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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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벚나무 아래 야단법석 요즘 벚나무 아래는 이런저런 공부하기 좋은 교실이다. 우선 문학에 대한 것. 꽃잎이 어디 세 번만 낙하하랴. 가지에서 떨어지고, 공중에서 흩날리고, 마음에 앉았다가 바닥에서 미끄러져 종내에는 아래로 녹아 들어간다. 지금 조경석 위에 앉아 돌에 바깥 구경시켜 주는 꽃잎들. 물과 불의 거대한 순환에서 벗어나 잠시 쉬는 중인가. 이 사태를 알맞게 번역하는 한 구절을 발굴하여 낙엽과 꽃잎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무에 대한 명상 꽃샘추위를 꼬리에 단 겨울이 계절의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겨울은 무를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무가 없었더라면 저 매서운 혹한을 어찌 건너왔을꼬. 내 고향에서는 무를 ‘무시’라 했다. ‘무수’라고 한 동네도 있단다. 철들도록 무우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표준말은 무라며 허벅지만 한 게 미끈하게 나에게 왔다. 그렇다고 무우를 꼬박꼬박 무라고 대접하진 않았다. 장미를 다른 말로 부른다고 장미의 향이 없어지지 않듯 무를 무우, 무수, 무시라 한다고 그 상냥한 맛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외려 정말 맛있는 무를 만나면 무시라고 해야 그 맛이 그 말에 꽉 감긴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내 눈빛의 이중허리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역도 선수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본 적이 있다. 탄마가루 대신 분필가루 휘날리며 교수님으로 변신한 장미란 선수. 용상에서 바벨을 어깨까지 올린 뒤 허리 반동으로 번쩍 들고 포효하는 장면은 길이 기억에 남는다. 그가 덜어낸 무게만큼 세상은 가벼워졌던가. 지난날의 저 무거움을 누구보다 잘 다룬 고수답게 풍선처럼 풀어놓는 이야기. 말은 얼마나 가벼운가. 또한 말은 얼마나 무거운가. 그때의 고독을 이제는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얼굴에 해맑은 표정이 철철 흘러넘쳤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 봄날의 햇빛 한 조각 요즈음 등산 가서 저물 무렵 내려올 때, 당단풍나무 잎사귀들을 본다. 가지에서 그대로 낙엽처럼 말라비틀어진 잎은 귀여운 포클레인 같기도 한데, 지난겨울을 통과하는 동안 부족한 햇빛을 끌어모으려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이다. 햇빛은 어쩌면 이렇게도 생겼을까. 나중에 나의 몸도 닳아져서 저 따뜻한 방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직은 어느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물끄러미 지켜볼 수밖에 없겠다.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 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 해지면서 나가 버린다.”(이상의 <날개>)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BTS 리턴즈, ‘아리랑’을 기대하며 노래는 울렁거리는 말이다. 춤은 출렁거리는 몸이다. 가수는 노래와 춤을 동시에 퍼포먼스한다. 뭍에서도 바다인 듯 멀미가 난다. 노 젓듯 팔 흔들며 걷는 사람들. 단단한 육지도 늪인 듯 일어나는 현기증. 가수는 물 위를 걷듯 삶에 들린 인물이다. 모두들 세상에서 구경꾼처럼 엉거주춤할 때, 가수는 무대에서 세상을 본다. 몸으로도 본다. 세계와 정확히 몸으로 부딪히며 몸짓으로 휘젓는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한 불안한 시각 오래전 어느 신문의 청탁으로 <총균쇠>의 독후감을 실은 적이 있다. 짤막한 그 글의 서두는 이랬다. “아메리카는 아메리카이고, 유럽은 유럽이다. 말하고 보니 그저 지도처럼 조용하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인이, 아시아에는 아시아인이 산다고 해본다. 한 글자를 추가했을 뿐인데 삶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발밑이 떠들썩해진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묘한 함수인가. 그리고 그 인간이란 함(函)에 들어갔다 나오면 세계는 얼마나 난해한 방정식으로 변하는가.”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서라벌 계곡의 봄꽃 옆에서 경주 아니 서라벌은 이름만으로도 현묘하다. 저물 무렵 기차에서 내리니 역광장의 무덤이 나를 쳐다본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경주 방내리고분군 1호 돌방무덤’. 