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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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안녕하신지요 지붕에 비가 새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그쪽에서 유심히 쳐다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인사를 했다. 시골에서는 무조건 인사를 잘해야 무탈하게 산다. 가까이 다가오자 누군가 싶어 자세히 보니 전 마을이장이었다. 마음은 깊으나 좀 시크한 분이다. 처음에 외지인으로 마을에 들어와서 문화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협조적이었다. 그런데 말은 늘 무심했다. “정신 나갔으니까 이 짓 하지.” 고생한다는 의미로 듣고 있다. 누구에게나 반말 투다. 일전에 읍사무소에 전화를 하는데 그쪽에서 “왜 반말을 하십니까?”라며 언성을 높이자 전 이장은 “내가 언제 반말해”라고 응수했다. “지금도 반말이 아니고 뭡니까?” 전화기 밖으로도 들리게 다툼을 하고 있었다. 시골 어른들은 반말을 많이 한다. 서로 존댓말을 쓴다는 것을 이질적이고 소모적인 행동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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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꽃무늬 양산 군산 소룡동 철거 지역에 끝까지 버티고 있던 빈집의 풍경이다. 텅 빈 공간에서 꽃무늬 양산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내 집이었어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주민 대부분은 황해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땅인들 자기 소유가 가능했겠는가. 국유지에 판잣집을 짓고 살다가 나중에 시멘트 블록으로 교체한 것이 변화의 전부이다. 200여호가 벌집처럼 붙어 있었으며 주민들은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살았다. 그마저도 수해위험지구 철거라는 이유로 터전을 잃고 쫓겨나갔다. 땅의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손에 쥔 것이 거의 없지요”라고 주민이 말했다. 사진집을 만든 후에 찾아갔을 때는 대부분 철거된 상태였다. 그중 형편이 나은 몇 집이 남아 있었는데 ‘보금자리 아파트’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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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동물의 왕국 한 마리의 동물 앞에 서 있다. 하이에나인지 늑대인지 여우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김윤해는 길이 10㎝ 정도의 조악한 플라스틱 완구를 120㎝로 확장시켜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했다. 값싼 가격으로 쏟아지는 플라스틱 제품들, 그래서 정교하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자본주의의 가장 적나라한 폭력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제국주의 산물로 동물원이 만들어지고, 인간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게 만들었던 동물원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서,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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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북전주역 북전주역을 찾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전주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중에 팔복동 끝자락에 주차를 하고 보니 그 건물이 바로 북전주역이었다. 그동안 나는 북전주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20여년 전 남광주역 사진을 찍기 위해서 매일 새벽에 광주까지 다니면서도 몇십년째 살고 있는 전주에서 북전주역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연히 그곳을 찾아가게 되다니! 특별한 인연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건널목에 이르렀을 때 신호음과 함께 회색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역인가?’ 하고 사무실 쪽으로 가보니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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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골든타임 며칠 몸살을 앓다가 모처럼 새벽 산책길에 나섰다. 세월이란 것이 참으로 빠르게 흐르고 있다. 아카시아꽃이 한창이던 것이 이제는 밤꽃이 하얀 무리를 이루고 피어 있다. 자갈길가에는 접시꽃도 피어 있다. 작은 밭을 일구는 이가 해마다 접시꽃씨를 뿌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밭 아래쪽에서 곱게 피어 있다. 어느새 자두도 빨갛게 익었다. 참새 두 마리가 참나무 가지에서 대나무 가지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경쾌했다. 갑자기 참새는 몇 년을 살까 궁금했다. 길어야 5~6년이란다. 참새는 죽을 때 어쩌면 장렬하게 숲에 몸을 던질 것 같기도 한데 사고로 많이 죽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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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산의 기억 1950년대 울릉도 풍경으로 갓 이은 듯한 초가지붕 한 채가 웅혼한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앞에는 미루나무 두어 그루가 석양 햇살을 받고 반짝인다. 뒤로는 네 개의 산자락이 지는 햇살을 받고 몸을 안으로 접는 경건함을 보인다. 나무와 계곡을 끌어안는 간결한 어둠. 어쩌면 산은 도(道)와 같은 것이다. 보이면서도 다 볼 수 없는 것. 그래서 그것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김근원(1922~2000)은 산악인이며 사진가이다. 그러나 스스로 산악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진작가로 앞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 후 북한산의 아름다운 자태에 취해 첫 산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본격적인 산악인이 되어 험준한 산행을 이어갔으며 산악사진의 귀감이 되는 작품을 남겼다. 사진만이 목적이었다면 그토록 올곧은 사진의 깊이까지 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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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장에 가자 정영신은 시골 장터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지가 30년이 넘는다. 