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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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어떤 잠자리에 대한 명상 잠자리는 몹시도 제 머리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수평선보다 더 넓은 각도로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뒤룩뒤룩 눈알을 굴리며. 물로 세수하는 것보다 더 엄청 꼼꼼히, 허공에서 마른손으로 연신 얼굴을 닦았다. 어떻게 하면 저리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허공의 한 틈을 노리는 것 같다. 근처의 새들 또한 공중으로 투신하지만 모두 제 그림자 안으로 도로 내려올 뿐이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 계절에 유행가 부르기 산은 생각의 학교이자 고질(痼疾)을 고치는 병원이다. 한편으론 색다른 노래방이기도 하다. 술기운을 다독이며 ‘앗싸’ 기기에 네 자리 숫자를 눌러 유행가 하나 고르듯 호젓한 산길 걷다가 바람, 기온, 기분, 날씨의 네 박자에 맞춰 노래 하나를 호출한다. 어느덧 목덜미가 시큰하고 소매가 긴 옷이 그리운 계절에는 이런 노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횡단, 횡단하는 나날들 매년 10월25일은 독도의날이다. 법정기념일은 아니지만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루다. 대륙에서 홀로 떨어져 동해를 업고 위대한 높이로 솟아올라 먼발치에 일본 열도를 던져둔 독도. 이제 일본은 이런 기본적 사실을 고맙게 여기고 허튼소리 말아야 한다. 내가 만든 책을 소개하는 셈이라 퍽 조심스럽지만 작년 광복절 즈음 이 코너에 “1901년부터 2021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120년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듯 조감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충분히 고통스러운 개화-식민-독립-독재-민주-선진의 굽이굽이를 나름의 시선으로 요령 있게 요약한 다큐멘터리 북. 지난달에 완성해 <횡단 한국사>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우리를 웃고 울린 역사는 깨알 같은 사건이 종횡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책에도 독도의 안녕을 기원하고 의미를 묻는 내용이 명토 박혀있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우리에게는 먼 산이 있다 손바닥은 별들의 전쟁터다. 삼성, 갤럭시, 구글, 클라우드 등등 이 바닥의 작명은 하늘에 빚진 게 많다. 휴대전화를 통해 바깥을 보니 갈수록 점점 더 별 볼 일 없어지는 세상이다. 급기야 그제는 좀 색다른 산이 등장했다. 유튜브가 한때 장애를 일으켜 영상이 재생되지 않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지하철에서 유튜브가 안 돼 먼 산만 바라본다”는 사태가 속출했다는 뉴스. 그렇다고 이런 먼 산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뱀과 거울 뱀은 길다. 나에게도 꼬리가 있다. 나이 들수록 차마 코끝이 늘어나지는 못하고 그 꼬리가 자꾸 길어진다. 꼬리는 내가 만드는 업보일까. 그 매서운 줄이 발등을 때리는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있는 줄도 몰랐던 꼬리. 점점 윤곽이 갖춰지는 꼬리. 이제는 희미하게 만져지는 꼬리. 나도 모르게 물컹, 밟을 것 같은 꼬리. 그게 무섭기도 해서 산으로 간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치읓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ㅊ. 한글 자모의 열 번째 글자. 치읓이라 이르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혓바닥을 경구개에 대어 날숨을 막았다가 터뜨릴 때 마찰이 동반되며 거세게 나는 소리다. 치읓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추위를 만드는 닿소리. 치읓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출렁이는 마음이 어떻게 세상에 닻을 내렸겠나. 치카치카, 아침마다 칫솔질해서 말과 밥이 범한 거친 입을 개운하게 청소하겠나. 저만치 피어 있는 진달래 곁을 떠나 초록의 물결 걷히자 들이치는 인생의 친척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나무에게 배우는 맹자 한 대목 천하 사물은 그 모양대로의 웅덩이다. 풍경의 요소들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고유한 구멍이었다. 