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사진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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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상경 올해는 코로나19에 잔병치레까지 하느라 서울 나들이가 힘들었다. 모처럼 기차를 타고 가는데 들녘의 벼가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밭에 들깨 말리는 모습이 지나가고, 잡초가 무성한 빈집의 마당도 보였다. 서울로 가까이 갈수록 벼는 더 노란빛을 띠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벼가 더 누렇다는 것은 추위를 대비해서 제 스스로가 서두르는 것이리라. 용산역에 내려서 전철을 탈까 하다가 택시를 탔다. “어디서 올라오세요?” 늙수레한 운전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지역에서 갓 올라왔다 해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또 세상 돌아가는 일이 뭐 좋은 게 있다고 생면부지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겠는가. 기사는 부동산 이야기부터 했다. “세상에 10억이 뉘 집 개 이름이랍디까? 그냥 집값이 올랐다 하면 10억이에요. 그게 말이 되나요?” 대꾸가 없자 백미러로 나를 주시했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아 보이는 창밖의 상가들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요?” 기사가 나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만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네” 하고 대꾸를 했다. “평창동에서는 보물을 마당에다 숨겨두고 영감이 죽었는데 마누라가 포클레인으로 온 마당을 다 파서 찾았대요.” 서울역쯤 왔을 때 기사는 “아차, 미터기 꺾는 것을 깜박했네” 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잠시 말을 그치는가 싶더니 기사는 또 말을 이어갔다. 경복궁 쪽으로 꺾자 이제는 ‘대통령 걱정’을 한다. 차를 세우자 미터기에 6400원이 찍혔다. 나는 1만원을 건네주었다. ‘남 걱정 마시고 자기 일 잘하시죠.’ 마음속으로 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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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이노우에 코지 2018년 여름에 한영수 선생(1933~1999)과 이노우에 코지 선생(1919~1993)의 작업을 이들의 2세대가 뜻을 같이해서 서울에서 전시를 기획하고자 하는 그룹에 끼어 후쿠오카에 가게 되었다. 일본 작가는 별로 친숙하지 않아서 스기모토 히로시나 구와바라 시세이를 아는 정도였다. 사진은 서양에서 왔기에 일본 사진가로부터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특히나 해방 후 일본 사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이제는 서양 사진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진에 주목을 하면서 일본 사진가들의 옛날 작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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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넘어진다는 일 얼마 전에 인도를 걷다가 내 발에 걸려서 넘어졌다. 넘어지면 우선 주위부터 돌아보게 된다. 그 꼴을 누가 봤을까봐 창피해서다. 왜 아픈 것부터 신경을 쓰지 않고 남에게 창피할까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넘어지는 것을 보고 비웃거나 조롱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누구나 넘어질 수 있는 일인 것을. 유명인사가 넘어졌다면 인간의 약점을 바라보는 느낌이 있기는 할 것 같다. ‘나도 넘어지는데 당신도 넘어질 수 있군요’라는 생각 같은 것이다. 그러나 대단한 사람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창피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낭패감을 느끼며 얼른 일어서서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 살펴보니 무릎이 까여 상처가 나고 팔꿈치와 손바닥은 피가 맺힌 채 부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는데 자고 나니 온몸이 쑤시고 욱신거렸다. 조금 덜 넘어지려고 팔과 다리에 힘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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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알밤 벌써 알밤을 줍는 계절이 왔다. 가까운 산 초입에서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숲길로 들어섰다. 철조망이 쳐 있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묘지 하나가 보인다. 묘지는 철조망이 끝나는 곳에 밤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전망도 그런대로 훤하고 햇빛도 살짝살짝 비친다. 주변에 밤송이가 여기저기 수북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검은 봉지와 막대기 하나를 들고 그 앞으로 지나갔다. 이미 여럿이 다 뒤지고 간 것이다. 