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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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튀긴 면 하나에 수프 한 봉지. 에걔, 고작 이거냐 싶어도 끓는 물만 부으면 한 끼로 훌륭하다. 텔레비전이 먹통이 되고, 드디어 기사가 오셨다. 대뜸 건장한 기기를 자빠뜨리고, 나사 풀자, 드디어 속이 홀랑 드러났다. 이게 다야? 싸늘한 기판 위에 레고 같은 반도체, 얼기설기 전선들. 거실을 점령한 기기의 실상이다. 같잖게 볼 일은 아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걸 작고 콤팩트하게 만들려는 게 현대의 문화다. 슥슥삭삭 점검한 뒤 놀랄 틈도 없이 전기를 넣자, 요술처럼 불이 들어오고 미국 대통령이 툭 튀어나왔다. 트럼프가 채신머리없이 일론 머스크의 발바닥에 키스하는 사진이 떴다. 교묘하게 둘 다 왼발바닥이다. 물론 가짜 사진이다. 개인적인 역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머스크는 너무 설친다. 굉장한 머리와 개척자 정신으로 시대의 길목을 지키고 앉아 대박을 노린다. 사업이든 행정이든,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데 막무가내의 효율성만을 따지려 든다. 그의 뉴럴링크는 사람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 궁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주로 나아가고 두뇌를 파고드는 머스크가 설마 트럼프의 머리를 조종하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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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계엄과 계몽, 헌법과 풍경 국어사전은 풍경을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으로 풀이한다. 이 문장에는 ‘눈앞’이 빠져 있다. 풍경은 내가 보는 눈앞의 광경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눈앞은 문제적이다. 늘 빤한 것 같아도 결코 뻔하지 않은 깊숙하고 은밀한 공간. 사물과 사실이 항상 활활 타고 있는 장소. 저기 저 눈앞의 자연은 탄복할 만한 재주를 지녔다. 천하 만물에게 자신을 동시에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도 손톱만큼의 충돌도 없이, 현 사태를 유지 관리하는 자연의 경영술이 아닌가. 자연은 시시각각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이들을 안심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해 안 변하는 척, 정말 고수의 묘기를 부리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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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 읽는 재미 예측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인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에 이은 <기생충>이 가족의 갈등을 다뤘다는 몇 줄의 예고가 흘러나왔을 때,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한다는 <변신>을 쉽게 떠올렸다. 그러나 제 역할을 못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 밥버러지에 관한 게 아니었다. 나의 안일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었다. 식충이로 변신한 식구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가족 간의 대립을 통해 사회 계층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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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체포의 체’ 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말 어느 국회의원(A)이 회의 석상에서 어느 국회의원(B)에게 고함을 질렀다. 저거 순 쓰레기네! A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이크를 타고 경향 각지의 안방까지 들렸지만 정작 건너편 B의 귀에서는 그냥 스치고 말았다. 둘은 같은 공간에서 또 말을 주고받는다. 말만 A의 발등을 찧었나. 이후 B가 아니라 A만 보이면 쓰레기가 먼저 A의 얼굴을 덮어버린다. 말의 작용이다. 어느 변호사가 기자들을 모아놓고 12·3 내란 사태 당시 계엄군이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를 체포하려고 했다는 의혹에 대해 “체포의 ‘체’ 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하다. 그의 말이 오히려 당시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이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측근은 거짓말로 인터뷰하고, 당사자는 자기 살길만 찾는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의 반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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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판사 한기택 소주 공장 다니면서 소주 많이 마신다는 말처럼 싱겁기도 하겠지만, 출판에 몸담고 책으로 지은 인연이 제법 많다. 