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아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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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화내는 여자, 싸우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 묻지마 범죄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화장실을 이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몰카에 찍힐 수도 있으니까. 연애상대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 이별을 고했다가 살해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한다는 사실이 티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페미’로 낙인찍혀 조리돌림당할지도 모르니까. 여성혐오 범죄의 빈도를 과장하는 것 같은가. 최근 한 달로 아주 좁게 범위를 제한해도 지금 조심해야 한다고 열거한 일들의 실제 사례를 기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조심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SNS에 올린 사진이나 증명사진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법 합성물(딥페이크) 성범죄에 악용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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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지연의 미학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녀왔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 광활한 미술관에는 세계 각국의 유물과 예술품이 모여 있는데 그 수만 약 300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로댕의 조각, 이집트 벽화, 고흐와 한국 화가 박수근의 그림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미술관을 관람한 친구가 물었다. “오늘 본 것 중에 어떤 게 가장 예술적이었어?” 나는 평소에도 좋아했던 모네의 루앙 대성당 그림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 아우라에 잠식되었던 순간이 무척이나 황홀했기 때문이다.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의 모습을 그린 연작이지만, 결국엔 빛의 일렁임만 화폭에 남은 것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더 예술적이라 느꼈던 순간을 말하게 되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1초면 찍을 수 있을 조각상 앞에 이젤을 놓고서 불편해 보이는 간이의자에 몸을 욱여넣은 채 조각상을 따라 그리고 있던 화가들.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천천히, 잡히지 않을 예술의 진실 같은 것을 구하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가장 예술적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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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죽음을 업은 삶 지난달에 발간된 시집 <천국어 사전>(타이피스트, 2024)의 추천사를 썼다. 저자인 조성래 시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채로, 시집 파일을 넘겨받았다. 어느 봄날,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종이에 인쇄된 그의 시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고향이기도 한 ‘창원’이 제목인 시가 눈에 띄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시에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병원의 구체적인 이름도 등장하는데, 그곳은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병원이었다. 엄마가 종종 내게 들려주었던 환한 이야기의 배경, 거기서 화자의 어머니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울다가 또 잠시 뒤에는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웃어 보인다. 죽어갈 어머니와 그의 예견된 죽음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사람, 축복처럼 불어든 생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을 사람과 나를 낳고 기진한 엄마가 한 공간에 어우러져 있는 듯했다. 슬프고도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그렇게 생각해 버려도 되나 싶어서 죄스러웠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타야 할 지하철 몇 대를 그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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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공간에 머무는 기억 학교 축제에 가수 ‘뉴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들뜬 마음으로 졸업한 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학부를 졸업한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이제는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같은 캠퍼스를 수없이 오간 셈이다. 친구들은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장소에 매여 사는 나를 ‘지박령’이라고 놀리곤 한다.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동기들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머무르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익숙한 교정을 거닐 때 딱히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얇은 반죽이 겹겹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캠퍼스의 공간마다 여러 기억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원래 뭐가 있었더라?” 묻는 친구에게 “계단이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생겼지”라고 큰 감흥 없이 대답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 밤샘 공부하고 컵라면 먹었잖아, 여기가 우리 넷이 처음 후배들 밥 사준 곳이고.” 내가 덤덤히 일러줄 때마다 친구들은 감탄했다. “어떻게 다 기억해?” “나야 뭐,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 건조하게 말했지만, 아마 나는 동기들이 떠난 공간에 남은 기억을 홀로 가꾸고 있었나 보다. 우리가 아는 벤치와 식당, 굴곡진 길과 언덕의 벚나무를 마주할 때마다 추억을 되새기면서 지워지지 않도록 덧칠했던 것 같다. 이 장소에 머무는 기억과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같은 게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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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글쓰기는 포롱포롱 이번주에는 담당하는 교양 강의에 특강 강사로 한 시인을 모셨다. 강의를 시작하며 시인은 한 편의 에세이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누가 쓴 글 같아요?”라고 물었다. 사유도 문장도 아름다운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아는 여러 작가를 떠올렸다. 친하다고 말했던 그 소설가의 글인가? 아니면 수필집을 펴낸 그 시인의 것일까? 학생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글은 코미디언의 글입니다.” 나를 비롯해 강당에 앉은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방송에서 보아왔던 유쾌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진중함에 놀란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들 그 글을 전문 작가가 썼다고 추측했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여러 작품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파블로 피카소가 쓴 시도 함께 보여주었는데, 붓질하듯 시어를 덧칠해 내는 독특한 작법이 생경하고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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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이분되지 않을 자유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지용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설령 그를 잘 모른다 해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향수’의 구절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몇년 전, 정지용의 문학을 주제로 하여 학위논문을 쓰던 때에는 시인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은 다작하였고, 일본어와 한자, 영어로도 글을 썼기에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다수의 작품과 방대한 양의 선행 연구를 읽어내며 문학사적 의미를 유추하는 데 급급했다. 