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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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오늘도 현관을 나서면서 선입선출. 먼저 들어온 것이 먼저 나간다. 냉장고의 운영도 그렇고 집안 경영도 마찬가지다. 먼저 오신 분들 모두 먼저 떠나셨다. 봄 끝 물고 외계인처럼 나타나 여름 내내 찰거머리같이 붙어 있던 더위도 어느덧 나갈 채비를 한다. 창문으로 왔다가 입추 지나자 현관으로 나간다. 세상과 접촉하는 관문인 현관. 현관은 한자로 ‘玄關’이다. 왜 검을 玄인가. 세상과의 접촉면이 캄캄해서 검을 현? 현관만큼 궁리가 많이 고이는 곳도 드물다. 하루를 떠돈 식구들의 신발이 돛단배처럼 정박해 있는 곳. 현관에서 직각으로 몸을 돌리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진실이 있다. 신발장 속 그야말로 생생한 내 이력의 흔적들. 등산화가 또 어디로 떠나자며 슬피 우는 소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 더운 여름날의 칠레 모처럼 꿈을 꾸었다. 시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고 있는데 다리가 점점 길어지더니 아연 솔기 터지듯 발끝부터 흐물흐물 물에 녹지 않겠는가. 피는 나는데 아프지는 않았다. 덜컥 겁이 나서 얼른 일어나 죽어라 밭 가운데 전봇대를 향해 뛰어갔다. 전깃줄에 누가 앉아 있었다. 더위 탓인가. 깨고 보니 목 주위가 땀으로 척척했다. 자동차가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속도를 경험하랴. 무슨 수로 세상의 옆구리에서 다른 세계를 빼낼 수 있으랴.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조인성의 눈자위와 몇개의 눈동자 봉준호 감독이 <호프>에서 배우 조인성의 연기를 언급했다. 봉 감독은 “조인성이 숲에 누워 있는 장면을 위에서 촬영했는데, 눈 흰자위를 CG로 처리한 건지 궁금하다”며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호평했다는 것. 눈동자의 흰자위는 그야말로 좁고 작은 반달 같은 여백이 아닌가. 영화 초반 황정민은 총을 쏘려다 말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러 온) 외계인의 눈물을 본 뒤 한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아쇠를 차마 당기지 못한다. 지구인과 외계인이 눈동자의 여백으로 서로 연민하며 ET처럼 연대라도 하려는 것인가.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사는 동안 달을 자주 우러러볼 것 며칠 전 작정하고 밤하늘에서 달을 찾았다.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딘 1969년 7월20일. 인간의 몸이 나사처럼 지구와 달을 연결한 날이었다. 거대하게 회전하는 중력 법칙에 따라 그날은 올해도 어김없이 또 왔다. 국어사전은 “지구의 위성.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 밝은 빛을 낸다. (…) 공전 주기는 27.32일, 반지름은 1738㎞이다”라고 풀이하지만 달을 그 말에 다 가둘 수는 없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경 공부 이열치열. 속리산에 올랐다.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도불원인 인원도 산비리속 속리산)’이라고 할 때의 그 속리산이다. 정상이 문장대라고 하기에 文章으로 짐작했더니 文藏이었다. 세조도 이곳에 올라 신하들과 강론하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세속 도시에서는 폭염경보가 요란한데, 이속의 산은 의외로 시원하다. 잎자루가 잘록한 잎은 부채 같아서 그늘도 베풀고 바람도 준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월드컵, 축구공, 소금, 메밀꽃 필 무렵 월드컵의 시간이다. 축구공 하나가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묶는다. 아침 식탁에서 머리 맞댄 접시를 보다가 지구촌에 대해 떠오른 생각 하나. 맹물과 짠물은 그 분리가 절묘하다. 누가 소금을 풀어놓아 그 결정을 녹이느라 바다는 오늘도 바쁘다. 파도는 해야 할 숙제가 있어 육지를 다 덮치지 못하고 도로 돌아간다. 뭍의 외곽인 바다에 소금이 없어 민물처럼 밍밍했더라면 이 세상의 부패를 지구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돼지새끼라면 팔고 다시 사고 싶은 것들 밥 먹다가 아래 기사를 읽었다. 그대로 인용한다. “‘판사님이 고민하신 결과가 이겁니까? 