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스승님 뒤를 따라

서정홍 산골 농부

이 시대 참스승이 누구냐고? 천 번 만 번 물어도 대답은 똑같다. 한평생 농사지으며, 그것도 ‘돈벌이 농사’가 아닌 ‘살림살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산골 할머니이시다. 그분들은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고 한글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뭔지도 잘 모르신다. 그러나 자연 순리에 따라 이웃들과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다보면 반드시 ‘착한 뒤끝’이 있다는 것쯤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아신다.

“사람이 그냥 밥 묵고 살다 죽으모 되지. 밥 묵고 살자고 남을 속이고 괴롭히모 쓰겠냐? 돈 좀 벌어보겠다고 집을 두세 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그렇고. 투기로 땅을 사고파는 것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게 다 천벌받을 짓이야. 집이고 땅이고 돈이고 누가 많이 가지모 가난한 사람은 우찌 묵고살겠노? 가난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우리 멕이고 재우고 입히는데…. 새와 벌레도 집이 한 채잖아. 그라이 천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씰데없이 많이 갖고 있는 게 천벌이야.”

그분들은 수십만 권 수백만 권 팔렸다는 베스트셀러 책 한 권 읽지 않았다. 성경이나 경전이 무언지도 모른다. 수십억 수백억 큰돈을 쏟아부어 으리으리하게 지은 콘크리트 교회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이비 성직자들이 입만 살아서 부르짖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따위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웃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아신다. 더구나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조차도 그냥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한평생 사신다.

“아이고, 저 인간은 욕심이 배 밖으로 나왔어야. 한평상 한동네 살아도 김치 쪼가리 하나 나눠 먹는 꼴을 못 봤으이. 저 인간은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여.”

모였다 하면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험담을 늘어놓던 산골 할머니들은, 그 인간이 농사일 바쁘다 하면 자기 일처럼 달려가서 일해 주신다. 며칠 전, 그 인간의 아들이 장가갈 때는 이른 아침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 주셨다. 사람이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다 아시는 것이다.

그분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명함 한 번 만들지 않았다. 자랑삼아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한 번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들은 겨울 햇살 잘 드는 마루에 앉아 하루 내내 단돈 천원도 안 되는 떨어진 나락 포대를 바느질하고 계신다. 30년 전에 장날 가서 사온 플라스틱 바가지가 햇볕을 보면 금방 상한다며 집 안으로 들여놓으신다. 더구나 구멍 난 양말과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녀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20년 넘도록 중풍에 걸려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손수 밥을 떠먹여 드리고 똥오줌도 다 받아내시는 산골 할머니들은 다 아신다, 할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보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몸이 성할 때나 병들 때나 함께 살겠다는 입에 발린 맹세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떠나는 순간까지 아끼고 섬겨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아신다.

잘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가르쳐서 깨달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믿는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면서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온몸으로 삶으로 저절로 깨달은 것이다.

서정홍 산골 농부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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