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지용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 설령 그를 잘 모른다 해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향수’의 구절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몇년 전, 정지용의 문학을 주제로 하여 학위논문을 쓰던 때에는 시인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은 다작하였고, 일본어와 한자, 영어로도 글을 썼기에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다수의 작품과 방대한 양의 선행 연구를 읽어내며 문학사적 의미를 유추하는 데 급급했다.
오랜 시간 그를 연구하다 보니, 최근에는 관점이 달라졌다. 글 뒤에 살아 숨 쉬는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용은 문학이 예술성과 자율성, 정치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던 염결한 시인임에도, 일제강점기에는 검열과 탄압을 견뎌야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소위 ‘빨갱이’로 몰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광복을 맞이하여 이제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뻐하던 그가 해방 이후에도 사상 검열에 시달리며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과 멀어져야만 했다는 점이다.
해방기 정지용은 외세 개입을 차단하고 통일된 민족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으며, 일본에 부역했던 반민족행위자를 강력히 처벌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다. 그는 정치 현실에 적극 개입하되 특정 이념에 휩쓸리지 않으며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애썼다. 당시 그의 행보를 좌익 또는 우익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데 연구자들은 의견을 모은다. 그럼에도 1949년, 정지용은 월북했다는 루머에 휩싸여 동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다. 6·25 전쟁 이후 정지용이 실종되자 월북 작가로 오인된 그의 작품은 1988년 해금 전까지 출판 금지된다. 북한에선 반대로, 1990년대 복권 전까지, 정지용을 ‘부르주아 반동작가’로 비판해 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정지용이 자신이 교육과 문학에 힘써온 한 명의 시민일 뿐임을 호소할 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어 선전 및 선동에 동원될 때, 그가 느꼈을 설움과 무력감이 온전히 전해져 안타까웠다.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논하는 일을 우선시했던 내가 이젠 글 뒤에 쓸쓸히 선 한 사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은 연구자가 된 것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작가로서 양심을 지키려던 이의 고투를 살피며, 해방 이후에도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음에 통탄했다. 정지용의 해방기 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는 시적 사명을 강요하기보다 시적 자유를 먼저 보장해달라 외치며 조선이 조선끼리 싸우는 기이한 광경에 분개했다. ‘옳은 예술’을 추구했으나 고초를 겪다 수감되기까지 했던 정지용과 그에게 드리운 낙인을 어떻게든 벗겨보려 했던 그의 가족이 역사의 상흔을 떠안은 채 고통받는 모습은 마주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잡지 ‘문장’을 꾸려나갔던 소설가 이태준은 정지용과 달리 월북하는데,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태준은 당이 강제하는 방향대로 작품을 쓰는 일을 거부하다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상호의 회고(중앙일보, 1993·6·15)에 따르면, 이태준은 ‘작가의 양심을 뭉개고 개인숭배에 앞장서는 변절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단호히 소신을 밝혔다고 한다.
이념 대립의 비극적인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선거철인 지금도 많은 이들이 좌파 아니면 우파라는 식의 편 가르기를 하며 서로를 비방하는 데 열을 올린다. 자유롭고도 아름다우며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예술을 추구했던 작가들은 불필요한 대립에 휘말리어 비극적인 말로를 맞았다. 우리가 잃은 것, 여전히 잃어가고 있는 것, 앞으로 잃어갈 것은 어쩌면 이분법적으로 분류되지 않고 의견을 말하고 쓸 자유일지도 모른다. 어떤 주장이 충분히 검토되기 전에 당파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도록, 무의미한 이항대립에서 벗어난 생산적인 상호보완이 필요한 때다.