말싸움으로 변해간 셈이다. ‘쟁(爭)’은 물건 하나를 두고 위아래의 두 손이 서로 빼앗으려 움켜쥔 모양이다. “군자는 경쟁하는 일이 없다.” 수천년 전 공자가 한 말이다. 남보다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더 높은 곳,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굳이 경쟁할 때가 있다면 그건 활쏘기할 때뿐이라고 했다. 다만 이 역시 과녁을 잘 맞혀 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활 쏘는 당에 오를 때부터 마치고 내려와서 규칙에 따라 술을 마실 때까지 얼마나 온화한 언행과 반듯한 자세로 상대를 배려하고 악무에 맞는 우아한 동작을 취하는지, 그 모든 과정이 중요하다. 경쟁을 하더라도 군자답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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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식물 칼럼 이 지면에 글을 올린 지 9년째다. 격주로 쓰는 작은 칼럼이지만 쉬지 않고 올리기란 쉽지 않다. 연재를 마칠 적절한 때를 놓친 채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지금 필자는 실크로드 길을 따라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사막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여행 중에도 마감 일자는 어김없이 이르고, 쿠차의 낯선 호텔 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을 수밖에 없다. 족쇄도 이런 족쇄가 없다. 그런데도 제법 오래 쓸 수 있었던 건 고전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다. 무궁무진한 고전이 있기에, 필자의 어설픈 생각을 거기에 기대서 매번 어찌어찌 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전과 현실을 섣불리 연결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의 아슬아슬한 연결이야말로 글쓰기가 갖는 매력이자 힘이기도 하다. 또 하나, 마감 시간 넘겨 급히 송고하고 나면 거기에 어떤 삽화가 연결되어 실릴지 기다리는 맛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