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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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미래형 도서관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상징하는 건물은 높이 50m에 달하는 거대한 돔으로 덮여 있다. 1994년 난데없이 자동차 한 대가 그 돔 위에 올라앉은 이후, 해커스(hackers)를 자칭하는 학생들의 기발한 장난이 이어졌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모형이 출현하더니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로 변신하기도 했다. 기물 파괴 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대학 본부는 이들을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학생들의 발칙한 상상력을 오히려 권장하는 모양새다. 기발한 장난의 무대가 된 그 거대한 돔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을까? 첨단 기술의 장비나 혁신적인 발명품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은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높직한 천장에서 자연 채광이 환하게 들고 중간 기둥 없이 널찍하게 트인 공간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열람실이었다. 둥근 벽면 안쪽에는 층층이 서가와 세미나실이 이어져 있고, 아담하게 분리된 서가의 구석마다 파묻힐 수 있는 책상이 놓여 있다. 그렇다. 돔의 내부는 전통적인 도서관이었다. 이 사실이 나에게는 돔보다도 더 거대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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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체면이 사라진 사회 시대 변화와 함께 사용 빈도가 줄어든 어휘 가운데 ‘체면(體面)’이라는 말이 있다. ‘남을 대하는 도리’라는 사전적인 뜻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등 부정적인 용례가 대부분이다. “체면이 서다”는 말도 겨우 낭패를 면했다는 수세적인 긍정에 불과하다. 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체면치레’ 역시 기분 좋게 쓰는 말은 아니다. 실속도 없이 체면만 차리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악습으로 지목돼 왔다. 나의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므로 체면에 매여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 리 없다. 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속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대개 그렇듯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이름’을 중시하는 삶이 지니는 가치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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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경쟁의 축제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종반을 향해가고 있다. 아시안게임은 금메달 482개를 걸어놓고 누가 많이 따내는지 개인별, 국가별로 ‘경쟁’하는 운동회다. ‘경(競)’은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며 쫓는 모양으로 각축(角逐)의 의미를 표현했다. 각 사람이 머리에 이고 있는 무언가가 후대에는 입으로 부는 악기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여겨지기도 했다. 몸싸움이 말싸움으로 변해간 셈이다. ‘쟁(爭)’은 물건 하나를 두고 위아래의 두 손이 서로 빼앗으려 움켜쥔 모양이다. “군자는 경쟁하는 일이 없다.” 수천년 전 공자가 한 말이다. 남보다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더 높은 곳,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굳이 경쟁할 때가 있다면 그건 활쏘기할 때뿐이라고 했다. 다만 이 역시 과녁을 잘 맞혀 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활 쏘는 당에 오를 때부터 마치고 내려와서 규칙에 따라 술을 마실 때까지 얼마나 온화한 언행과 반듯한 자세로 상대를 배려하고 악무에 맞는 우아한 동작을 취하는지, 그 모든 과정이 중요하다. 경쟁을 하더라도 군자답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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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식물 칼럼 이 지면에 글을 올린 지 9년째다. 격주로 쓰는 작은 칼럼이지만 쉬지 않고 올리기란 쉽지 않다. 연재를 마칠 적절한 때를 놓친 채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지금 필자는 실크로드 길을 따라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사막을 다니고 있다. 하지만 여행 중에도 마감 일자는 어김없이 이르고, 쿠차의 낯선 호텔 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을 수밖에 없다. 족쇄도 이런 족쇄가 없다. 그런데도 제법 오래 쓸 수 있었던 건 고전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다. 무궁무진한 고전이 있기에, 필자의 어설픈 생각을 거기에 기대서 매번 어찌어찌 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전과 현실을 섣불리 연결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의 아슬아슬한 연결이야말로 글쓰기가 갖는 매력이자 힘이기도 하다. 또 하나, 마감 시간 넘겨 급히 송고하고 나면 거기에 어떤 삽화가 연결되어 실릴지 기다리는 맛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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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49일을 지내고 49재(齋)는 불교의 장례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고인이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도록 기도하는 의례를 7일째마다 시행하는데, 이를 7회까지 하는 것은 이 49일 동안 다음 생을 받을 연이 정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연원은 불교에 있지만 49재는 고인의 영혼을 보내드리는 날로 일반화되었다. 지난 4일에 열린 49재 역시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였지만, 그 추모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49일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 불행한 일의 진상은 거의 밝혀진 게 없다. 교육부의 합동조사단이 10여일의 활동 끝에 8월4일 발표한 조사 결과는 사실관계를 일부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 더 구체적인 진상 규명의 책임은 경찰로 넘어갔다. 그 뒤로 다시 한 달,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한 경찰의 섣부른 발표가 문제시되고, 해당 학부모가 경찰이라는 사실마저 겹쳐 오히려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범죄 입증을 넘어 교육 현장의 실상을 밝히는 일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 수만명의 교사들이 “진상 규명이 추모다”라는 피켓을 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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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좋은 연설문, 멋진 연설문 연설문은 문학일까? 서정·서사·극·교술의 네 가지 갈래를 문학으로 다루는 교육에서 연설문은 이른바 ‘비문학’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서구 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수사학은 변론술에서 출발했다. 