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현아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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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 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2024)을 뒤늦게 봤다. 회식 자리에서 한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웃는 직장 동료에게 그렇게 웃으니까 “게이 같다”고 핀잔을 준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함께 웃지만, 김고은 배우가 연기한 ‘재희’는 그에게 따진다. 게이 같은 게 도대체 뭐냐고, 게이면 어때서 그러느냐고.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농담이니까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녀를 만류한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다그침에 재희는 “그냥 쟤한텐 그게 목숨 같나 보다 하시면 안 돼요?”라고 되받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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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좋아서 하는 마음 봄의 기운을 담뿍 머금은 3월이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문학을 가르치는 나는 어김없이 칠판에 의자 하나를 그린다. 잘 그리지 못해서 가끔 변기같이 보이기도 하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의자’라고 부릅니다. ‘의자’라는 말과 실제 의자는 무슨 관련이 있나요?” 학생들은 일제히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언어와 의미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해요. 혹은 그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뜻에서 언어의 우연성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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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무심한 다정 성격 유형 검사인 MBTI가 유행한 후, 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서운함을 덜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절친한 친구는 내가 “속상해서 염색했어”라고 말하면 “응, 잘했네”라고 답하는 사람이다. 그럴 때면 친구가 우울한 일이 있었다는데 어떻게 궁금해하지도 않을까, 하다못해 염색이 잘됐는지라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의아했다. 친구가 늘 나를 무성의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속상한 일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알아내어 적절한 위로를 건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친하게 지내왔는데 왜 매번 나만 최선을 다하는지, 반대로 친구는 나를 다정히 대해주지 않는지가 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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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붓끝에 따라오는 불과 꽃 1933년 5월, 베를린 광장에서는 반(反)나치적인 도서로 분류된 책들이 불태워진다. 프란츠 카프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의 저서도 이때 태워진다.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미하 울만이 설치한 조형물 ‘도서관’의 안내판에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희곡 <알만조르>의 문장이 쓰여 있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 실로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했다. 서적을 대상으로 한 탄압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일어난다. 당시 책 파기에 동원되었던 한 교사는 당국에서 봉건적, 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한 책들을 재활용하기 위해 낱장을 손수 찢어내야 했고, 2t에 달하는 책이 제지공장 기계에서 휘저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리처드 커트 크라우스, <문화대혁명> 교유서가, 2024, 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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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그들은 자기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2024년 12월3일 밤 갑작스레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어 온 국민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국회를 지켜준 사람들,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선 의인들, 발 빠르게 대처한 국회의원들, 불합리한 명령에 미온한 반응을 보인 군인들 덕분에 계엄은 해제됐다. 밤새 창밖의 헬기 소리를 들으며, 서슴없이 ‘처단’을 운운하는 포고령을 보면서 나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저번 주에 송고한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글은 출간되지 않겠구나, 어쩌면 이전에 썼던 글이 문제가 되어서 변고가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숨죽여 뉴스만 보았다. 용기를 내어 국회로 달려나가준 이들에게 오래도록 죄스러웠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분들께 빚을 졌다며,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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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노벨 문학상 수상의 여파로 한강 작가의 소설에 관해 글을 쓰거나 이야기할 일이 생겼다. 담당할 한 권을 택해야 할 때마다 나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골랐다. 그것이 한강 작가의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때, 우연히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당시의 현장을 촬영한 독일 기자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영상물이다. 왜 사람을 쏘아 죽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총에 맞아 입이 사라진 시신을 봤다. 그날 이후로 며칠을, 풀숲에 숨어 떨다가 공수부대에 발각되어 끌려가는 악몽에 시달렸다. 열 살에 처음 마주한 압도적인 잔혹을 어른이 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오랜 시간 관심을 쏟아온 만큼 그 동력으로 잘 쓸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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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얼어붙지 않는 한강과 한국문학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벅찬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동료 작가들, 문학계 종사자들, 선후배 연구자들, 학생들과 서로 축하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한강 작가님이 이룬 쾌거이지만, 모두가 제 일처럼 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매일매일이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축제 현장 같다. 왜 이제 와서, 뒤늦게 한강 작가의 책을 읽냐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다소 황당한 지적이다. 모든 나라의 작가와 작품을 알 수 없듯이, 한국 독자도 한국의 작가를 모를 수 있다. 구태여 수상작을 궁금해하는 예비 독자들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면 세계 각국의 독자들이 선정된 작가와 그의 작품을 궁금해하면서 따라 읽곤 한다. 미리 알고 읽어두었다면 즐겁고 뿌듯한 일이고, 읽어보지 않았다면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면 될 일이다. 읽어 본 사람과 읽어볼 사람들이 각자의 다채로운 감상을 즐겁게 나누면 그만이다. 한 사람이라도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한강 작가님의 치열하고도 섬세한 문장들을 차곡차곡 읽어 이어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벅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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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기약과 기대 추석 연휴에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다녀왔다. 머무는 지역에서 멀고 일이 많아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반갑고 애틋했다. 모처럼 가족끼리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두 분이 가보지 못했지만 분명 좋아할 만한 곳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흥미로운 과학 전시를 관람했는데 아빠도 직접 보면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될 거라고. 윌밍턴 바다에는 하얗고 동그란 조개껍질들이 많은데 반질반질한 표면을 손끝으로 문지르면 나까지 덩달아 간지러워진다고, 엄마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한참을 떠들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많은 곳에 겪어보지 못한 행복들이 마구마구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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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화내는 여자, 싸우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 묻지마 범죄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화장실을 이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몰카에 찍힐 수도 있으니까. 연애상대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 이별을 고했다가 살해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한다는 사실이 티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페미’로 낙인찍혀 조리돌림당할지도 모르니까. 여성혐오 범죄의 빈도를 과장하는 것 같은가. 최근 한 달로 아주 좁게 범위를 제한해도 지금 조심해야 한다고 열거한 일들의 실제 사례를 기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조심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SNS에 올린 사진이나 증명사진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법 합성물(딥페이크) 성범죄에 악용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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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지연의 미학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녀왔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 광활한 미술관에는 세계 각국의 유물과 예술품이 모여 있는데 그 수만 약 300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로댕의 조각, 이집트 벽화, 고흐와 한국 화가 박수근의 그림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미술관을 관람한 친구가 물었다. “오늘 본 것 중에 어떤 게 가장 예술적이었어?” 나는 평소에도 좋아했던 모네의 루앙 대성당 그림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 아우라에 잠식되었던 순간이 무척이나 황홀했기 때문이다.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의 모습을 그린 연작이지만, 결국엔 빛의 일렁임만 화폭에 남은 것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더 예술적이라 느꼈던 순간을 말하게 되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1초면 찍을 수 있을 조각상 앞에 이젤을 놓고서 불편해 보이는 간이의자에 몸을 욱여넣은 채 조각상을 따라 그리고 있던 화가들.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천천히, 잡히지 않을 예술의 진실 같은 것을 구하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가장 예술적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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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죽음을 업은 삶 지난달에 발간된 시집 <천국어 사전>(타이피스트, 2024)의 추천사를 썼다. 저자인 조성래 시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채로, 시집 파일을 넘겨받았다. 어느 봄날,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종이에 인쇄된 그의 시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고향이기도 한 ‘창원’이 제목인 시가 눈에 띄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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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공간에 머무는 기억 학교 축제에 가수 ‘뉴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들뜬 마음으로 졸업한 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학부를 졸업한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이제는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같은 캠퍼스를 수없이 오간 셈이다. 친구들은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장소에 매여 사는 나를 ‘지박령’이라고 놀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