부산에서 온 꽃동무들과 만나 시간이 남아 김유신 묘에 들렀다가 숙소로 가기로 했다. 소슬한 입구에 ‘화랑도와 세속오계’ 안내판이 있다. 신라 진평왕 때의 원광법사는 수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가슬갑사’라는 절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젊은이가 찾아왔다. “법사님,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법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들은 척도 아니하고 냇가에서 발만 씻던 원광법사가 한마디한다. “그냥 바르게 살면 되지 방법이 따로 있는가?”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스피노자, 두보, 기차의 꿈 가끔 밥상을 지나 하늘로도 눈길을 던져야 한다. 절박한 공부를 할 때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피할 수 없는 문헌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벽돌처럼 벼려서 기하학적 질서로 배치한 책. 막상 펼치면 겨우 발목에 찰랑대는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난공불락이다. 그래도 관련 강의도 챙겨보고 해설서를 들추며 <에티카>의 세계를 기웃거린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렘브란트의 ‘아틀리에의 화가’ 앞에서 설날도 어릴 적 명절이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손녀의 지저귀는 목소리로 떠들썩하던 거실이 아연 적막해졌다. 공허만 세배객처럼 더 뚜렷해졌다. 모두 떠난 늦은 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입술에 항시 얹어놓는 소월의 시 한 구절을 중얼거리다가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라는 미술 강의를 보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배출한 화가의 일생을 작품과 엮어서 풀어내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이웃에 살았다는, 내 좋아하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이력도 떠올리자 더욱 흥미로워졌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천년 뒤에 남길 문장 바로 발끈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쉽다. 어떤 일을 살필 때 객관적 거리가 있어야 정확해진다. 법이야 내 잘 모르는 동네. 그러나 거기에도 전혀 다른 문법이 적용되는 건 아닐 터이다. 논문이든 판결문이든 다 문장으로 말하는 것 아닌가. 법적인 논리야 전문가들이 묻고 따지더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희대의 명언이 있듯, 전관예우란 비법적이고 몰지각한 관행이 있듯, 그건 또 그렇게 돌아가는 모양이더라.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AI 시대, 단발령 시절을 생각한다 아리송한 정답 앞에서 구르던 옛 버릇이 남아 볼펜은 떨어지는가. 혼자 있겠다며 구석으로 달아나는 저 물체. 줍고 일어서다가 책상 밑에 머리를 찧기도 한다. 짜증 난다고 말 없는 무정물을 쥐어박는 건 부질없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나이가 가르쳐준 바이기도 하다. 말 않는 사물하고 싸우지 말자. 올해 들어 부쩍 인공지능(AI) 관련 소식이 요란하다. 특집 방송마다 AI가 도래할 세계를 그린다. 그간 개인마다 선택의 문제라고 여기며 오염이라도 되는 듯 피해왔는데, 이건 150년 전의 쇄국정책을 답습할 뿐이겠다. 피지컬 AI, 보편적 고소득, 몰트북 등 낯선 용어들이 이미 공기처럼 공중을 장악했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처단한다’를 ‘처한다’로 돌려주기까지 황당한 계엄이 벌어진 게 벌써 재작년의 일이다. 계엄은 영어로 ‘martial law’다. 별 긴장감 없는 10개의 철자다. 戒嚴, 한문으로 쓰면 의미 이전의 불길함이 문자에서 훅 뛰쳐나온다. 가시, 철조망, 바리케이드 등등의 삐쭉뾰족한 느낌. 그날 막 잠자리에 드는 시각, 박물관에 박제되었던 저 계엄이 현실로 방송에서 선포되고 국회가 침탈되고 포고령이 발령되었다. 아닌 밤의 홍두깨처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이상 실제적인 위력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이날 사람들이 더욱 기함한 건 포고문의 ‘처단한다’는 단어였다. 어느 시대인데 주권자를 상대로 ‘처단’을 입에 올리는가. “결단을 내려 처치하거나 처분함”이라는 사전의 풀이는 차라리 점잖다. 당장 단두대가 떠오르는 살벌한 표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