오랜 시간 그를 연구하다 보니, 최근에는 관점이 달라졌다. 글 뒤에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용은 문학이 예술성과 자율성, 정치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염결한 시인임에도, 일제강점기에는 검열과 탄압을 견뎌야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소위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광복을 맞이하여 이제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뻐하던 그가 해방 이후에도 사상 검열에 시달리며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과 멀어져야만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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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존재와 부재의 증명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로기완>(2024)은 살기 위해 벨기에로 밀입국한 탈북인 ‘기완’의 삶을 들여다보는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각색한 영화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으로의 성급한 귀결은 배우들의 호연으로도 잘 봉합되지 않는 듯해 아쉬웠지만, 기완이 낯선 땅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생의 굵직한 사건들을 진술한다. 이때 어머니의 시신을 병원에 넘기고 돈을 마련했던 비극적인 사연까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해당 병원이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를 한 적 없다고 발뺌하자 기완은 궁지에 몰린다. 설상가상 증인으로 나서주겠다던 공장 동료 선주는 그를 배신하고 로기완이 정치적 망명이 인정되는 북한 사람 행세를 하여 난민 지위를 획득하려는 조선족이라고 거짓 진술한다. 기완은 난민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이를 입증하지 못해 고초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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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솔직히 말해서 동료 작가의 첫 책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나는 그에게 책이 참 좋았다고 거듭 말했다. 고마워하던 그는 “진짜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게 더 도움이 돼요. 책 어땠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약간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얻고자 하나보다 싶어, 비판할 요소들을 궁리하다가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말해주었다. ‘서문의 첫 구절은 구조가 복잡해 쉬이 읽히진 않았다’, ‘결말부에 반복되는 단어는 어감이 썩 좋지 않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그는 흡족한 표정이 되어 고민할 거리를 제공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도 웃어넘기고, 자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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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마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2023년에는 일이 몰려 바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므로 마음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을 참는다는 말은 참 이상하다. 마음을 다잡아 무언가 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꼭 잡아 가두어 무엇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작년에 참았던 마음들을 열거해 보자면 이러하다. 아끼는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 계절의 지나감을 살피는 마음, 걷다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람이 나를 지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며 미소를 데우는 마음, 세상의 모서리에 애정 어린 눈길을 퐁당 던지는 마음, 그 파동으로 나 또한 물결치게 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모두 잘 참고 아껴야 했다. 내야 하는 논문을 제시간에 냈고, 써야 하는 원고를 제시간에 마감했다. 제출해야 할 서류를 미루지 않았고, 성적 마감 시간을 준수했다. 나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할 일을 모두 해냈으니 후련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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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무력(武力)에 맞설 무력(無力) 정전 70주년을 맞아 경기문화재단이 개최한 2023년 DMZ 평화문학축전에 참석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와의 대화’ 사회를 봤다. 그 일을 의뢰받고 나는 좀 들떠 있었다. 참전했던 200여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눌 수 있다니 꿈같은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건넬 질문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무력해지고 말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책 <아연 소년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이야기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 또다시 ‘삶의 철학’ 대신 ‘사라짐의 철학’ 안에서 사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전쟁의 참상과 이를 증언하는 비통한 목소리 속에 머무르며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작가에게, 다시금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며 전쟁에 관해 물어야 했다. 그가 전쟁에 관해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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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 요즘엔 ‘무해하다’라는 말이 찬사로 쓰인다. 갈등과 대립이 넘쳐나는 사회에 피로감을 느낀 탓일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함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진다. 서사 장르도 예외는 아니다. 무해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잔잔하고 평온한 이야기들이 유행한다. 하지만 무해한 서사가 각광받는 이 흐름이 달갑지만은 않다. 약자에 대한 폭력을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작품에 그대로 담아내던 ‘비윤리적인 재현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 반향으로 이러한 경향성이 생겨났음을 이해하고 긍정한다. 그러나 무해함을 요구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 맞춰 고통당하는 이들의 비명을 말끔히 도려낸 고요한 진공 공간만을 전시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는 점은 문제다. 누구도 해치지 않지만, 반대로 해를 입을 일 또한 없는, 타인의 고통을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는 ‘선인(善人)’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해 서사로 상찬받을 때면, 탄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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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평론하는 마음 어느 젊은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쓰고 있다. 시집이나 소설집 말미에 실려 해당 책의 방향성을 소개해주고 책에 묶인 각각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주는 짤막한 글을 본 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종류의 글을 해설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문학평론가들이 쓴다. 작품론이나 리뷰, 주제가 있는 평론을 쓰는 일보다 해설을 쓰는 일이 언제나 더 어렵게 느껴진다. 여러 저자의 글이 한 권의 책에 함께 묶이는 여타의 글과 달리, 해설은 한 권의 책에 딱 한 편만 실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해설을 잘 쓰지 못하면, 한 작가의 책을 망치게 되리라는 부담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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