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 숨

숨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확실히 알았다. 축농증이나 비염을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코가 아니라 자꾸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운동 코치가 내가 숨을 잘 못 쉰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숨, 특히 날숨이 짧다는 지적을 한 적도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세월호 직후 108배와 명상을 할 때도 나는 내 호흡이 짧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었다. 아, 나는 왜 숨쉬기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일까?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장자>에 나오는 도를 체득한 사람, 진인(眞人)은 잠을 자도 꿈꾸지 않고, 깨어서도 근심이 없다. 그는 먹을 때는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고, 대신 숨쉴 때는 깊고 고요했다. 거의 숨쉬기만으로도 생명을 유지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기 때문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시비 호오에 끌려다니지 않고 완벽한 평정심을 지닌 진인의 상태를 꿈꿨다. 그렇다면, 비슷하게라도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얕고 짧은 나의 숨쉬기를 어떻게든 바꿔보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틈만 나면, 운동할 때든 산책할 때든 나름의 호흡 수련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면서 쓰러질 뻔했다. 투머치 호흡! 숨을 잘 쉬어보겠다며 호흡을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조절하다 부른 화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웃으면서 호흡명상의 대가,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었다. 부처님은 단 한 번도 숨을 잘 쉬어야 한다거나 날숨이 중요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숨을 내쉴 때는 내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들이쉴 때는 들이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길게 숨을 쉴 때는 그러고 있다는 것을, 짧게 숨을 쉴 때는 또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이야기를 하셨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호흡은 방편일 뿐 수행의 핵심은 내 눈앞에서 무엇이 생겨나고 지나가는지를 무심히 지켜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면 희로애락의 온갖 감정은 결국 사라지고, 또 그렇게 자신을 비우면 이른 아침에 연꽃잎이 저절로 한 잎 한 잎 열리듯 타자를 향해 나를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양생의 지혜에서부터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숨을 생명의 기본으로 여기는 까닭은 어쩌면 아낙시메네스의 말처럼 공기가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생명도 공기의 유동 속에서 탄생하고 소멸한다. 물질의 상이한 상태를 매개해주는 것도 보이지 않는 향기나 소리를 전달해주는 것도 공기이다. 만물과 함께 공기의 순환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호흡, 우리의 숨이다. <동의보감>의 첫 장에 나오는 ‘신형장부도’(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려놓은 그림) 역시 배꼽 주변의 출렁이는 주름을 통해 우리가 세상 만물과 보편적 호흡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우리는 나와 타자 사이의 참된 공유인 보편적 호흡을 잃어버렸다. 식물철학자인 마이클 마더는 <식물의 사유>라는 책에서 이것을 “근대 인간은 자신의 숨을 없앴습니다”라고까지 표현한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 특히 식물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무상으로 받았지만 돌려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전용했고, 결국 주변 세계에 돌려준 것은 “오염과 ‘에너지 생산’의 치명적 부산물뿐”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오늘날 미세먼지, 코로나19, 폭염 같은, 숨구멍이 막히는, 질식의 문제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어떻게 숨의 공유를 되살릴 수 있을까? 마이클 마더는 “자연경제를 제도화하는” 문제를 넘어서 우리가 언제나 만물에 빚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 다른 존재(마더에게는 특히 식물)의 관대함을 통해서만이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오래 걷다 보면 처음에 머리를 어지럽혔던 온갖 잡념도, 마음 가득 쌓였던 분노와 우울도 저절로 사라지면서 숨과 발걸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온다. 내가 숨을 쉬는 게 아니라 공기가, 바람이, 숨이 나를 통과한다고나 할까. 잠시나마 견고했던 자아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내가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고 평안과 안식이 찾아온다. 부처님도 말씀하셨듯이 생명은 늘 중생(衆生), 생명‘들’로만이 존재한다. 그‘들’ 사이에서, 그 연결의 작은 공간 속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숨통을 틔운다. 우주에 혼자 쉬는 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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