변호사가 고의로 소송을 말아먹었는데,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런 결론 내리는 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이 나라 법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 방청석 맨 앞줄에서 선고공판을 지켜보던 이기철씨가 ‘학교폭력 소송은 2022년 모두 종료됐다’는 주문을 낭독한 판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판부는 굳은 얼굴로 항의하는 이씨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경향신문 6월25일 보도)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 세상의 모든 저녁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소장 현진오)의 시코쿠 꽃산행 말석에 끼었다. 마키노 식물원에서 한국에 매우 드물게 자생하는 만년콩의 활짝 개화도 관찰했다. 일본의 100대 명산인 쓰루기산( 1955m)을 다녀오는 길.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종인 기생꽃이 고원지대에 소박하게 피어 있다. 섬이라서 발버둥 치듯 산은 더욱 높이 솟았나. 쓰루기산은 조릿대가 산허리부터 정상까지를 점령해 다른 식물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보기엔 호쾌하겠으나, 저 아래 햇빛 한 줌 구하지 못해 질식하는 야생화들의 처지가 눈에 밟혔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처럼 빳빳한 산의 능선을 바위가 누르는 게 한눈에 보인다. 호치키스가 서류를 박듯, 띄엄띄엄 포진한 바위들. 저 돌이 아니었다면 산은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비탈을 주체하지 못해 아래로 주저앉지 않았을까. 바위들이 산을 지그시 눌러 저 키를 유지하고 그 높이에서 세상의 깊이가 유래하는 것 같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지구가 둥글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지구는 둥글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하루를 저녁으로 마감하고 밤으로의 긴 여행을 떠날 수 있겠나. 세상이 어질러놓은 오늘치의 얼굴을 어둠으로 씻고, 두터운 잠에 취해 꿈의 위로를 받을 수 있겠나. 도착하지 않을 외딴 새벽에 희망을 걸 수 있겠나. 지구가 둥글지 않다면 밤낮이 따로 없어 그날이 또 그날. 시간이 제때 흐를 수 있겠나. 태산이 높다 해도 하늘 아래 뫼이듯 아무리 세상이 넓어도 끝나는 곳은 있다. 천하가 편평하다면 언젠가 그 벼랑에서 벼락같이 떨어져야 한다. 어디로 떨어지려나?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6월의 낱말들 #공장=햇빛, 이산화탄소, 물을 반죽하여 광합성하는 나무 앞에 하나 더 있다. 시선의 길이를 조절할 수 없어 볼 수 없는 운명의 공장. #바위=깔딱고개 끝에 엉거주춤 앉아 있다가, 그래도 나를 보고 승천하겠다는 듯, 어서 오시게, 아우, 눈 뜨며 손 내미는 바위를 만나면 어떻게 응대하죠? #반지름=여기에서 저기까지가 지름일 리가 없다. 저기 저 너머로 그만큼의 반지름이 최소한 더 있다. 그림자를 반납해야 보여주는 그 나머지 반지름. #그림자=언젠가 필요하면 따고 들어오너라. 내 발목에 채워주신 열쇠.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부처님오신날에 생각해보는 공(空) 있어 보이는 생각 중에 유무(有無)에 관한 것도 있지만 ‘공(空)이란 무엇인가’도 있다. 최근 어느 일본 영화에서 청년의 팔뚝에 새겨진 ‘空卽是色’(공즉시색)이란 문신을 보다가, 영화가 스크린에 현출된 빛의 집합이듯, 저 살도 실은 다 텅 빈 것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간 내 가공할 소신은 ‘빌 空’에 압도적으로 집착해서 공이란 그저 내 육안으로 못 볼 뿐 핵과 전자 사이가 텅 비어 있는 원자 구조처럼, 모든 물질이란 텅 빈 것이라고 여기는 정도였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삼척 덕항산에서 외출하기 삼척의 덕항산은 한자로 德項山. 덕을 포함하기에 좀 넉넉할 줄로 알았는데, 항우(項羽)처럼 힘이 불끈 솟아나는 산이었다. 그러니 등산객에겐 그만큼 아찔, 짜릿한 산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품 있는 노랑무늬붓꽃을 따라 덕항산 정상에 도착하니 구부시령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길목에는 이런 무심한 등산 리본. “그냥 다녀갑니다. 遷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