그래도 밤나무 아래에는 한두 개쯤 숨어 있기 마련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몇 개를 주웠다. 이래가지고서야 다람쥐는 뭘 먹고 살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긴 다람쥐는 숨겨놓고 잊어버려서 못 찾아 먹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밤이 싹이 트고 또 자라나보다. 돌아서려는데 밤송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예쁜 밤 두 개를 얻었다. 맘을 고쳐먹고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밤송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모처럼 멍 때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다. 잠시 후 이번에는 뒤쪽에서 가볍게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 사이에서 작은 밤 서너 개를 주었다. 밤 줍는 일은 여간 재미가 있는 게 아니다. 시장에서 한 되만 사도 충분히 먹지만 산에서 주운 알밤은 더 달고 맛있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산에 있는 알밤을 다 찾아 먹는 것은 동물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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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GOD is LOVE 몇 해 전부터 매일 아침 8시에 성경 한 구절을 보내는 목사님이 있다. 그것을 읽는 날도 있고 무심히 지나가는 날도 있다. 목사님은 사진을 잘 찍는 분이어서 교회에서 열리는 전시에 다녀 온 적도 있다. 친정어머니를 비롯해서 형제들이 다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나는 무신론자에 속한다. 올케는 내 생일에 자기도 못 들고 다니는 비싼 성경책을 여러 번 보내곤 했다. 나는 교회도 기웃거려 보고,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학습도 받아 보고, 절에도 자주 다녔다. 이렇듯 공(?)을 안 들인 것은 아니나 나는 어디에 속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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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 대선 후보들, 강점을 보여줘 김연아,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버락 오바마, 타이거 우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에게는 모두 코치가 있다. 코치는 흔히 스포츠 세계에서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요즘엔 성과를 높이기 위해 많은 기업이나 조직에서 경영자를 위한 코칭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코치’의 어원은 헝가리의 도시 코치(Kocs)에서 개발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서 유래했다는데, 코칭받는 사람과 코치 사이의 파트너십을 통해 개인은 물론 조직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통상 코치들은 코칭받는 사람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강점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스타 플레이어의 코치가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뉴스가 되곤 한다. 그만큼 강점을 가려내고 상황에 맞게 발휘하게 해주는 코치의 역량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강점을 키우는 것과 약점을 보완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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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길 굽이굽이 강을 따라가다 보니 띄엄띄엄 인가가 보이고 늦여름 가로수 길의 벚나무 잎은 벌써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십여년 전에 정미소를 찍으러 다닐 때는 길은 좁았지만 버스 왕래도 많았고, 길가에 붙어 있던 동네가게 앞에는 사람들도 제법 모였다. 전북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정미소’ ‘이발소’ ‘근대화상회’ 등을 찍으러 다니느라고 이쪽 지방의 국도 변천사를 꿰고 있다. 어디쯤에 가면 맛있는 한우소고기 정육점과 국물이 시원한 국숫집이 있다는 것을 알며,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생겼으며 길이 어떻게 변해버렸는지를 안다. 특히나 면(面)이나 군(郡)의 경계가 되었던 재(岾)를 지나다보면 옛사람들의 발걸음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등짐을 지고 올라 내리막 걸음을 해야 했던 재는 깎이고 닦여서 그 경계가 허물어져버렸다. 시대가 변할수록 길은 원대하게(?) 뻗어 갔고 사통팔달로 통하게 되었다. 그 길은 도시로, 대도시로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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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빅브러더 “요새도 이 짓을 해서 밥 먹고 사요?” 옆집 할아버지가 와서 묻는다. 시작할 때부터 잔뜩 의아심을 가진 얼굴로 찾아와 골목 안에서 전시장을 연다고 하니 어떻게 먹고사느냐고 걱정이었다. ‘자본주의 세상에’라는 말에 몇 번 강조가 들어가 있었다. 