궁리에서 책을 낸 정신과 의사의 주선으로 영화감독, 배우, 의사 등과 어울린 후끈한 자리. 자유로운 정신들답게 화제는 사방으로 흘렀다. 문득 술이 제법 불콰해진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고교 시절, 방송반이었는데, 전설로 자리잡은 선배님이 있다면서, 목숨 걸고 재판했다는 판사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당시 이명박 치하에서 광화문의 어이없는 이른바 ‘명박산성’을 성토하다 나온 한 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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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불발탄이다. 그래도 폭탄은 폭탄이다. 낙진의 후과가 만만찮은 계엄 폭탄. 경계할 계(戒), 엄할 엄(嚴). 계엄이라는 다소 괴이쩍은 이름의 이 짐승을 또 만날 줄이야. 그 옛날 막다른 골목에서 된통 물린 기억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갑진 12월3일. 그날 밤의 내란과 이후 전개된 사태에 일상을 온전히 회복하기가 힘든 이웃이 많다. 수괴(首魁), 체포(逮捕), 탄핵(彈劾), 구속(拘束) 등등 육법전서에나 어울리는 말들이 느닷없이 뛰쳐나와 실생활을 휘젓는다. 사전 속에서는 얌전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사납기 그지없는 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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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을사년을 맞이하며 우리말을 받아적는 자음과 모음 중에 하나라도 잃는다면 자연계의 연쇄 사슬이 돌발적으로 끊어진 미싱 링크처럼 그곳의 발음이 술술 새서 아무리 반듯한 생각을 하더라도 말의 빈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이 있어야 세계도 가능한 것. 이러한 자음 중에서 특히 리을(ㄹ)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저 리을이 없다면 이 세상의 의성어, 의태어가 이렇게 풍부할 수 있겠나. 천지간에 미만한 소리와 동작을 어떻게 다 살리겠는가. 빗소리, 바람 소리, 아득한 허공을 나는 철새들의 기척. 이런 리을은 구불구불한 골목 같기도 하고, 가늘가늘 내리는 빗줄기가 사나운 바람에 휘청거리며 그리는 궤적 같기도 한데, 그런 리을이 있어 이 세상은 스프링 같은 탄력을 마음껏 발휘하느니, 활활 끓는 리을의 행렬을 보라. 물, 불, 길, 술, 말, 발, 돌, 철 그리고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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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네 글자의 점묘화 달이 둥싯 높이 떠오른다. 훌쩍 달에 건너가면 지구가 저 아래 보일까. 그럴 리가, 어느새 지구가 저 위로 둥글 떠 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정중히 받들지 않는다면 우주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골라 마르지 않는 신화를 두레박처럼 퍼올리듯, 저 허공에서 누군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말과 막걸리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지 않을까. 갑진년에서 을사년, 두 해의 접면에서 네온사인 같은 네 글자들을 골라 이 시대의 풍속을 점묘해 본다. #맞절하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후 마지막 사고 브리핑에서 유가족협의회 대표가 정부 관계자들을 앞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저희 요구에도 욕도 많이 먹고 고생도 많이 하셨다. 정말 감사하다”면서 허리 숙여 인사했고, 이들도 맞절했다. #우두머리. 어떤 일이나 단체에서 으뜸인 사람이다. 한밤중의 느닷없는 계엄과 함께 뛰쳐나온 단어. 평생 서너 번 만날 말을 지금 포식하고 있다. 세 글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네 글자를 획책한 우둔한 머리. #장난인가. 계엄 포고령은 국회해산권이 존재했던 군사정권 때의 예문을 잘못 베낀 것이라 했다. 아무래도 계엄을 장난으로 치부하려는 원모심려. 부끄럽다. #폭풍전야. #은박담요. 서울에 눈이 내려 은박담요를 두르고 도로에서 밤을 새운 시민들 위로 수북이 쌓였다. 아, 등신불 같은 눈사람들. #하얀 헬멧. 백골단이라 불리는 단체가 하얀 헬멧을 쓰고 국회에 등장했다. 이를 주선한 이에게 “분변도 못 가리느냐”는 질타가 쏟아졌다. 국회의원씩이나 하는 그도 ‘분변’의 의미는 알겠지. #아수라장. 7시간 체포 작전에 아수라장이 된 ‘한남산성’, 관저의 주인이 떠나자 집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혼자 남은 안주인의 운명은 이제 어디로 가나. #자승자박. 현직 대통령이 구속되었다. 체포 저지, 혐의 부인, 조사 거부 등 본인이 초래한 자승자박의 결과였다. #존경하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수사 외압 사건. 