햇빛이 그 웅덩이를 차곡차곡 채워야 사물은 그 사물로 드러난다. 나무 한 그루에는 그 부피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든다. 빠르고 일정한 속도의 빛은 이 웅덩이를 동시에 가득 채운 뒤 다음 국면으로 나아간다. 자연이 명확한 둘레로 빈틈없이 구성되는 건 그 덕분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이런 사실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거창군수님께 드리는 간청 고향은 저물 무렵이 특히 좋다. 오늘은 벌초하는 날. 풀 냄새 흥건한 산소 앞에서 절하다가 저무는 저녁을 맞이했다. 언제나 고향은 상냥하고 포근한데, 내 마음 왜 이리 무거워질까.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의 무게중심인 거창. 내 고향은 그중에서도 주상면 내오리 오무마을. 무주구천동 지나 백두대간의 한 자락인 덕유산 빼재에서 남으로 뻗은 수려한 경치 속에 있다. 전라에서 경상으로 넘어가는 곳. 그 가운데 알싸한 문명이 있으니, 하늘로 가는 높은 사다리라는 고제(高梯)다. 다시 내리닫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퇴계가 극찬한 수승대, 왼편은 거창읍으로 연결된다. 완대초등학교 터, 내오리 지석묘를 따끔따끔 지나니 바로 고반재(考槃齋)다. 아, 고향에 가까워지는데 왜 내 마음 점점 어두워질까.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어쩔 수가 없다 비는 가볍게 내려 무겁게 떨어진다. 집 벗어나니 해방된 감각인가. 낯선 곳에 가면 빗소리도 더 잘 들린다. 반복되는 일상의 보자기를 벗어던진 덕분일까. 그곳이 바닷가라면 빗방울도 더욱 굵어진다. 모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깨어나 바깥을 보았다. 산에 가려고 동해시에 왔는데 난감한 상황으로 머릿속이 아연 축축해졌다. 몇해 전, 제주에 꽃산행 갔다가 비슷한 상황에서 번개 같은 꾀 하나를 장만해 두었더랬다. 타박타박 떨어지는 저 빗소리, 하늘에서 누가 글 읽는 소리! 주룩주룩 빗줄기를 옛글로 환기한 이후 이런 혼자만의 ‘우쭐’에 빠졌다. 어쨌든 하루는 비가 오거나 비가 안 오거나 둘 중의 하나이니 시시때때로 공부하는 셈이 아닌가.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물방울 하나 관찰하기 비 그친 뒤 숲에는 돌연 적막. 이윽고 공중이 비의 발을 모두 거두자 잎사귀마다 물방울 하나 만들려는 안간힘이 빗발친다. 아무래도 널찍한 활엽수보다 새침한 침엽수가 물방울 만들기에는 유리한 구조다. 그냥 덧없이 증발되기보다는 한 방울이라도 되어 뿌리 근처로 뛰어내리려는 빗방울들의 갸륵한 노력. 그 물방울 떨어져 들꽃이 먹는 이슬이 되고, 그런 광경을 보고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런 시를 남겼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떠도는 먼지에서 몸을 읽고 뒹구는 모래에서 세계를 찾는 것은 실로 대단한 통찰이다. 거미줄처럼 가는 줄기에 얹힌 들꽃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다니!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사하는 날, 장롱과의 작별 모처럼 늦잠 자고 일어나 베란다에서 바깥을 보니 공중을 들락날락거리는 보따리의 행렬이다. 좋은 구경거리라서 잠깐 아래를 보니 사다리차 근처 올망졸망한 짐들 사이로 건장한 체격의 장롱이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어둑한 곳에서 조금 억울한 일상만 지내다가 모처럼 햇빛 활짝 쬐며 고향 쪽도 실컷 쳐다보는 장롱. 다들 고만고만한 세간살이 중에서도 유독 장롱에 마음이 가는 건 오래전 이런 시를 읽은 덕분이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호주머니 속의 송곳에 대하여 생김새는 물론 한번 이름을 들으면 쉬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송곳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일상에서 접하기 퍽 힘든 사물이지만 이런 말은 일찍이 들었다. 가령, 송곳 하나 꽂을 데가 없을 만큼 해운대에 구름 인파로 붐볐다는 표현. 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상징은 벌이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말은 그때부터 머리에 꽉 박힌 경구다. 일생을 통틀어 하고 싶은 일 하나는 분명히 가지자는 말은 이웃사촌이다. 어쩌면 우리가 산다는 건 그것에 바쳐져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망외의 그 어떤 성취를 이루더라도 그게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