아마추어 작가 시절 너도나도 시골 장터에 가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았다. 왜 그것이 흥미의 주제가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장날은 촌놈 생일’이라고 할 만큼 보통날보다 뭔가 더 특별하고 생기가 돌아 공동체의 축제 같은 날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닷새 만에 돌아오는 장날이건만 그 장을 보러가기 위해서 며칠을 설렌다. 계란도 모아 열 개씩 꾸러미를 만들고, 들깨도 털고, 옷도 곱게 다림질을 해둔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일찍 서둘러 나서야 한다. 장에 가는 것은 내 것도 내다 팔고 남의 것도 사오기 위해서다. 그래서 들깨를 파는 일을 ‘산다’고 했다. 당신이 사니까 ‘사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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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유월의 숲 봄이 오는가 싶더니 꽃들은 언제 져버리고 장마 때와 같이 하루걸러 비가 내린다. 산에는 여름이 빨리 오고 새 소리가 드높아졌다. 세상의 걱정을 뒤로하고 산길을 걷는 일은 마음을 쉬기에 제격이다. 그곳은 비교적 사람들의 발길이 한적한 곳이다. 편백나무가 빼곡하고 경사가 심하지는 않은 곳으로 사람이 겨우 혼자 다닐 수 있는 산책길이다. 그런데 길 아래 경사진 곳으로 자전거 한 대가 쓰러져 있다. 조금 있자니 초등학교 5~6학년쯤으로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달려오면서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랬지”하며 자전거를 일으켜 세운다. 그 뒤로 달려오는 같은 또래의 약간 덩치가 커 보이는 아이에게 하는 소리였다. 약간 덩치가 커 보이는 아이는 친구가 일으켜 세운 자전거에 오르면서 “내 등에 흙 좀 털어주라”고 하자 먼저 온 아이가 친구의 등에서 흙을 털어주었다. “엉덩이는 네가 털어. 제발 좀 넘어지지 마라.” 마치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잔소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바라보다가 “친구가 넘어진 거니?” 하고 물었다. “네” 하는 대답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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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나무 나무의 형태나 색깔이나 쓰임새나 향기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참 두드러지게 멋진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나무는 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긴 수명을 지켜온 것도 있는데 죽어서도 오랫동안 유용하게 쓰인다. 인간의 눈으로 쓰임새를 이야기하는 것은 속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의 말인 것을. 나무는 모습에서도 각기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목련은 목련대로 서슴없으면서도 고아한 모습을 드러낸다. 과일나무도 그냥 두면 시든 떫든 본래의 맛을 지닌 채 열릴 텐데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사람들의 목적에 맞게 활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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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이천원의 예술 예술은 왠지 도시적이어야 하고, 지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예술은 깊이 파고들거나 눈이 번쩍이게 창조적이어야 할 것 같아 가까이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비 오는 산책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날도 발걸음이 할아버지의 길목 좌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도 오고 이 철에 나오는 채소도 마땅히 없을 것 같아 스쳐가려 하는데 좌판 위에 부추 한 움큼이 빨간 소반에 담겨 있다. 테두리에 흑백 패턴무늬가 있는 검정 우산이 부추가 비에 젖지 않도록 소중히 감싸고 있었다. 땅바닥에는 ‘부추 2000’이라고 쓴 골판지가 비에 젖어 있다. 좌판 왼쪽에는 검정 플라스틱 모종판이 있고, ‘노각 오이 묘 1포기 500원’이라고 쓰여 있다. 할아버지는 산자락에 붙어 있는 땅에 매년 농사를 지어서 등산객에게 팔고 있다. ‘남의 땅인데 놀기 뭐해서 잠시 빌려서 심었다’고 하는데 적지 않는 땅을 기계도 없이 삽으로 흙을 파고 채소를 가꾸었다. 그런데 올봄에는 땅을 일구지 않았다. 힘에 부치시는 모양이었다. 밭에는 풀이 무성한데 그 안에서 작년에 심어둔 부추가 싹이 나니 그것을 다듬어서 팔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불미나리도 팔고 고수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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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봄날은 간다 십여년 전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에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지역 사진들을 모아서 테마별로 기획전을 이어가던 때였다. 사진 전시를 하는 것 같은데 영정을 찍어보면 어떠하겠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부모님 사진은 사진관에 가서 찍어드리면 될 것을 왜 나를 찾아왔을까 의아했다. 그이는 부모님께 선뜻 ‘사진 찍으러 가시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왕 남 좋은 일 하고 있으니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라는 당부를 두고 갔다. ‘남 좋은 일’이라는 말이 당시 주변에서 자주 듣는 ‘쓸데없는 일’이라는 느낌도 있어서 좀 씁쓸했지만 아무튼 그것을 계기로 작업계획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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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빨리 낫는 약 보건진료소장 박도순 선생은 전북 무주에 살고 있다. 그곳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정감 어린 글을 덧붙여 여러 권의 책을 냈다. 타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도 미처 알 수 없는 것들,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이야기들이다. 팔순이 넘은 김씨 할머니가 밭일을 하다가 손을 다쳐서 보건진료소에 찾아왔다. 피가 난 상처에 두루마리 휴지를 감고 오신 것이다. 어르신들은 그 많은 세월을 기다림 속에 살았지만 일을 두고는 못 참는다. 봄바람 속에 상추가 잎을 터트리고 나오자마자 빨리 자라라고 비료를 준 것이 사달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