동아시아 역시 왕 앞에서 세 치 혀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했던 전국시대 유세객들은 이미 연설의 기술을 고도로 추구했고, 이후 문학의 핵심적인 갈래로 발전해왔다. 공자는 “말은 뜻만 전달하면 된다”고 했지만 “말에 문(文)이 없다면 멀리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말도 남겼다. 내실 없는 겉멋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읽는 이에게 지적·정서적 울림을 줌으로써 설득의 목적을 제대로 구현해낸 글이라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문학에 속할지와 무관하게 좋은 연설문과 안 좋은 연설문, 그리고 멋진 연설문은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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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찌는 듯한 더위를 이기는 법 폭염경보 문자가 연일 울린다. 염(炎) 앞에 폭(暴)을 더한 말에서부터 더위가 전달된다. 서(暑)와 열(熱) 앞에 혹(酷), 극(極), 고(苦) 등을 붙인 어휘들을 떠올리면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견뎌내기 힘든 더위를 겪으며 살아왔는지 느껴진다. 거기에 증(蒸)을 더하면 펄펄 끓는 찜통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하다. 입추가 8일이었다. 말복보다 며칠 앞서 입추를 둔 것은 극한 상황에서 희망을 보라는 뜻일까? 조선시대 문인 장유는 입추가 지났는데 한여름보다 심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하면서 200자 고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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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배움의 여유, 일의 여유 <천자문>은 중복 없는 한자로 각운과 대구도 맞추면서 의미를 살려 지은 4언고시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이 좋고 암송에 유용해서 오랫동안 초학자용 교재로 사용되었다. 천자문은 많은 수량의 사물에 순서를 매기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한양도성에는 1번 천(天)에서 97번 조(弔)까지 구역의 순서가 천자문으로 적혀 있다. 십진법이 아닌 천진법인 셈인데, 그만큼 많은 이들이 외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논어> 첫 구절에 나오는 학(學)은 천자문에서 몇 번째 글자일까? 77번째 구 “학우등사(學優登仕)”로 등장하니 305번이다. <논어>에 실린 자하(子夏)의 말 “벼슬살이에 여유가 있으면 배우고, 배움에 여유가 있으면 벼슬살이한다”에서 따온 구절이다. 벼슬살이에 매몰되지 말고 여유를 내서 배워야 벼슬살이도 더 잘할 수 있고, 배움에 여유가 생긴 뒤에 벼슬살이해야 배움을 널리 실천할 수 있다. 인격 수양으로서의 배움과 경세 실천으로서의 벼슬살이가 모양은 달라도 이치는 같다고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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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장모님의 시집을 엮으며 “잘못도 없고 잘함도 없는지라 술과 음식 마련할 생각뿐이니 부모 걱정 끼칠 일 없겠네.” 아들은 귀하게, 딸은 천하게 길러야 한다는 관념을 문자 그대로 표방한 시인 ‘사간(斯干)’의 일부다. 공자의 명성으로 경전의 반열에 오른 <시경>에 실려 전한다. 여자는 잘못된 일은 물론 잘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이 가혹한 요구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할 여자가 두각을 드러내면 불길하다고 여기는 오랜 전통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이대우가 어릴 때 시골 훈장에게 <시경>을 배우다가 의문을 품은 것도 이 대목이었다. 무엇이든 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이 한마디 말로 모든 여자를 어리석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릴 적 품은 의문은 결혼해서 장모를 만나면서 더 커졌다. 장모 홍원주의 친정은 특이했다. 좌의정 홍석주와 문장가 홍길주가 오빠였고, 남동생 홍현주는 부마인 권세가였는데, 어머니 서영수합은 아버지와 시를 주고받으며 즐겼다. 서권기 넘치는 집안에서 그녀도 자연스럽게 책을 읽고 시를 짓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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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볼일을 보고 나서 물을 내리다가 멈칫할 때가 있다. 간단한 조작 하나로 오물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고 깨끗한 물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엄청난 사람들이 곳곳에서 흘려보내는 이 하수들이 어떻게 처리될지 걱정스럽기도 해서다. 그다음의 과정을 모르는 우리의 눈에는 편리한 조작과 깔끔한 결과만 보일 뿐이다. 지정된 봉투에 담아 수거장에 내놓기만 하면 눈앞에서 곧 사라져 버리는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비용만 내면 그다음의 과정은 볼 필요도 없이 처리되는 게 당연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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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고단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윤병무 시인의 ‘고단(孤單)’이라는 시의 첫 연이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삶의 고단함으로 힘이 풀리는 손을 보며 문득 별세(別世)의 순간을 떠올린다. 제목에 한자를 병기한 데에서 ‘지쳐서 피곤하다’는 뜻과 ‘단출하고 외롭다’는 뜻을 겸하여 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조선 최고의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는 율곡 이이 역시, 자신의 고단(孤單)함이 너무나 심해서 스스로 민망할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우계 성혼과 편지로 치열한 성리 논변을 주고받다가 그마저도 자신과 소견이 같지 않음을 탄식하면서 한 말이다. 이이의 문집에는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가 22편이나 실려 있다. 한 살 터울의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며 삶과 학문을 나누었다. 이이가 세상에 자신과 부합하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저에게는 오직 형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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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의 책상물림 거리낌 없음에 대하여 “은밀한 곳이 가장 잘 드러나며 미세한 일이 가장 잘 나타난다.” 광장에서 거창하고 시끄럽게 벌어지는 사건보다 독방에서 소리 없이 하는 일이 더 잘 드러난다는 말이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유가 경전의 하나인 <중용>에 나온다. 남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조심하라는 ‘신독(愼獨)’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신독이라는 말을 꺼내기 무색할 정도로, 밀실은 물론 남의 이목에 훤히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다. 거리낌 없는 솔직함이 미덕이고 거리낌 없는 당당함이 선망되는 시대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떳떳하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유로워서라면, 거리낌 없음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일이다. 다만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을 하면서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해서 거리낌 없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