피고인의 어머니가 탄원서를 제출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자식들을 볼 때 객관적으로 봅니다. 박정훈 대령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 교육을 잘 지켜왔기에 항상 속으로 존경했습니다.” 자식에게 말을 높이는 경우는 더러 보아도 어머니의 저 마음은 처음이었다. 법정은 아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0010. 어느 수인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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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어느 색다른 호외에 대하여 호외(號外)란 일간지가 매일 발행하는 정규 호수 외에 따로 발행하는 책받침 같은 신문을 말한다. 그 어떤 돌발 사태가 터졌을 때, 이를 급히 전하기 위해 만든다. 주로 계엄이나 긴급조치 등 정치적인 격변이 많았던 시기에 호외가 뿌려지곤 했다. 가장 최근에 접한 건 경향신문의 “시민이 이겼다. ‘내란 주범’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 동아일보의 “尹 대통령 탄핵, 직무정지” 등이었다. 이건 신문사가 제작하는 것이고 내 스스로 달력에서 하루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호외가 있다. 개인적 역량이 미천해 직접 호외를 만들진 못하고 그날치 주요 신문들을 모아 호외처럼 간직하는 것이다. 그간 나는 딱 두 번 나의 호외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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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헌법과 憲法 속의 눈을 생각한다 헌법(憲法). 요즘 가장 또렷해진 단어는 단연 헌법일 것이다. 한밤중, 느닷없는 계엄 선포라니! 두부 같은 머리, 그 머릿속 실핏줄이 거미줄이 아니라면 어디 감히 꿈조차 꿀 일인가. 저 위헌적 발상에 놀라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젠 헌법에 적힌 대로 따박따박 응징할 차례다. 독 안에 든 쥐의 말로는 외길뿐임을 역사는 증명한다. 이참에 헌법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본다. ‘憲’자는 宀(집 면)과 丰(예쁠 봉), 目(눈 목), 心(마음 심)이 결합한 모습이다. 일견 해롭다는 뜻의 해(害)와 얄궂게도 비슷해 보인다. 이는 해로운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밝은 눈과 마음으로 감시하라는 것. ‘法’자는 水(물 수)와 去(갈 거)가 결합한 것으로 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자 모두가 공감해야 하는 당연한 이치를 뜻하는 것(이상 네이버 옥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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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혼신의 글쓰기, ‘김윤식 전시회’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밋밋하게 끝나지 않고 뿔처럼 하루가 더 있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12월31일. 복면한 괴한인 듯 아라비아 숫자 즐비한 달력에서 지난 1년을 휘감으며 등대처럼 밝힌다. 그냥 하루, 여느 날처럼 지나치기엔 내 간이 너무 작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건 비장한 일이다. 기괴하고 희한한 일들이 마구마구 범람해서 정신을 모으기가 몹시 힘들다. 해가 뜨고 다시 달이 뒤쫓아 오기까지,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의 보자기에서 이 마지막 날은 목석같은 나에게도 좀 특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으로 다시 못 볼 갑진년을 마무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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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남태령 대첩과 줄탁동기 식물탐사대 송년 산행, 사당역에서 관음사 지나 관악산 오르는 길. 날씨가 칼칼하게 추웠다. 629m 정상에 올라 멀리 여의도 쪽을 바라봤다. 오늘은 탄핵소추안이 결판나는 날. 사람들의 근심을 연결하며 바람은 불고, 세상 부조리를 씻는 듯 한강은 흐르고 있었다. 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와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과천에 오면 두 분의 옛어른이 생각난다. 추사 김정희와 동학의 최제우. 개벽의 기치를 내세웠으나 혹세무민의 난적으로 몰린 최제우는 경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거의 초주검의 상태로 과천에 이르러 대기하다가 남태령을 넘으려는데, 갑자기 철종이 죽어 국장 기간이라 다시 경상감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대구의 관덕정에서 처형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제우가 과천을 떠난 날은 1863년 12월26일경이다. 겨우 몸이나 가렸을 홑옷의 허술한 행색에 날씨마저 그 얼마나 혹독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