그이의 걱정만큼이나 어려운 시간이 10년 가까이 흐르면서 골목사람들과 나름 어울려 지내고 있는데, 오늘은 또 다른 일로 찾아오셨다. 지난번에 일본 작가 전시를 한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필시 건넛집 할아버지의 의견까지 덧붙여서 오신 것이리라. “일본 것 사지도 말고 일본 가지도 않는다고 안 허든가요? 그런디 일본 사람 전시를 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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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꼼뿌레샤 대도시는 정글 같아서 누가 더 높고 큰 건물을 많이 차지하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다. 사진가는 그 정글의 탐색자로서 역할을 한다. 그곳은 누가 얼마나 더 치열하게 파괴적이며 공격적인지 경쟁을 하는 곳이다. 누추한 집들을 뭉개버리고, 그곳에 콘크리트와 철근이 엮이면서 높은 건물이 세워진다. 어제의 천장이 오늘은 바닥이 되면서 위로 거침없이 솟아오른다. 그곳에 노동자들이 붙어서 일을 한다. 붙어서라는 어감이 좋지 않으나 노동자는 여전히 그런 여건에서 일을 한다. 85년 전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의 컨베이어 앞에서 쉴 새 없이 나사를 돌리는 노동자나 지금의 노동자나 입장이 별로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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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복숭아 뜨거운 열기와 코로나19로 범벅이 된 지친 시간의 물결 속에서 나무의 초록빛은 더 짙어지고 과일은 제 몸속에 당분을 저장해가고 있다. 숲이 짙어진다는 것은 곧 가을이 오고 단풍이 든다는 신호이다. 왜 무더위 한가운데에 입추가 들어 있을까? 절정이었을 때 다음에 올 위기나 평화를 준비한다는 뜻일 것 같다. 더위와 코로나가 더 이상 상처를 주지 말고 잘 지나가길 바란다. 자주 가는 산의 길목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 작년 여름 긴 장마로 복숭아가 익은 채로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과수원을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가슴이 쿵쿵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시 무심한 시간은 흘러 올해 복숭아 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곳은 늦은 복숭아라서 이제 시작해 추석 전에 작업을 끝낸다. 과수원 주인 아주머니가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를 따서 밭에서 들고나왔다. 갓 딴 복숭아의 신선함과 보드라움과 달달함이 비료 봉지로 만든 투명한 바구니에서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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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데왁세기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나 동백꽃은 애절함을 주지만 여름에 피어나는 꽃에서는 인내와 노고를 참는 무던함이 보인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맘껏 화사함을 드러내는 능소화나 한여름에 피어서 가을까지 들녘을 밝히는 배롱나무는 자칫 무기력해지기 쉬운 여름을 이기는 힘이 되어준다. 꽃인들 좋은 시절에 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들이 있다. 사는 일이 힘들어지면 과거도 이웃도 잊고 지나가게 되는 것인가. 제주의 4·3과 여수항쟁, 광주 5·18이나 세월호를 이야기하려 하면 ‘이제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고현주 사진가는 4·3학살로 인해 스러져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작업으로 그 유족들이 지녀온 유품들을 찾아 영혼을 붙이는 작업을 해왔다. 떨어진 붉은 동백꽃 위에 놓인 핏빛 저고리와 구릿빛 수저, 벚꽃나무 사이에서 펄럭이는 옥색 두루마기. 작가는 스스로도 아프고 유족도 아프고, 보는 우리도 아픈 현실을 끌어안은 채 세상에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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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늘 노들섬 사진은 재현에서 시작된다. 이 기능은 사진의 복잡한 이론을 낳게 한다. 이런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사진이기에 가능한 초월적인 것이 있다. 사진은 먼 시간을 단숨에 끌어당기는 역사의 증언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사진 한 장이 문득 60여년 전 한강 노들섬의 모습을 아련히 다가서게 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두 여인의 뒤태가 곱다. 멋이란 이런 것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는 것, 되바라지지 않는 것, 무상한 것. 초로의 두 여인은 곱게 단장을 하고 여름날 물 구경을 나온 것인가. 한 여인은 꽃무늬 치마에 꽃무늬 양산으로 깔맞춤을 하고 있다. 여인의 뒷모습에서 속옷이 비치는 시스루룩 저고리가 인상적이다. 다른 여인은 흰 치마저고리에 흰 양산을 들고 있다. 한국의 정서와 멋과 여유를 사진에 잘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