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농협은 어떻게 하나로마트의 간판을 내걸 수 있겠나. 나는 어디에서 질 좋은 삼겹살을 한 근 끊을 수 있겠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디서 후룩후룩 해장국으로 하루의 허기를 달랠 수 있겠나. 해는 서해에서 찌든 때를 씻고 다시 맑은 얼굴로 동해를 비춘다. 히읗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하루를 호출할 수 있겠나.
나이 들어 헛헛해질수록 가까이해야 하는 건 국어사전이다. 그림자가 반듯해야 그 모양이 단정하듯 적확한 말이라야 정확한 뜻이 가능하다. 초등학교 땐 전과를 보고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사전에 제법 손때를 묻혔다. 철저히 외면했던 국어사전. 그러다가 문득 졸업할 때 상품으로 받은 국어사전을 찾았다. 한구석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사전한테 엄청 미안했었다.
저 사전의 마지막을 묵묵히 담당하는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e’가 없는 단어로만 쓴 소설도 있다. 비교할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헌법 전문도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326글자, 93단어의 헌법 전문에는 히읗이 들어간 글자가 무려 35단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하는 총강의 첫 문장에도 어김없이 빛나는 히읗의 활약.
희붐한 새벽을 호흡하며 농부는 흙을 밟고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말에 산소 기포를 공급해 주는 듯한 저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봉준호의 영화, 김혜순과 한강의 문학에 어떻게 세계가 환호할 수 있겠나. 형님처럼 국어사전의 맨 마지막에 히읗이 있어 얼마나 훈훈한가. 내 아들이 나의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 할머니를 히읗이 아니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나.
봄은 묵은 게 아니라 올해 새로 맞춤한 봄이다. 처마 아래 강남 갔다 돌아오지 않는 제비들의 빈집. 그 허전한 구멍 같은 ㅎ, 히읗을 골똘히 바라본다. 하마터면 희한한 나라로 더 굴러떨어지기 직전, 호루라기 소리처럼 찾아온 이 희망을 붙들고 한바탕 웃음으로 한숨을 날려버리는 것. 하하호호흐히후하. 아, 히읗이 없었더라면 정말 어쩔 뻔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